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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하우스
스티븐 J. 굴드 지음, 이명희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2년 1월
평점 :
굴드, 진화이론으로 다양성의 가치를 논하다
풀하우스/스티브 제이 굴드/사회평론/2003
미국의 남북전쟁 전쟁 때 북군은 표준화를 이용해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방아틀뭉치가 고장난 총과 노리쇠뭉치가 고장난 총이 있다면 적어도 한 정은 사용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오늘날의 상식이다. 그러나 당시의 총은 방아틀뭉치와 노리쇠뭉치를 갈아끼울 수 없게 되었다. 다시 말해 부품끼리의 호환성이 없었다. 결국 1개의 부품이라도 파손될 경우 소총을 통째로 버려야했다.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비효율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북군은 소총을 표준화하였다. 노리쇠 뭉치가 고장난 총의 방아틀뭉치를 방아틀뭉치가 고장난 총에 끼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결국 표준화를 통해 호환성이 뛰어난 소총을 가진 북군은 이 표준화 덕분에 전쟁에서 승리를 얻어낼 수 있었다. 표준화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실감케 해주는 사례다.
‘3S' 즉 표준화(Standardization)?객秉廢(Simplification)?걋渙화(Specialization)는 생산성 향상에 필수적이다. ‘3S'은 대량생산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제품의 질적 향상과 가격의 하락으로 이어졌다. ‘3S'로 대표되는 획일성과 규격화는 경제성, 즉 효율성을 낳았다.
인간의 지각 시스템도 어찌 보면 획일적이라 할 수 있다. 장미의 붉은색과 혈액의 붉은 색은 엄격하게 말해서 다르다. 장미의 붉은색과 입술의 붉은색도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그 다양한 사물 현상들을 뭉뚱그려서 ‘붉다’라고 인식한다. 사물은 저마다의 섬세한 특징을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하나의 개별적 사물이 가지는 섬세함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고 추상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종달새의 다리와 타조의 다리, 코끼리의 다리와 조랑말의 다리는 엄격히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획일적으로 ‘다리’라고 인식한다. 언어의 이런 추상성 덕택에 우리는 세계 속의 사물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여, 세계에 대한 통일적 인식을 획득했다.
과학도 이런 획일화, 추상화의 산물이다. 우리는 빗방울이 떨어지고, 나뭇잎이 떨어지고, 돌멩이가 떨어지는 등의 수많은 낙하현상을 경험한다. 우리의 인식의 시스템은 그것을 낱낱의 경험으로도 인식하지만 아울러 그 수많은 경험적 사례로부터 ‘낙하법칙’이라는 추상적 이론을 추출해낸다. 추상(抽象)이란 개별적 현상으로부터 공통점을 ‘뽑아내는’ 과정이다. 그런데 사물의 공통점을 뽑는 추상(抽象)의 과정은 구체적 사물이 가지는 개별적 고유성을 버리는 사상(捨象)의 과정과 동전의 양면이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장미꽃을 ‘붉다’라고 표현했을 때, 우리는 그 장미가 가지는 고유의 독특한 색깔을 간과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나 하나의 구체적 사물은 바로 그 독특한 무늬와 향기 속에 자신의 개별성을 구현하고 있지만 불행하게도 우리의 인식은 추상적이고도 획일적으로 사물을 인식하게 된다.
세상은 이분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이 있고 밝음이 있지만 새벽이나 저녁과 같이 흐리멍덩한 시간도 있으며,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상태도 있다. 획일적으로 ‘어떻다’라고 단정지을 수 없는 애매모호한 상황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퍼지이론의 이론적 핵심은 사물이 존재하는 양상을 섬세하게 인식하자는 데 있었다. 퍼지이론에 의하면 공산품을 제작할 때 사물의 다양한 측면을 의식한다면 보다 정확하면서도 효율적인 물건을 생산할 수 있다고 보았다. 퍼지이론의 중요성은 복잡한, 즉 단순치 않고 ‘흐리멍덩한’ 사물 현상을 보다 엄격하고 정확하게 처리하는 수학적 이론이라는 데 있다. 구체적 사물 현상을 획일적 도식으로서가 아니라 보다 세련된 수학적, 즉 정확하고도 섬세한 사고로써 처리함으로써 보다 바람직한 기기들을 만들자는 것이 퍼지이론을 공학적으로 이용한 과학자들의 의도였다.
