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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약속
로맹 가리 지음, 심민화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2월
평점 :
자기 앞의 생, 달려라 모모,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작가 로맹 가리. 1985년에 고려원에서 나온 로맹가리의 자서전이 『새벽의 약속』이다. 이 책에는 로맹가리의 어린 시절에 얽힌 재밌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로맹가리가 아홉 살 되었을 무렵 발랑띤느라고 하는 한 아름다운 소녀를 사랑하게 된다. 날씬한 몸매에 밝은 눈의 갈색머리 소녀였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는 모르겠으나 아홉 살 무렵의 로맹가리는 이 소녀를 사로잡겠다는 야심찬 포부를 갖게 된다.
문제는 이 소녀가 어린 남자 아이들의 경쟁심리를 묘하게 자극했다는 것. 로맹가리는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자신의 용감성을 증명해보이기 시작한다. 일본 부채 한 개, 무명실 2미터, 버찌씨 1킬로와 어항에서 건진 금붕어 세 마리를 먹은 것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다. 전사로서 물러서지 않는 투지를 그녀 앞에서 증명해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감동의 기색을 보이지 않는다. 달팽이를 먹어치운 날에 발란띤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렇게 말한다. “죠제크는 나를 위해 거미를 열 마리나 먹었어.” 오마이갓!
이에 로맹가리는 연적에게 뒤질 수 없다는 각오로 엄청난 모험을 감행한다. 고무신 한짝을 먹어치우기로 결심한 것이다. 실제로 로맹가리는 발랑띤느 앞에서 주머니 칼로 고무신을 잘라먹기 시작한다. 식은땀을 흘리며 구역질과 싸우면서 혼신의 힘을 다해 고무신을 먹기 시작한다. 이후에 그는 병이 나서 병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로맹가리는 그 일이 있고나서도 칼자국이 난 고무신을 간직하게 된다. 그는 사십이 될 때까지 그의 손이 닿는 곳에 신발을 놓아두었다. 그는 그 대목을 기술하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다시 한 번 나 자신의 최선의 것을 주기 위해 그것을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내 뒤 어딘가에 그 신을 던져 버렸다. 사람은 두 번 살 수 없는 것이다.>
이십대에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몹시 격앙된 기분이었다. 혈기방장한 나이였다. 수틀리면 누구에게는 한 방을 날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적당한 광기, 앞만 보고 내달릴 수 있는 성능 좋은 엑셀레이터가 내게는 있었다. 그런 나이에 로맹가리의 자서전은 더없는 격려였다. 짐 모리슨, 고호, 랭보, 보들레르,니체... 모든 광기의 이름들이 반가웠던 나이였다.
애지중지하던 이 책이 오래전에 사라졌다. 해서 고려원 설응도 후배님께 연락드렸더니 며칠 창고를 뒤적여 이 책을 찾아주셨다. 아쉽게도 읽고 다시 보내달란다. 당시 가격을 보니 3300원이다. 당시 가격의 10배를 쳐드릴 수 있는데................
어쨌든 책을 뒤적여 문제의 구절을 찾아냈다. 나라고 해서 고무신을 먹지 못하겠느냐, 면도칼도 씹어먹을 수 있다고 의기양양하던 이십대의 치기가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이제 먹을 고무신도 없지만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노쌩큐다. 문제는 식은땀을 흘리며 고무신을 먹는 모습을 지켜봐줄 나의 발란띤느가 없다는 사실이다. 더구나 아내는 내가 고무신을 먹는 모습을 보면 나를 싸이코로 알고 친정행을 감행할지도 모른다. 또 하나 고려해야할 사실이 있다. 로맹가리가 1914년생이니까 그가 고무신을 먹던 아홉 살때는 1923년이었다. 그때 만들어진 고무신은 질이 형편없었을 것이다. 먹성 좋은 장부라면 거뜬히 소화해낼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눈부신 화학공업의 발달 덕분에 요즘 고무신은 질기기 강철 같다. 만용의 정신으로 똘똘 뭉친 로맹가리도 21세기의 고무신을 먹을 엄두조차 내지 못햇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즉, 끽다거(喫茶去). 차나 한 잔 마시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