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끔찍한 장면.

이라크에서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거리에 불을 지르던 군인들의 철모에서는, 탱크에서 틀어놓은 경쾌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군인들은 그 노래를 흥얼거리며 생각없이, 신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런 사실에 대해 들떠서 얘기한다.

한 손은 의자의 팔걸이를 꽉 움켜쥐고, 다른 한 손은 뺨 위에서 떨린다. 어느새 나는 눈물을 떨구고 있다.

군인들의 인터뷰에 이어지는 장면은, 폭탄으로 찢긴 여자와 아이들의 시신, 이들에게 무슨 죄가 있냐고 묻는 이라크인, 고통에 울부짖는 상처입은 어린이들이다.

아, 기억을 되짚는 것만으로도 목구멍이 뜨겁고 눈앞이 부얘진다. 겨우 스무살 즈음의 청년들을 그렇게 만든 건 무엇일까. 그들은 앞으로도 계속 흥겨운 멜로디로 전쟁과 살상을 떠올릴까. 아프다. 너무...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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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천원짜리 작은 수박덩이를 들고 땀을 닦기 전 거짓말처럼 몇 번 수박을 두드렸지만, 난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대답도 거부하는 수박의 울림, 속을 보지 않는 말, 말을 드러내지 않는 빛깔, 자르면 붉은 잇몸 같은 속이 검은 來生의 씨앗들 어서 가져가라, 어서 가져라가, 촘촘히 박혀 있을 게다. 자랄 수 없는 바닥에 퉤 퉤 뱉어지는, 숨 막히게 더운 여름날, 까만 수박 씨앗들 검은 파리떼만도 못하리라, 한끝 유쾌한 단맛이 끝난 뒤에 저렇듯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生을 수박씨들은 감추고, 먼 곳에서 우레가 돋는 먹장구름의 뒤꼍에서 나는 물찌똥을 누고 푸른 죄의 싹을 틔우러 예까지 흘러왔다 지루한 낮꿈의 장마를 건너리라

  아내의 배가 자꾸 불러온다, 老産의 배에 검푸른 줄을 긋듯 내 은밀한 손길이 뱀처럼 쓰다듬는 한낮, 아내는 거꾸로 들어선 아이 걱정에 시퍼런 메스 같은 부엌칼을 자꾸 내게 내미는지 모른다 수박은 몇 개월째에서 배를 가르려고 이승에 나온 것일까

 

 

갑자기 생각난 책이 있어 찾으려고 책장을 뒤지다가, 큰 책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꽂혀있는 시집을 발견했다. 언제 샀는지 기억에 없다. 읽기는 했던가? 되는대로 펼쳐 몇 페이지 보고 나니, 한 켠에 묻혀 있던 기억이 올라온다.

시집은 대개 내 사랑의 대상이 아니므로, 한 번 훑어본 후 책장의 빈 곳을 찾아 아무데나 넣어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눈에 띄면 그제서야 비로소 다시 읽기 시작한다. 오늘은 그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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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훔치다
파스칼 브뤼크네르 지음, 김운비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7월
평점 :
품절


(빛깔·소리·목소리·모양 따위가) 마음에 좋은 느낌을 자아낼 만큼 곱다(예쁘다)

 

‘아름답다’에 대한 국어사전 정의이다. 여기서 보듯 아름다움이란 시각이나 청각과 같은 감각을 매개로 인식되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이나 예술 작품 등 다양한 것을 보고 들으면서 아름답다고 말한다. 그러나 감각은 매개일 뿐, 실제로 중요한 것은 ‘느낌’이다. 동일한 대상의 아름다움에 대한 판단이 다르다면, 그것은 서로 다른 감각이 아니라 서로 다른 느낌에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다른 것과 달리 사람을 아름답다고 말할 때, 그것은 감각으로 인식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의 아름다움은, 타인의 가슴에 닿을 수만 있다면, 외모에 관한 것이거나, 심성에 관한 것, 혹은 그 둘이 합쳐져 한 인간을 형성하는 그 무엇에 관한 것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인간의 아름다움을 획일적인 기준에 따른 외모로 더 많이 평가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확실히 서구의 영향이랄 수 밖에 없는 이러한 경향에 대해, 일찍이 서구에서도 심히 못마땅해 하는 사람들은 존재했던 모양이다. 파스칼 브뤼크네르도 그 중 하나로 보인다.

 

