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의 여신, 광장으로 나오다 - 법학 이야기 지식전람회 18
강정혜 지음 / 프로네시스(웅진)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법은 시대 정신의 반영이다

정의의 여신, 광장으로 나오다/강정혜/프로네시스/2006


헌법은 국가의 정체성과 권력의 관계를 규정하는 하나의 커다란 틀이다. 그 틀을 시대에 걸맞게 바꾸어야 한다는 개헌론으로 정치권이 시끄럽다. 한쪽에서는 개헌의 당위성을 외치고 한쪽에서는 불가론을 외친다. 한 국가의 정체성과 권력의 관계를 결정하는 헌법에 손을 댄다는 것은 신중을 요하는 일이다. 결코 정략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할 사안이 아니다. 국민들의 법에 대한 인식의 깊이가 필요한 것도 이 대목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법이라면 전문가들의 영역이라는 것이 일반인들의 법에 대한 정서다.


그러나 『정의의 여신, 광장으로 나오다』의 저자, 강정혜는 법은 우리에게 거추장스러운 것이 아니라 꼭 필요한 제도라고 말한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누구나 법과 밀접한 연관을 맺으며 하루하루의 생활을 영위해 간다. 가령, 아침에 일어나 커피를 마셨는데 커피가 상했을 경우에는 법에 의해 제조사에 책임을 추궁할 수 있고, 버스를 타는 순간 우리는 자동적으로 운송계약의 당사자가 되고, 운행 중 사고가 나면 ‘자동차손해배상보장법’에 따라 손실을 보상받을 수 있다. 또 회사에 출근하면 근로계약과 노동법의 영역에 들어가게 된다.


저자는 법이 왜 중요한가를 ‘론스타 과세 문제’의 사례를 들어 설득력 있게 말한다. 론스타는 국경을 넘다드는 거대한 투기자본이다. 론스타는 IMF 이후 외환은행 인수를 통해 4조 5,000억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차익을 남겼다. 이익이 있는 곳에 과세가 있는 법. 그러나 그들은 한 푼의 세금도 내지 않았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론스타는 펀드의 주소지를 세금이 가벼운 벨기에로 옮겼고, 한국과 벨기에는 ‘이중과세방지협약’을 맺어 한쪽에서 세금을 내면 다른 쪽에서 세금을 징수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근거로 엄청난 세금 납부에 대한 책임을 피했다는 것이다. 제일은행을 사고팔아 1조원 이상을 남겼던 펀드 뉴브리지 캐피탈 역시 이런 방법으로 무거운 세금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저자는 거래상의 이익을 고려해야 한다면 물건을 잘 만들어 수출을 잘 해서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 못지않게 촘촘하고 튼튼하게 법률의 그물망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대국 법률의 허술함을 이용해 최대한 자기 이익만을 챙기려는 게 자본의 속성이므로, 느슨하고 조악한 법률은 욕심 많은 자본가들이 부당한 이익을 노릴 기회를 많이 허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제국주의 시대에는 총과 칼이 한 나라의 이익을 보장해주었지만 자본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세계화 시대에는 잘 짜여진 법률의 그물망만이 국익을 지켜줄 수 있는 무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법률조항을 암기하는 것으로 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법률조항에 대한 해석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1999년 무렵 헌법재판소는 제대 군인에게 가산점을 주는 법률조항이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한편 2001년 헌법재판소는 국가유공자와 그 유족들에게 가산점을 주는 법률조항은 합헌이라고 결정했다. 왜 이런 결정이 내려졌을까. 저자는 바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 ‘시대정신’이라고 말한다. 제대군인에게 가산점을 주는 것은 남녀평등이라는 시대정신에 위배되기 때문에 가산점을 주는 것을 위헌이라고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만약에 제대군인에게 가산점을 주는 제도에 대한 위헌 여부의 판결이 전쟁의 상황에서 내려져야 했다면, 즉 시대정신이 애국심을 요구하는 상황에서라면 아마도 다른 판결이 내려졌을 것이다. 법을 집행하는 이들은 이렇게 시대가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법을 암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법률들의 공통의 틀’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법학을 공부한다는 것은 그 틀의 형태를 파악하기 위해 훈련을 받는 것이고 그 훈련의 결과로 법적 사고력이 갖추어지면 복잡한 사회 현실에 걸맞은 틀을 적용하여 법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한다. 가령 어떤 사람이 봄에 에어컨 판매업자와 에어컨 1대에 대한 구매계약을 체결하고 대금은 납부하였다고 하자. 그런데 아직 여름이 안 되었기 때문에 바로 배달받을 필요는 없었다. 그리하여 운송일자는 몇 달 후인 여름초로 정했다. 그런데 막상 여름이 되어 에어컨을 배송받으려 하자 판매업자가 하는 말이 구매계약을 체결했던 봄 이후 품귀현상으로 가격이 많이 올랐으니 오른 가격을 추가로 지불하면 물건을 배달해주고 아니면 계약을 취소하겠다고 하면 여러분이라면 이런 판매업자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겠느냐고 저자는 독자에게 묻는다. 법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잘 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의 법적인 핵심 요소를 ‘바뀐 약관의 적용 여부’라는 단 한 어구로 추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얽힌 상황을 해결함에 있어서는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원칙, 곧 법의 틀을 찾는 것이 급선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법의 틀이라고 해서 어려운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는 합리적으로 사고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예로 들어 법적으로 사고하는 훈련이 중요함을 역설한다.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는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면서, 약속한 날까지 돈을 갚지 못하면 자신의 살 1파운드를 주겠다고 계약한다. 약속한 날까지 돈을 갚지 못한 안토니오는 나중에 빚을 10배로 갚겠다고 하였지만, 샤일록은 안토니오의 화해 요구를 무시하고 예약대로 안토니오의 살 1파운드를 가지겠다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은 결국 법정에 서게 되었고, 재판관 포샤는 "살 1파운드는 법률에 비추어 그대의 것이니, 절단해 가라. 그러나 계약서에는 살 1파운라고만 쓰여 있을 뿐임을 명심하라. 피 한 방울이라도 흘리는 날에는 당신의 재산이 모조리 국법에 의하여 나라에 몰수될 것이다."라고 판결한다. 이에 저자는 안토니오와 샤일록 사이의 계약은 사람의 신체를 거래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공서양속(公序良俗) 위반’(선량한 풍속과 사회질서에 위반한 사항을 내용으로 하는 법률행위)이므로 무효라고 간단하게 못을 박는다.


엘빈 토플러는 미국의 기업은 시속 100마일, 정부 관료조직은 25마일, 학교는 10마일, 정치조직은 3마일, 그리고 법은 1마일의 속도로 달리고 있다고 비유하며 법의 보수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저자는 영미법과 대륙법의 융합, 공법과 사법의 융합, 국내법과 국제법의 융합으로 우리가 처한 현실적 문제들을 해결해나가야 함을 강조한다. 법이 현실에 맞게 진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저자는 14년간 로펌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던 경험을 살려 우리의 일상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법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구체적 사례를 들어가며 알기 쉽게 설명한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통해 민법과 상법 그리고 형법을 살펴보는 식이다. 때문인지 법이 딱딱하고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현대 법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대륙법과 영미법의 형성과 차이점 등을 알아보고 우리 법체계의 계통을 추적해 보고 있지만 문체는 현학적이지 않고 쉽고 친절해 법의 초보자들이 독서의 재미를 느끼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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