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잇>을 보기 전에 먼저 읽었다.

예리한 칼날처럼 당대의 한 중심을 도려내고 있는 작품이다. 엄연히 곁에 있으면서도 모두가 모른 체하고 있는 죽음의 문제, 스쳐가는 교통사고쯤으로 여기면서 아무도 진지하게는 생각 않으려고 하는 그 고전적 주제를 몽타주를 방불하는 절묘한 구성으로 배열하고, 만화 같은 저돌성으로 들이미는 솜씨가 가히 충격적이다. - 이제하(소설가)

문장은 짧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불필요한 감정은 가차없이 잘려나가고 짧은 세 개의 사건은 단숨에 읽힐 정도의 속도감을 지닌다. 사설탐정이나 살인청부업자, 수입원고 신원이 밝혀지지 않는 유령 같은 인물들이 벌이는 죽음을 둘러싼 어두운 모험들...... 단지 여기서는 누군가를 죽이는 대신 누군가를 자살하게 한다. 구성의 치밀함으로 이런 전복적 고안이나 허구적 설정을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 줄 아는 서술의 힘이 흥미롭다. - 최윤(소설가, 서강대 불문과 교수)

소개글이 엄청나다. 뭐 책 얇고 잘 읽혀서 금방 읽긴 했다. 그런데, 별 느낌은 없다. 

이 책이 출판된 것이 1996년이라니까, 벌써 8년의 시간이 지났다. 당시에는 제법 충격적이었을지도 모를 이 소설은, 현재의 내가 읽기에는 전혀 충격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자살을 도와주는 화자도, 지금 기억나지는 않는데, 대학 때, 그러니까 이 책보다 먼저 나온 어느 소설에서인가 읽은 설정이다. 

한편으로는 8년의 세월에 가치를 잃어버리는 소설이 과연 좋은 작품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래저래 김영하와는 인연이 아닌가보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4-09-18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엊그제 김영하의 호출를 읽었는데...별로였습니다. 엘리베이터에 낑긴 남자랑, 오빠가 돌아왔다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이젠 제 돈주고 읽고 싶지는 않은 느낌...으흠..그랬습니다.^^

쎈연필 2004-09-18 0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를 자극 잘 하는 작가죠... 당대적으로 말이죠. 근데 그 당대성이란 게 10년을 못 넘기니...

chika 2004-09-18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글을 읽어보니 저 표지 그림이 당췌 어울리지 않는단 생각이 드네요... ㅡㅡ;;

hanicare 2004-09-18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
 

Barn

 



Georgia O'keefe

 


Life and Death

 

Poplars, Lake George


 


Scurrying Home

 


The Terminal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에레혼 2004-09-18 06: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박경리의 손을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어요
조지아 오키프의 손...... 그 선의 흐름과 각도만으로도 한눈에 예술가의 손임을 알아보겠네요
손의 표정의 변화, 세월의 흐름과 연륜이 묻어나는......
늘 얼굴 사진만 찍을 게 아니라 우리도 한번씩 자신의 손을 기록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해봅니다

urblue 2004-09-18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친구 중 하나는 손이 예쁜 남자를 좋아하죠. 손에서 그 사람의 감성을 읽을 수 있다고 하대요.
 

이 글은 내가 해석했음을 밝힌다. (절대 번역 아니다.) 따라서, 상당한 의역과 오역이 있으리란 것 쯤 당연히 예상하기 바란다. 어려운 문장은 대충 뭉개고, 잘 모르는 문장은 과감히 건너뛰었다. (나는 이제부터 삼미의 팬이 되기로 했다.) 이 글을 읽고 나서 누군가와 오키프에 관해 대화를 나눴는데, 상대방으로부터 으잉, 그게 아닌데, 하는 말을 듣더라도 내 책임은 아니다. 그건 이 글을 읽은 당신의 책임이다. 원문을 보고 싶은 사람은 아래 링크를 열어 확인하면 된다. 다만, 원문과 대조한 후 내용이 틀린 걸 발견하더라도 혼자만 조용히 알고 있으시라. 괜히, 저, 여기 잘못됐는데요, 라고 말해봤자 나한테 미움만 받을 뿐이다.

