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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의 나비
프란시스코 지메네즈 지음, 하정임 옮김, 노현주 그림 / 다른 / 200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가난의 의미를 일깨우는 책
프란시스코의 나비/ 프란시스코 지메네즈 저/ 하정임역/ 다른,2004
01.Drug - The Czars
이 년 전 고3 인문계 학급을 맡아 진로조사를 한 결과를 보고 적이 놀란 적이 있다. 조사 결과 한 학급의 약 70-80퍼센트의 학생들이 경제경영과 관련하여 학과를 선택하고 있었다. 인문학을 선택한 학생들은 고작 10퍼센트 남짓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단 돈을 벌어야겠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나 경영을 택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학생들의 진로선택의 변이었다. 그럴 수도 있으려니 생각하기엔 뭔가 씁쓸했다.
좀더 안락한 삶을 추구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을 크게 나무랄 것은 없다. ‘로또열풍’과 '부자열풍'이 몰아치는 것도 한반도에 국한된 현상만은 아니다. 자본주의가 일상화되고 전면화되는 현실에서 ‘무소유’를 도드라지게 강조하는 것은 시대착오인지는 모른다. ‘무소유’를 역설하는 책마저도 자본의 법칙을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팔려야 이념이지, 팔리지 않고서는 공염불일 수밖에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냉혹한 현실이다.
경쟁력을 길러라, 자신의 부가가치를 높여라, 자신의 특징과 개성을 살려라, 미래를 준비하라는 학교에서의 교훈적 언설들은 따지고 보면 냉혹한 경쟁의 질서를 알고 적절하게 대처하라는 일종의 처세술적 담론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처세술의 담론은 학교 현장에서 막강한 설득력을 갖는다. 그 담론들은 대개 부드러운 위협의 형태를 띠게 된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어떠어떠한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공부 안 하면 나중에 후회하게 된다는 식이다. 이때의 ‘공부’란 것도 인문학이나 철학과 같은 성찰적 지식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향후 자신의 상품적 부가가치를 높여줄 수 있는 도구적 지식을 이른다. 이런 현실에서 우리네 삶의 국면들을 조목조목 성찰하는 반성적 글쓰기로서의 논술은 입시의 전략적 도구로 전락할 수밖에 없고, 윤리는 타인과 어울려 사는 지혜의 학문이기 이전에 사회탐구의 주요한 전략적 과목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무소유’나 ‘자발적 가난’이라는 말이 학생들의 귀에 들릴 리가 만무하다. 국어시간의 ‘안빈낙도’는 구태의연한 수사에 불과하다. 광고가 열심히 소비의 미덕을 강조하는 상황에서 유행에 뒤떨어진 핸드폰이나 MP3를 떳떳하게 가지고 다니는 학생들은 도저히 어깨를 펼 수가 없다. 단언하건대 대한민국에서 과시적 소비의 전형적 모델이 있다면 그들은 바로 10대다. 또래 집단 속에서 청소년들의 지위는 소비를 통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한 가정을 들여다 보라. 가장 질 좋은 핸드폰이나 음향기기는 대체로 자식들의 몫이지 않은가. 상품이 그들의 정체성을 규정한 지는 이미 오래 전이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했다. 눈물 섞인 빵을 먹어 본 사람의 위로가 배고픈 자를 진정으로 위로할 수 있다. 타인의 가난과 고통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타인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풍요의 시대를 살아온 10대에게는 이런 말들이 낯설다. IMF 이후 TV에서 ‘가난’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들이 방영되고 있지만 6시에서 9시까지의 소위 ‘골든타임’을 점령하고 있는 것은 화려한 의상과 악세사리로 치장한 인기연예인들의 엎치락뒤치락을 보여주는 시끌벅적한 연예프로그램들이다. 대중적인 상품들을 팔겠다는 마케팅의 논리 앞에서 차분한 목소리로 삶을 성찰하게 하는 프로그램들은 자정 무렵이나 새벽녘으로 시간대를 물려야 하는 것이 유감스러운 현실이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류의 책들이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일상에서 반자본주의적 사고방식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다. 부란 나쁘고 가난은 좋다라는 흑백논리도 경계해야 마땅하고, 부만이 선이며 가난은 악이라는 이분법 또한 폐기함이 마땅하다. 적절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법정 스님식의 ‘무소유’는 학생들이 피부로 느끼는 현실감과는 지나치게 동떨어져 있고, ‘흥부전’식의 이야기 역시 낡아도 한참 낡은 이야기다.
