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으로 보는 릴리 스튬프의 음악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파울 클레는 1916년 3월에 군에 입대한다. 슐라이스하임에 있는 비행학교에서의 부상으로 인해 그는 사무직을 보며 많은 시간을 그 자신의 예술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그의 그림은 숫자, 알파벳, 느낌표, 정지기호, 화살표, 별, 깃발, 심장과 같은 수많은 추상적 기호들로 채워졌다. 1915년의 클레의 일기는 그의 추상적 예술을 극명하게 설명해준다. “행복한 세계는 차안적 예술을 산출하는 반면, 이 세계가 끔찍하면 할수록 예술은 그만큼 더 추상적으로 된다.”
1933년 히틀러의 나치돌격대에 의해 그의 가택은 수색 당한다. 이 과정에서 클레의 편지는 압수되고, 그해 4월 그는 미술아카데미에서 무기한 해고당한다. 1935년 경화증이 홍역으로 발발하고 이듬해 ‘공피증’이라는 진단을 받게 된다. 불운의 연속이었다. 그는 투병 중에도 붓을 놓지 않았다.
파울 클레는 어려서부터 회화와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바이올린 솜씨는 전문가 수준이었다. 파울 클레는 고등학교 졸업시험을 앞두고 ‘화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음악가가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두고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미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한 사람은 바로 피아니스트 릴리 스튬프였다. 훗날 그의 아내가 되는 그녀가 당시의 그에게 보내온 편지 한 장은 클레의 생을 바꾸어 놓는다.
형태가 없는 슬픔, 보이지 않는 고통, 그것은 분명 우리의 육신 속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악몽을 만들어내는 내 몸 속의 에너지, 내 속에서 간단없이 리듬을 분출시키는 그 약동의 힘, 세계를 비극 속으로 몰고 가는 에너지 그것은 분명 우리 안에 있습니다. 사랑과 고통, 그리고 파괴에의 열정... 어쩌면 이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인지도 모릅니다. 새와 꽃과 서커스와 무희들, 화가는 보이는 것들을 그립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의 붓이 새 속에서 추락을, 꽃 속에서 죽음을, 무희들 속에서 슬픔을 그려주기를 바랍니다. 형체가 없는 것에 형체를 부여하는 저 뮤즈의 권능을 빌어서 말입니다. 소리의 운명은 순간입니다. 그것은 덧없습니다. 대가의 악보라 할지라도 악보는 그 덧없음에 대한 기록일 뿐입니다. 그 덧없음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에 질량과 공간과 리듬을 부여하는 오직 당신의 붓뿐입니다.
노년의 클레의 일기는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이 세상의 언어만으로는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죽은 자와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와도 행복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릴리 스튬프의 음악을 들을 수 없지만 다행스럽게도 폴 클레의 그림에서 우리는 그녀의 음악을 듣게 된다. 클레는 자신의 붓으로 자신의 고통과 사랑, 그리고 세상의 광기를 품었다.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을 품고, 그 한 사람은 또 다시 세계를 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