그림은 내 마음대로 골랐다. 그림이 많이 걸려있는 사이트도 링크할 테니 알아서 좋은 그림 감상하시라.

 


추상예술의 독특한 혼합이자 대표적인 화가인 조지아 오키프는 정물화의 구성에 있어 순수함, 대담함, 명쾌함으로 잘 알려져 있다. 20세기 최고의 여성 화가이면서 sexist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오키프는 시대를 앞서나간 화가였으며 미니멀리즘과 Reductivism (환원주의 or Minimal Art)을 일찍부터 사용한 모더니스트였다. 화가로서의 긴 생애 동안, 그는 인간이 만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관심을 두었지만 살아있는 생물이나 사람을 그린 적은 거의 없다. 밝은 색상을 사용했고, 100점 이상의 꽃 그림을 그렸으며, Black Iris (1926)와 Red Poppy (1927, 63×71cm) 처럼 종종 대형 사이즈의 작품을 제작했다. 또한 유기적인 통합체를 표현하기 위해 자궁의 구멍이나 벽과 같은 파편들을 그렸다. 사막의 풍경을 거대한 크기의 캔버스에 담아냈고, 꽃이나 소의 두개골 같은 대상을 근거리에서 상세히 묘사했다. 때때로 꽃과 뼈처럼, 다른 경우에라면 전혀 관련이 없었을 대상들을 병치하기도 했다. (Horses Skull with White Rose 1931)

Georgia O'keefe (1918)

 


 

 

 

 

 

 

 

 

 

 

Black Iris Ⅲ (1926)                                                          Red Poppy (1927)


Horses Skull With White Rose (1931)

 

오키프는 1887년 9월 15일 위스콘신 주의 선 프레리에서, 농사를 짓는 가정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중서부의 농장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의 예술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는 이후에도 결코 도시에서 편안히 살지 못했다. 프레리 지역의 민주적인 평등주의로 인해 오키프는 예술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용기와 독창성을 가질 수 있었다.


오키프가 여섯살 때 그의 가족은 버지니아 주의 윌리암스 버그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오키프는 처음으로 미술 수업을 들었고, 재능있는 학생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2년 후에는 시카고의 Art Institute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1907년 뉴욕의 Art Student League를 다니면서 William Merritt Chase의 초상화와 정물화 수업을 들었다. Chase는 유명한 화가였는데, 그는 미국의 그림이 세련되지 못하다고 믿었으므로 유럽의 전통적인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오키프는 재료의 사용 방법이나 빨리 그림을 그리는 방법 등의 전문적인 기술을 배웠다. 그곳에서의 첫 해가 끝날 무렵, 그는 정물화 부문의 상을 받았다. 또한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의 갤러리 291을 알게 되었고, 그 곳에서 로댕, 마티즈 같은 화가들의 작품을 접했다. 스티글리츠는 photographic chemist로 시작해 자수성가한 사람이었는데, 사진술에서 상당한 기술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자신이 사진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작품들을 전시하기 위해 갤러리를 열었고, 후에는 아방가르드 데생과 그림들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Alfred Stieglitz (1907)

오키프의 아버지가 여러 가지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하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키프는 2년 동안 상업 화가로 일해야 했다. 결국 오키프의 가족은 버지니아의 Charlottesville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그는 Alon Bement 대학의 여름 학기 미술 수업에 참가했는데, Alon Bement는 뉴욕 컬럼비아 대학의 초빙 교수였다.

1912년부터 1914년까지 오키프는 거칠고 떠들썩한 변경지역인 텍사스 아마릴로에서 드로잉과 서법을 가르쳤다. 그는 텍사스 평야의 광막한 공허에 강력하게 감응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오키프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검정색 맞춤복을 입고 머리를 늘어뜨린 채 혼자 오랜 산책을 다녔기 때문이었다.