<프란시스코의 나비>는 ‘가난’을 소재로 한 성장소설이다. 작가는 실제로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경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지은이가 "이 책의 내용은 거의 90%가 사실이고 10% 정도가 픽션"이라고 밝히듯 이 작품은 거의 논픽션에 가까운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멕시코의 작은 마을에서 살던 꼬마 판치토의 가족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국경을 몰래 넘어 캘리포니아로 간다. 판치토 가족은 미국에서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목화와 포도, 딸기 수확을 하며 유랑생활을 한다. 텐트촌, 오두막, 창고 등지에서 생활하며 끊임없이 이동을 해야만 한다. 힘겨운 삶이다. 그럴수록 판치토와 그의 형제들은 서로 돕고 사랑한다.
너무 작아 일하러 나갈 수 없어 혼자 남아 목화를 따던 판치토는 목화의 무게를 더 나가게 하기 위해 목화더미에 흙을 섞는다. 이런 판치토에게 양심을 속이는 일은 나쁜 짓이라며 꾸짖는 아버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동생이 죽을 고비에 처했을 때 간절히 기도하는 가족들의 모습, 상을 받은 나비 그림을 자신과 싸운 친구에게 선물로 주는 판치토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준다.
그것은 가난한 자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감동이다. 부자라고 해서 감동을 만들어내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러나 어려울 때의 친구가 진정한 친구란 말도 있듯이 한 인간의 진정성은 궁핍함을 통해서 비로소 그 최대치를 구현한다. 가난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인간의 진정성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적 의미에서 그렇다.
삶이 각박해질수록 유머를 잃어버리기 십상이지만 판치토의 가족들은 가난 속에서도 따뜻한 인간미와 유머를 보여준다. 판치토의 아버지는 비록 배우지 못했고 가난하지만, 판치토에게 남을 속이는 것은 나쁜 짓이고 돈보다 신의가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어머니는 흰 목화자루를 몸에 두르고 세상에서 가장 예쁜 웨딩드레스라고 웃으면서 말하며, 형은 불법입국자 단속에도 '이민국 여자는 내 스타일이 아니야'라며 유머를 잃지 않는다.
판치토 가족은 미국에서 어렵게 자리를 잡지만 결국 이민국의 단속에 걸리게 된다. 그러나 '창조주는 몇 개의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으며, 그 권리 중에는 생명과 자유와 행복의 추구가 있다.'라는 독립선언문을 외우는 판치토의 모습에서 여전히 세상에 대한 낙관적 희망을 버리지 않는 꿋꿋한 모습을 볼 수 있다.
고통이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는 속담도 있다. 가난이 어떻게 인간성을 고양시켜주는지, 가난이 어째서 형제애가 꽃피울 수 있는 토양이 되는지, 소비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청소년들이 가난의 의미를 제대로 알 기회가 없다면 그들에게 가난의 의미를 알릴 의무는 문학에 있다. 궁핍을 소재로 한 문학은 한 시대의 유행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다.
<프란시스코의 나비>에는 가난에 대한 일체의 미화도 없다. 가난을 옹호하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표현은 담담하고 어조는 가라앉아 있다. 역경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인간승리’ 류의 결론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희망을 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가안이 어떻게 인간애의 바탕이 되는지를 잔잔한 어조로 말해준다. 12가지의 에피소드들이 각각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탄탄한 구성력도 이 책이 가지는 미덕 중의 하나다.
현재 어문학 교수라는 저자는 현재의 자신이 있기까지의 험난한 과정을 한시도 잊지 않고,반이민단체의 강력한 저항을 무릅쓰고 겨울방학 때에는 학생들과 함께 연극단체를 만들어 이민 농장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연극 공연을 하고 있으며, 불법 이주민 아이들의 교육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