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원짜리 작은 수박덩이를 들고 땀을 닦기 전 거짓말처럼 몇 번 수박을 두드렸지만, 난 아무것도 모른다 어떤 대답도 거부하는 수박의 울림, 속을 보지 않는 말, 말을 드러내지 않는 빛깔, 자르면 붉은 잇몸 같은 속이 검은 來生의 씨앗들 어서 가져가라, 어서 가져라가, 촘촘히 박혀 있을 게다. 자랄 수 없는 바닥에 퉤 퉤 뱉어지는, 숨 막히게 더운 여름날, 까만 수박 씨앗들 검은 파리떼만도 못하리라, 한끝 유쾌한 단맛이 끝난 뒤에 저렇듯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生을 수박씨들은 감추고, 먼 곳에서 우레가 돋는 먹장구름의 뒤꼍에서 나는 물찌똥을 누고 푸른 죄의 싹을 틔우러 예까지 흘러왔다 지루한 낮꿈의 장마를 건너리라

  아내의 배가 자꾸 불러온다, 老産의 배에 검푸른 줄을 긋듯 내 은밀한 손길이 뱀처럼 쓰다듬는 한낮, 아내는 거꾸로 들어선 아이 걱정에 시퍼런 메스 같은 부엌칼을 자꾸 내게 내미는지 모른다 수박은 몇 개월째에서 배를 가르려고 이승에 나온 것일까

 

 

갑자기 생각난 책이 있어 찾으려고 책장을 뒤지다가, 큰 책들 사이에 보이지 않게 꽂혀있는 시집을 발견했다. 언제 샀는지 기억에 없다. 읽기는 했던가? 되는대로 펼쳐 몇 페이지 보고 나니, 한 켠에 묻혀 있던 기억이 올라온다.

시집은 대개 내 사랑의 대상이 아니므로, 한 번 훑어본 후 책장의 빈 곳을 찾아 아무데나 넣어둔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눈에 띄면 그제서야 비로소 다시 읽기 시작한다. 오늘은 그의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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