여름 휴가 동안 오키프는 Charlottesville의 대학에서 Bement의 조교로 드로잉을 가르쳤고, Bement는 그에게 뉴욕으로 가서 컬럼비아 대학의 예술 학부 학장인 Arthur Wesley Dow와 함께 공부하라고 독려했다. Dow는 회화에 있어 모방과 자연주의적인 유럽 스타일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의 접근법은 보다 실험적이었고 특히 일본 고전 회화를 동경했다. 오키프는 그의 아이디어를 흡수해 자신의 회화에 그것들을 이용했다.

뉴욕에 있는 동안, 오키프는 갤러리 291을 다시 방문해서 Marsden Hartley, John Martin 같은 미국 화가들과 브라크, 피카소를 접했다. 급진적인 정책과 아방가르드 예술이 유행인 시대였다. 미술 애호가이며 작가인 Mabel Dodge가 그린위치 빌리지에서 매주 문화 살롱을 열었다. 그는 후에 뉴멕시코 Taos에 위치한 그녀의 집으로 온갖 종류의 독창적인 예술가들을 데려왔다.

1915년 가을, 오키프는 사우스 캐롤나이나의 컬럼비아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자유로운 시간에는 목탄으로 실험을 하거나 추상적인 형상들을 그리면서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기 위해 애썼다. 이런 초기 작품들은 그의 꿈과 환상을 표현한다. 그는 이 작품들을 컬럼비아 동창이자 좋은 친구인 Anita Pollitzer에게 보냈고, 그녀가 그것들을 스티글리츠에게 보여주었다. 스티글리츠는 그 작품들에 깊은 인상을 받아 나중에 오키프 모르게 자신의 갤러리에 전시했다. 당혹한 오키프는 그에게 전시회를 끝낼 것을 요구했지만 허사였다. 대중은 오키프의 작품에 나타난 솔직한 성징(性徵)에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통해 다른 사람들이 그의 작품에서 본 프로이드적인 상징주의를 부정했다.




 

 

 

 

 

 

 

 

Drawing No.8 (1915)                                                         Early No.5 (1915)

 

1916년 오키프는 텍사스 Canyon에 있는 Texas Teachers College의 초빙에 응했다. 그곳에 있는 동안 목탄을 그만두고 선명한 색채의 유화를 시작했으며 수채화로 실험을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스티글리츠에게 보냈다. 1917년에 목탄화, 유화, 수채화로 이루어진 오키프의 첫번째 단독 전시회가 열렸다.



 

 

 

 

 

 

 

Abstraction Ⅸ (1916)                                                       Special No.15 (1916)

 



 

 

 

 

 

 

 

Nude Series Ⅷ (1917)                                             Nude Series ⅩⅡ (1917)

 

다음해, 오키프는 콜로라도와 뉴멕시코를 처음으로 방문했다. 그는 그곳을 보자마자 마음에 들어했고, 언젠가 돌아오겠다고 결심했다. 그가 뉴욕으로 돌아오자 그와 스티글리츠는 함께 이사를 했고, 연인이 되었다. 오키프보다 상당히 나이가 많은 스티글리츠는 이미 결혼을 했으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오키프는 그 해의 나머지 기간을 뉴욕의 조지 호수가에서 스티글리츠의 가족들과 함께 보내면서, 그림을 그리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쏟았다. 그때부터 거대한 꽃들과 잎, 그리고 큰 나무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Blue and Green Music (1919)                                             Music Pink and Blue Ⅱ (1919)

 



 

 

 

 

 

 

 

Redflower (1919)                                 Red Canna (1920)

 

                                                                                                   To be continued

                          Written by Ardeth Baxter

 

http://mt.essortment.com/artistgeorgiao_rfga.htm   원문

http://www.happyshadows.com/okeeffe/    온라인 갤러리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소굼 2004-09-17 2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한방~

mira95 2004-09-17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걸 해석하셨다구요? 놀라워라~~ 블루님 정체가 뭣이당가요? 오~~ 놀라울 따름...