추상화를 통해 인간은 자연의 사물들을 질서 있게 분류하여 자연을 체계화시켰지만, 그 반대로 하나하나의 사물이 가지는 특성과 뉘앙스(섬세한 차이)를 잃어버렸다. 철학자 니체는 이를 두고 ‘추상은 구체에 대한 폭력’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과도한 추상화가 구체적 사물이 가지는 섬세한 느낌과 풍부한 표정을 잃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계를 획일적으로 인식하지 않겠다는 것은 결국 사물이 가지는 섬세한 느낌과 풍부한 표정을 그 자체로 인식하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사물이 가지는 섬세한 느낌과 풍부한 표정, 그 어떤 추상적 언어로도 환원될 수 없는 그 사물만이 가지는 독특성의 세계, 바로 그것이 우리가 귀로 듣고, 눈으로 볼 수 있는 자연의 세계, 곧 다양성의 세계다.
어렸을 때 생물학 도감을 펴면 어류에서 파충류, 포유로의 진화를 보여주는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생물학 도감은 등이 유인원에서 현생인류로의 진화과정 또한 친절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그림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진화는 단세포-다세포-파충류-포유류의 단계를 거쳐 영장류인 호모사피엔스로 단선적으로 진행되고 인간은 단선적 진화의 정점에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것이 "오만한 인간중심주의자들이 만들어낸 허구"라고 일축해버린다. 그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단적으로 말한다. 그는 인간을 다른 생물들과 분리시켜 우월감을 느끼는 전통적 관념을 버리고 인간을 생명의 거대한 역사 속에 나타난 우연한 존재로 생각하라고 말한다. 인간이 다른 생물에 비교해 특별히 잘난 게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니 인간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할 자격이나 특권이 없다는 이야기다. 인간은 다른 생물들처럼 자연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생물체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
그는 진화를 우발적인 돌연변이와 이에 대한 자연선택의 결과로 해석한다. 고생물의 화석 연구를 통해 그는 진화가 특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고, 1972년 '진화는 생태계의 평형상태가 갑자기 깨어지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가설을 제안하여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굴드는 진화의 동력을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보았다. 즉 생물은 생태계가 안정된 평형 상태에서 오랫동안 거의 진화하지 않다가 빙하기, 운석 충돌 등으로 평형 상태가 깨지면서 순식간에 진화하거나 소멸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은 진화를 곧 '발전'으로 보는 직선적 생명관, 인간을 궁극적 가치로 보는 인간중심주의에 대한 우회적인 공격이었던 셈이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인간의 언어능력은 그 능력이 갖는 장점을 획득하기 위한 적응과정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뇌가 커진 결과로 인해 얻어진 ‘우연의 부산물’일 뿐이다. 또 진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뇌 용량이 커지거나 말의 체구가 커지는 등의 직선적인인 과정이 아니며, 다양한 종이 우발적으로 창출되어 제각기 생존하는, 즉 모두 함께 모여 지구라는 ‘집house'을 꽉 ’채우는full‘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한 ‘풀하우스’는 다양한 생물들이 함께 공존하는 진화의 최종목적지를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지구의 역사를 다시 비슷한 조건에서 반복한다 해도 인간이 탄생할 확률은 거의 제로가 되는 셈이다. 결국 인간의 바람과는 달리 '인류의 탄생은 한순간 우연히 일어난 우주적 사건에 지나지 않으며, 생명의 씨앗이 다시 뿌려져 생명의 나무가 비슷한 조건에서 자라난다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사건'일 뿐이다.
그는 "생명의 우수함은 한 뛰어난 특성이 아니라 넓게 퍼져 있는 차이"라며 차이를 강조한다. 차이가 낳는 것은 다양성이다.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의 특성만을 배타적으로 우월하게 강조한 결과다. 인간이 진화의 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도 아니요, 수많은 자연계의 생물종처럼 우연의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인간은 보다 겸허해질 수 있을 것이다. 파괴된 생태계를 회복하는 것은 인간 종(種)으로서의 겸허함을 회복하는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