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수첩 2 알베르 카뮈 전집 14
알베르 카뮈 지음, 김화영 옮김 / 책세상 / 2002년 12월
평점 :
품절


까뮈의 『작가수첩 
                       

             *는 카뮈의 구절, 아래는 필자의 감상

*
어느날 저녁 무심코 참하게 생긴 책 한 권을 뒤적거리다가 별 느낌도 없이 이런 말을 읽었
다: <정열적인 영혼을 지닌 많은 사람들에게 흔히 있는 일이지만, 사람에 대한 그의 믿음
이 무너져 버리는 순간이 왔다.> 한 순간이 지나자 그 문장이 내 마음 속에서 다시 진동했
고,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문장의 에네르기를 제 혈관 속에서 다시 증폭시킬 수 있는 저 감수성은 동양적 절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그는 너무나 젊었던 것이다. 도취와 탕진은 젊음의 특권처럼 보인다, 라고 말하는 나는 더 이상 젊지 않다.

 

*
40세가 되면 사람은 자신의 한 부분이 소멸되는 것을 용납한다. 다만 다 쓰지 모든 사랑이
지금 나로서는 감당할 힘이 없는 한 작품을 일으켜 세워 빛나게 해주기를 하늘에 빌 뿐


고은은 그랬다. "술잔 엎지 마라 나이 서른이면 술잔도 벗이 되느니" 고은다운 수사학이다. 약간의 치기와 혈기방장, 그리고 낭만적 수사. 담대하지 못하다면 담대한 표정을 지어 보일 수도 있다. 그 담대한 표정이 다시 담대한 감정을 낳을 수도 있으니까. 표정은 폼만은 아닌 것 같다. 암튼 한 길 사람 속이야 어찌 되었든 내 표정의 형식은 담대함이다. 부동의 아파테이아. 엄숙한 표정은 사절하고 그냥 그렇게.

 

*
비극은 우리가 고독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해질 수 없다는 데 있다.

 

사랑스런 카뮈의 구절이다. 고독해질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자만이 자유로운 자다.
 
*
죽으면서 자기의 책들을 떠나게 됨을 서운해하는 사제? 아니 그렇다면 영생의 저 격렬한 기쁨이 책과 더불어 맛보는 감미로움을 무한히 초월하지 못한단 말인가?

 

독서의 기쁨을 내세의 축복과 맞바꿀 수 있는 사제는 까뮈였을까?
 
*
마음을 터놓고 솔직해지는 것이 용서할 수 없는 방만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때가 있다.

 

숨기고 우회시키는 것, 타인에게 시간을 주는 것, 한번 더 지연시키는 것, 한 호흡을 늦추
고 한 발짝을 물러서는 것, 좋은 관계란 그런 데서 오는 것은 아닐까.

 

*
산 마테오의 작은 수도원. 바람이 모과나무의 넓은 잎사귀들 위로 비를 휘몰아 친다. 짧은
행복의 순간. 이제는 삶을 바꾸어야 한다.


 
까뮈의 진경은 저런 어법 속에 있다. 툭툭 끊어치는 단타의 매서움. 행복에 대한 단호한 집
착. 번역이 잘된 것인가? 불어를 모르니 속수무책.

 

*
거의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지내다. 계속적으로 신열이 내리지 않아 만사에 의욕이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건강을 되찾아야겠다. 나는 힘이 필요하다. 삶이 손쉬운 것이기를 바라
지는 않지만 삶이 어려운 것이라면 나도 그것에 버금가는 힘을 갖고 싶다.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려면 통제가 필요하다. 화요일에 떠나겠다.

 

왜일까. 이 구절은 나를 압도한다.

 

*
섬들의 세계는 한계가 있다는 사실로 인하여 전혀 제한받지 않는 자유, 오히려 그 반대로 자유는 섬들의 테두리 속에서 더한 기쁨이 된다.

 

역설이 아닌 삶이 어디 있으랴. 죽음을 껴안고 있는 쾌락, 쾌락을 베고 누운 죽음. 장황하게 갈 것 없이 증오는 애정의 다른 표현이다. 테두리가 없는 세계는 공포다. 우린 그 어떤 한계선 안에서만 잘 놀 수 있다. 급격히 수심이 깊어지는 동해안의 해수욕장에서처럼.

 

*
나의 진정한 질투는 온 힘을 다해 그와 함께 죽기를 원하는 일이리라.

 

누가 선배이지? 조르쥬 바타이유가 선배인가? 아님 까뮈? 서가를 뒤져 책을 찾아 보면 알 텐데. 게으른 자가 충족시킬 수 없는 것은 호기심. 바타이유도 그런 표현을 했던가. <죽음으로까지 파고드는 에로티즘>이라고. 한없이 묻혀, 티끌도 없이 사라지고 싶은 욕망의 정상에서 자꾸 미끄러진다. 추락이 그의 숙명임에도 오르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욕망. 나도 너에게로 가서 죽고싶다.

 

*
수주일 동안 나를 살아가게 해주고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던 것의 무대장치.

 

까뮈의 지독한 연극 사랑. 까뮈의 죽음을 알리는 라디오 방송이 흘러나오고서도 그가 몸담았던 극단으로 까뮈가 여행 중에 부친 편지가 몇 일 째 날아온다. 거기에 이렇게 써있었다고 한다. <여러분들은 위대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삶의 이런 느닷없음이라니.

 

*
미친 여자 잔은 44년 동안 창문도 없이 밤낮으로 오직 램프 하나로만 밝힌 작은 방안에 들어앉아 지냈는데 오직 이웃 수도원으로 가서 자기 남편의 무덤을 바라볼 때 이외에는 밖으
로 나가는 일이 없었다. 어쩌면 그것이 진정한 삶인지도 모르겠다.
 
 
까뮈의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선 안 된다. 그는 지독한 행복추구자다. 그가 가장 맘에 들어하는 단어는 바로 <해수욕>이다. 곧바로 까위는 이런 말을 했다. " 삶으로부터 피난하기 위하여 인간들이 고안해낸 그런 장소들- 번쩍번쩍 빛나는 식당, 댄스홀 등등-을 나는 좋아했다. 내 마음에 상처 입은 그것" 한 인간의 몸에는 상극하는 두 개의 진실이 태극의 음양처럼 동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잔잔해 보이지만 의외로 까뮈는 격렬한 사람이다. 그에게는 니이체의 피가 반쯤은 섞여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만큼 까뮈는 니체에 기울어졌다. 얼마나 자주 니체를 말하던가.

 

*
천재란 풍요로움이라는 것, 존재한다는 것은 곧 표현하는 것, 끊임없이 표현하는 것, 무위
는 시간을 느리게 하고 세월을 빠르게 하지만 활동은 시간을 빠르게 하고 세월을 느리게
한다는 것.

 

노자가 들었으면 귀에 거슬릴 법한 말이지만 까뮈의 말은 까뮈의 말 나름의 일리가 있다.
까아옥, 꿈틀거리지 않으면 시간은 모두 까마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