비로그인 2004-09-17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

2004-09-17 23: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숨은아이 2004-09-1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 고맙습니다.

urblue 2004-09-1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좋아서 한 걸요, 뭘. 고맙기까지야. ^^

panda78 2004-09-18 0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아블루님---- ^ㅂ^ 감사히 읽었습니다. <(_ _)>

에레혼 2004-09-18 06: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아서 하면 이렇게까지 '잘하게' 되는 건가요?
좋은 자료, 천천히 씹어 먹을게요
고마워요, 유어블루님

바람구두 2004-09-18 08: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습니다. 블루..... 추천!!!
 
 전출처 : 간달프 > [박노자] '착한 사람' 예로센코

‘착한 사람’ 예로센코…
[한겨레21]

[한겨레] [박노자의 우리가 몰랐던 동아시아]

천재이자 기인이었으며 아나키스트였던 러시아 태생 맹인 동화작가의 동화같은 일생

▣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 · 한국학

도쿄 국립근대미술관을 방문하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의아함을 가지는 순간이 있다. 방문객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저명한 화가 중 한 명인 나카무라 쓰네(中村 彛·1887~1924)의 1920년 작, <예로센코씨의 초상화>(エロシェンコ氏の像) 때문이다. 깊은 인상을 주는 청결하면서 예민해 보이고 왠지 표정이 어두워도 보이는 한 젊은이의 그림…. ‘예로센코’와 같은 성씨나 외모로 봐서 러시아 계통에 속하는 이 사람은 도대체 누구인가. 일본에서 명작의 주인공이 된 이 ‘맹인 시인’(그림 밑 설명)의 이름을 본국 러시아에서도, 구미 지역에서도 일반인들은 물론 전문가들도 잘 모른다. 과연 한 외국인 맹인이 어떻게 해서 일본사에 그 이름을 남기게 됐는가?

4살 때 성수를 뿌리다 눈을 잃다 일본의 아동 문학, 사회주의 역사, 동아시아 에스페란토 운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남긴 방랑 시인 예로센코(1889~1952)는, 중부 러시아 벨고로드의 오부코브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광적인 종교인이었던 친척들은 홍역을 앓았던 4살의 아이를 데리고 교회에 가서 정교회의 완쾌 기도 형식대로 그 눈에 ‘성수(聖水)’를 무리하게 뿌렸는데 파란 하늘과 지붕 위의 비둘기 보기를 좋아했던 아이는 더 이상 세상의 빛을 못 보게 되고 말았다. 일손이 되지 못해 가정에서 소홀한 대접을 받았던 눈먼 아이는 군대식 규율로 유명했던 모스크바 맹인학교에서 음악 등의 교육을 받았는데 수업 때는 인종주의에 젖은 교사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흑인종이 백인종보다 덜 문명적이라 하신다면 여름철 불볕에 피부가 많이 타서 까맣게 되면 문명인의 자격을 잃게 됩니까?” 재학 시절에는 벌받느라 고생하고 졸업 이후에는 레스토랑에서 바이올린 연주로 생계를 이었는데 그의 비장미 넘치는 음악으로 부르주아적 청중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한 예로센코는, 한 톨스토이주의자로부터 에스페란토라는 새로운 ‘만국의 언어’를 익히고 1912년에 영국 유학 길에 나섰다. 음악 공부보다는 제정 러시아의 군사주의적 억압의 분위기를 벗어나려는 것이 진정한 이유였다. 런던에서 거물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1842~1921)의 제자가 돼 “진화란 상호 경쟁이 아닌 상호 사랑으로 인해서만 진행된다”는 것을 배운 그는 영국 경찰에 의해서 ‘불온 인물’로 분류돼 1914년에 일본으로 가 도쿄 맹(盲)학교의 청강생이 됐다. 세계가 제1차 세계 대전의 살육으로 접어들었던 1914년에 전쟁을 무엇보다 혐오하는 예로센코의 생애의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에스페란토를 공동 언어로, 그리고 무정부주의적 상부상조의 사상을 공동 이념으로 하는 초(超)국가·초(超)인종적 세계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았던 예로센코는, 톨스토이·크로포트킨을 흠모했던 일본의 진보계 인사와 친하게 되었다. 나중에 진보적 연극의 선구자가 된 아키타 우쟈쿠(秋田 雨雀·1883~1962)는 그로부터 러시아어와 에스페란토를 배웠으며, 여성 수필 문학의 개척자 소마 곡고(相馬黑光·1876~1955)는 예로센코를 자신의 집에다 투숙하게 해주고 함께 예술과 정치를 토론했다.