슈타이너 부인 프란체스카는 20여 년 간 수백명의 애인, 이라기 보다는 섹스 파트너를 가졌다. 남자건 여자건 가리지 않았고, 한 사람에게 얽매이지 않으려 했기에 갈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깨닫는다. 자신에게 머무르던 사람들의 시선이 보다 젊고 아름다운 여인들에게로 옮아가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늙고 지친 슈타이너와 난장이 레몽을 설득해 ‘아름다움의 건초장’에서의 은밀한 작업을 시작한다. 프란체스카의 주장은 이렇다. 아름다움이란 타인의 시선을 받을 때 비로소 생겨나는 것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괴로움을 주므로 원천적으로 제거되어야 한다. 가장 아름다운, 갓 피어난 꽃처럼 싱싱한 여인들을 지하 골방에 가두어놓으면 불과 1~2년 만에 그들은 말라 비틀어진 노파가 되고 만다. 그녀의 주장은, 미친 소리임이 분명하지만, 나름의 철학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미(美)란 ‘두렵고 무서운 것의 시작’이라는 릴케의 말마따나 지나치게 아름다운 사람이 본의 아니게 타인을 괴롭게 하거나 그로 인해 자신이 상처받는 일까지 생기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다. 아름다움의 해악을 극렬하게 주장하면서,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을 제거하면 아름다움은 스스로 시들어버린다고 말한 슈타이너 부부와 레몽이, 실은 젊은 미녀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정기를 마심으로써 자신들의 육체를 나이보다 젊게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란체스카의 주장과 거기에 점점 이끌리는 뱅자맹의 모습에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린가, 잔뜩 인상을 찌푸리던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푸하, 웃고 만다. 스스로의 주장과 배치되는 행동을 하는 부조리함이라니.

 

이 소설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오로지 외면적인 것, 특히 섹스 어필이다. 이는 '스무 살의 아름다움은 자명한 거야. 서른 살의 아름다움은 보상이고 쉰 살의 아름다움은 기적이지.' 라는 프란체스카의 대사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이 아무리 곱게 늙어도 성적 매력이 감퇴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젊음이야말로 육체적 성적 아름다움의 근원이고, 슈타이너 부부와 레몽이 훔치는 것도 실상 아름다움이라기 보다는 젊음이다.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려는 부질없는 욕망에 몸을 맡긴 어리석은 이들이여.

 

<아름다움을 훔치다>는 인간의 헛된 욕망에 관한 풍자이고 조롱이다. 브뤼크네르는 젊음에서 비롯되는 육체적 아름다움에 현혹되는 사회의 경망스러움과 아름답게 늙어갈 줄 모르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웃는다.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통렬한 이야기, 읽는 재미 또한 넘치는 멋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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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4-07-29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이주의 마이 리뷰 따라 왔습니다.(알라딘 서재에서...)
기이하고 아름다우며 통렬한 얘기라니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urblue 2004-07-29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코멘트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떤 소설을 좋아하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류의 얘기들이 잘 읽힙니다. 기회 되시면 읽어보세요. 아마 오랜 시간 잡아먹지는 않을겁니다. 이거 상당히 재밌거든요. ^^

IshaGreen 2004-08-01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하고 갑니다^^
멋진 리뷰였습니다 한번 읽어보고 싶네요^-^

urblue 2004-08-01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합니다. ^^

스스무 2004-11-15 2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재미 있게 읽었던 책이죠...

많은 분들이 아름다움을 훔쳤으면 좋겠네요...
 

오래간만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 속에서 들리는 건 한숨 소리와 알 듯 모를 듯 이상한 말들 뿐이다. 결혼한 지 3년이 넘었는데 갑자기 강아지를 키우며 정을 붙인다지를 않나, 대학 때 공부 안한게 후회된다고 하지를 않나,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라지를 않나. 남편과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는다. 그 친구와 이토록 오래 전화로 얘기한 건 아마 처음인 듯 싶다. 무슨 말이든 계속 하고 싶어하는 게 뻔히 느껴지는 걸, 일하는 중이라 더 이상 통화하기 어려워 그냥 끊었다.

저녁에 만난 1년차 신혼 부부는 같이 사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역시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끊임없이 티격태격하는게 보이고, 단순히 사랑 싸움의 정도를 넘어 있다.

몇년 전 결혼을 생각할 때 가장 큰 고민은 결혼 후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점이었다. 그런데 주위의 결혼한 커플들을 보니 그건 핵심이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다른 생활 습관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서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것과 금전적인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는 것이 문제의 본질인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이런 문제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라 사랑으로 해결한다는 것도 우습다.

괜히 기분이 우중충하다. 너무 덥고, 친구들 걱정 약간에, 사는 게 뭐 이런가 하는, 내가 느끼지 않아도 될 듯한 씁쓸함까지.  이 모양이니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들 까닭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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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 SF에 빠져서 두어달 간 각종 SF소설들만 보았다. 올 여름 내 관심의 대상은 그림이 될 듯 하다. 클림트를 시작으로 실레와 고야, 그리고 전시회가 열리는 샤갈과 달리까지.

샤갈전과 달리전에 가자고, 사전 지식이 필요할테니 책을 보는게 어떻겠느냐고 친구를 꼬드겼더니 친구가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와 <달리, 나는 천재다>를 구입해서 내게 <샤갈...>을 넘겼다. 오늘 아침에 읽기 시작했는데, 일단 내가 사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다. (친구한테는 약간, 아주 약간 미안한 마음이다.) 수필집이나 자서전은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자신의 일상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늘어놓는 내용은 돈 주고 읽고 싶지 않다. 이 책을 다 읽고나면 샤갈의 그림에 대한 이해가 더 넓어질지 좀 의심스럽다. 게다가 뒤에 실린 컬러 화보도 몇 장 되지 않는다. 차라리 다른 책을 고를 걸 그랬나.

지난 주말, 17일과 18일 양일간 샤갈전에 만여명의 관객이 몰렸단다. 사람 많을 때 가면 제대로 보지 못할텐데, 언제 가야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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