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잉글리쉬 페이션트>에서의 캐서린의 유서



 『매저키스트의 치욕과 환상』의 저자 알프레도 커밍스는 마이클 온다치의 소설을 각색한 안소니 멩겔라 감독의 영화 <영국인 환자 English Patient>를 본 후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쓰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그의 시나리오는 할리우드의 누구에게도 주목을 받지 못한다. 각색한 작품이 지나치게 자학적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영국인 환자 English Patient>는 이미 아카데미상 12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9개 부문을 석권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인 환자 English Patient>는 아카데미가 선호하는 서사, 장대한 스케일, 사랑, 화해 등 이미 관객들에게 보여주어야 할 것은 다 보여주었다는 것이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판단이었다. 미국 영화잡지 '스크린 인터네셔널'이 공개한  알프레도 커밍스의 시나리오 중 홀로 동굴에 남겨진 캐서린의 독백 부분은 다음과 같다.


(비행기 추락사고로 부상을 당한 캐서린은 홀로 동굴에 남겨진다. 어두운 동굴을 비추는 작은 손전등, 헤로도투스의 책과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캐서린에게 남겨둔 채 알마시는 구원을 요청하러 떠난다. 홀로 남겨진 캐서린, 응급조치로 지혈은 했지만 붕대 사이로 피가 새어나온다. 알마시가 피워 놓고 간 장작불은 이미 꺼져버렸다. 손전등마저 꺼지고 눈꺼풀은 감긴다. 장작의 열기마저 식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캐서린은 극심한 갈증을 느끼며 알마시에게 편지를 쓴다.)


한 모금의 물을 찾듯이 나는 당신을 부릅니다. 내 그리운 알마시, 나의 부름이 닿지 않아도 당신은 사막의 어디쯤에서 나를 향하여 오고 있을 것입니다. 어떤 약속도 썩지 않는 불후의 땅, 이곳에서 이집트인들은 일찍이 미이라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사랑이 단 한 번이 아님을 믿은 민족입니다. 알마시, 바람은 사막의 모든 경계선을 지워버리지만 당신과 나의 국가는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바람에 지워지는 모래의 사랑이 아닙니다. 어떤 전쟁도, 어떤 이념도 당신과 나의 국가를 지울 수 없습니다. 이집트인들은 나일강 삼각주의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습니다. 썩지 않는 소금, 그것이 우리의 사랑입니다. 나의 피가 모두 증발되고, 내 안의 모든 물기가 증발되고 나면 나의 사랑은 한줌 소금처럼 이 사막의 동굴에서 빛날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기록하는 또 하나의 역사가. 또 하나의 헤로도투스, 그가 바로 사막입니다. 썩지 않는 나의 사랑 알마시, 얼마 남지 않은 호흡으로 당신의 이름을 부릅니다. 당신의 뜨거운 숨결을 느끼던 목덜미도 차가워졌습니다. 당신을 향하여 달아오르던 입술도 갈라졌습니다. 정신이 혼미해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당신에게로 가는 마지막 꿈이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리운 알마시, 이 모든 것이 당신에게로 가는 불멸의 길이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소금을 꿈꾸는 나일강 삼각주의 바닷물처럼 내 몸의 물기가 말라갑니다. 사막이여, 내 사랑의 심장이여, 너의 몸에 열기가 남아있다면 내 몸의 모든 물기를 앗아 가다오. 아, 알마시, 나는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