천재적 어학 능력을 보유한 예로센코는, 일본의 사회주의자들과 사귀면서 2년 만에 일본어로 소설과 시를 쓸 정도로 일본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지금도 아동 문학의 고전으로 여기는 <등잔의 이야기>(提?の話)나 <복숭아 색깔의 구름>(桃色の雲) 같은, 깊이와 아동에게 쉬운 아름다운 언어를 겸비한 일본 근대 동화 선집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작품들이었다.

“세계는 가족일 뿐”이라는 것을 굳게 믿어 일본에서 일본인 사회주의자로 살려고 했던 예로센코는, 그 당시에 판쳤던 인종주의는 물론 ‘동양적 가치론’까지 ‘민족’의 허구를 유지시키려는 착취자의 도구로 정확하게 파악했다. 아키타 우쟈쿠의 일기장을 보면, 나중에 일본 사회주의자 사이에서 전설처럼 전해졌던 예로센코와 1916년에 일본을 방문했던 인도의 저명한 시인 라벤드라나트 타고르(1861~1941)와의 공석 논쟁 이야기가 나온다. 타고르가 “동양 정신의 진수인 일본 정신”을 들먹였던 일본 민족주의자들의 사고 구조에 맞는 “물질·합리성 일변도의 서구 기독교적 문명과 정신적 아시아 문명의 차이”를 논하자 듣다 못한 예로센코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물질에 동서의 차이가 어디에 있겠는가? 당신의 이야기는 중점을 다르게 둘 뿐 구조상으로는 서구 인종주의자들의 ‘동양과 서양의 본질적 차이’ 궤변과 동질적이다. ‘서양’과 ‘동양’을 차별화시키는 것은 민족들을 이간질시키려는 지배층의 수법일 뿐, 실제로 노동하는 사람들의 이해 관계는 동서를 막론하고 똑같다”라고 일갈했다.

인도 시인 타고르와 뜨거운 논쟁

그 말에 놀란 타고르가 “당신 도대체 어디 사람이냐?” 따졌고 그는 “원래 러시아에서 왔지만 지금 일본 시인으로 산다”고 대답했다. 타이, 버마, 인도 등지를 돌며 전래 동화를 수집하고 인도에서 영국 경찰들에게 잡히고 일본 감옥의 맛도 본 일이 있었던 예로센코에게는 “어디 사람이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신음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서 그쪽 언어를 단 몇 개월에 익혀 그쪽 사람으로서 함께 글과 말을 통해서 계급 투쟁을 같이 했다. 돈키호테의 정신과 근대적 세계 무정부 혁명가의 의식이 그에게 결합된 것이었다.

그의 소설을 중국어로 옮기기도 한 그의 막역한 친구 루쉰(魯迅·1881~1936)이 이야기했듯, 세계 혁명가인 그에게 일본은 ‘너무나 협소한 공간’이었다. ‘세계를 살인자들의 손에서 탈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 동료들과 함께 사회주의 동맹을 조직한 예로센코는, 데모하다가 경찰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한 뒤에 1921년 6월4일에 일본에서 강제 추방을 당한다. 일제에게 그는 일개의 ‘외국계 불온 분자’였지만, 본국 ‘붉은 러시아’도 괘씸한 아나키스트에게 처음에 입국을 불허했다. 낙심한 그는 상하이에 체류했다가 1922년 2월부터 루쉰의 소개로 베이징대학교에서 에스페란토 교수의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루쉰의 집에서 기거했던 그는 아나키즘을 공부했던 정화암(鄭華巖·1896~1981) 등의 조선 혁명가들과도 교류했으며, 그의 강의에는 수강자가 500명씩이나 몰려와 학생들에게도 흠모의 대상이었다. 그야말로 ‘입신양명’의 경지에 이른 것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안주’란 있을 수 없었다. 1년 뒤 그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귀국 허가를 어렵사리 얻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벼슬’을 헌신짝처럼 버린 그는 물론 공산당 치하의 소련이 폭력 없는 미래 사회가 아니었음을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모스크바의 동방 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일어 통역원이 되었는데, 일본인 학생 사이의 대화 내용을 일러바치라는 소련 비밀 경찰의 요구를 거절하자 해고를 당하고 말았다.


스탈린 독재를 싫어했던 그는 1930년대 중반까지 가능했던 해외 에스페란토 대회에서의 참가차 외유를 이용하여 사실 서구로 얼마든지 망명할 수 있었는데, 그는 소련 체제하에서의 고생의 길을 스스로 택했다. 소련 오지의 소수 민족 맹인 청소년의 교육을 위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오지의 여러 맹인학교 교직에 서고 지금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사용되는 투르크멘어의 점자를 개발하기도 한 예로센코는 결국 빈곤하게 살다가 암에 걸려 고향인 오부코브카에서 생을 마쳤다.

마을에서 ‘착한 사람’으로 통했던 그가 조금씩 죽어가면서도 풀 냄새를 맡는 것을 매일 행복해했다는 이야기를, 후에 연구자들은 지역의 촌로에게 들을 수 있었다. 1950년대 후반 아키타 우자쿠를 비롯한 예로센코의 일본 진보계 친구들이 그가 일본에서는 근대 문학의 고전 작가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소련 당국에 알리고 나서야 이름도 없었던 ‘착한 사람’의 묘에는 묘비가 세워졌다.

고향의 풀 냄새를 사랑했던 세계인 아나키스트 예로센코, 공산당 시절은 물론 군사적인 민족주의가 새로이 ‘지도 이념’으로 등장되는 오늘의 러시아에서도 ‘위험 사상의 보유자’로밖에 안보일 것이다.

장애인에게서 느끼는 세계 혁명가의 정신

지금도 도쿄 미술관에서 그의 초상화 앞에서 러시아인을 위시한 외국인들은 “그가 누구인가”라고 궁금해하며 서로 수군거리기도 한다. 천재이자 기인이었던 동화 작가이자 아나키스트. ‘착한 사람’ 예로센코…. 우리가 그에게서 배울 점은 무엇일까. 시력이 없는 사람도 비장애인과 다를 바 없는 문학적·혁명적 활동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으며 그 사실을 실천적으로 입증한 그의 장애인 차별의 부정·극복의 의식은 선구적이었다. 그리고 후대의 사람들이 그에게 배웠으면 하는 것이, 명예와 안정된 생활을 팽개치고 크로포트킨이 진화의 원천이라 여겼던 인류애의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그의 용기, 그리고 세계 민중을 인종이나 민족별로 나누려 하지 않았던 세계 혁명가의 정신이 아닌가.


댓글(8)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람구두 2004-09-17 1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urblue 2004-09-17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퍼온 글인걸요 뭘.
이 글 읽으면서 예로센코란 사람 궁금해졌는데, 검색창에 두드리니 아무것도 안나오네요, 역시. 혹시 바람구두님이라면 뭘 좀 알아내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두드려요. (아닌가... 아님 말구요. ^^;)

2004-09-17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4-09-17 1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공부방식은 어떤 의미에선 그저 무식하게 파들어가는 방법인데요.
エロシェンコ (1890~1952)        
Василий Эрошенко  
 
   ロシア生まれの盲目の詩人、ワシリー・エロシェンコは、4歳のときに病気で失明、9歳でモスクワの盲学校に入りました。革命前夜の帝政ロシアの社会矛盾と、新時代の到来を求めるエネルギーにあふれたこの時代の雰囲気は、エロシェンコのその後の人格形成に大きな影響を与えたといえます。
   17歳まで盲学校で学んだ後、郷里に戻りましたが、国際語エスペラントの存在を知ってイギリスに渡り、そこでエスペラントを学びます。
   さらに、多くの視覚障害者が三療で自活している日本を「盲人の天国である」と聞いたエロシェンコは、1914年、24歳のとき、日本のエスペランチストを頼って来日。日本語もすぐに上達し、「中村屋サロン」の一員となって、童話作家・秋田雨雀をはじめ、女性解放活動家・神近市子、画家・中村彝、鶴田吾郎らと親交を結びました。
   第1次世界大戦後の社会主義運動の高まりの中で、エスペランチスト・エロシェンコもまた、日本の時代状況と無縁ではあり得ませんでした。1921年、YMCAでの講演、メーデーへの参加などの活動により、再三拘束されたエロシェンコは、ついに日本政府から国外退去命令を受けます。
   日本を離れたエロシェンコは中国に渡り、魯迅の尽力によって北京大学に「世界語」の教授として招かれました。
   1923年以後は革命後のソ連に戻り、盲学校などで教えた後、1952年、故郷・南ロシアのアブホーフカ村で没しました。
 
 
  ●関連ページ●  
  「わたしの学校生活の一ページ」より  
  エスペラント語の一端をエロシェンコの文章で  
 
  ●関連サイト●  
  新宿中村屋 > 中村屋サロン > エロシェンコ  
 
<<2003年12月23日作成>>  
위의 표기가 예로센코의 일본어 표기, 그리고 옆의 것이 키릴 표기입니다. 국내에서는 예로센코에 대한 별다른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기회 닿는대로 한 번 알아보도록 하지요.

바람구두 2004-09-17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의 이름은 바실리였군요. Vasilii Yaroshenko...
이제 그의 영어 표기로 된 이름을 알아냈습니다.
조금씩 노력해보지요. 흐흐.

urblue 2004-09-17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멋진 바람구두님!! 고마워요~

mira95 2004-09-17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잘 읽었습니다...

숨은아이 2004-09-18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갈게요.
 

인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처음으로 갖고 싶었던 인형들. 그치만 가격도 그렇고, 역시 보관의 문제도 그렇고, 사진만 보고 있다.

 

 


 


 


 



댓글(1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하얀마녀 2004-09-16 2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에도 비싸보이는군요.

panda78 2004-09-16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맨 위의 거요. ^^

쎈연필 2004-09-16 22: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눈을 곱게 내려 깔고 있네요...
정면을 응시해도 예쁠텐뎅...

urblue 2004-09-16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니 눈을 치켜 뜬 아이는 없네요.

로드무비 2004-09-16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숨 자고 일어난 거예요?
저는 맨 밑의 짜리몽땅한 애가 좋네요.^^

urblue 2004-09-1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못잤어요. 잠이 잘 안 와서, 어제 번역하던 거 끝내놓고, 아일랜드 보고, 다시 컴 앞에 앉았네요. 이제 씻고 자려구요.

숨은아이 2004-09-1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년대 영화 보면 있죠, 어릴 적 우리집에도 있었던, 꼭 이들 인형 같은 신랑신부 인형이 장식품으로 나와요.

urblue 2004-09-17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 신랑신부 인형이라면 저도 기억나네요. ^^

2004-09-17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mira95 2004-09-17 2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쁘네요.. 그러고 보면 한복도 진짜 화려하고 아름다워요.. 단아하기도 하고.. 저 이거 퍼가요^^

urblue 2004-09-17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라님, 컴퓨터는 이제 제대로 돌아가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