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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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7 매일 시읽기 9일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1
- 권혁웅

느티, 하고 부르면 내 안에 그늘을 드리우는 게 있다
느릿느릿 얼룩이 진다 눈물을 훔치듯
가지는 지상을 슬슬 쓸어담고 있다
이런 건 아니었다, 느티가 흔드는 건 가지일 뿐
제 둥치는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느티는 넓은 잎과 주름 많은 껍질을 가졌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발음하면
내 안의 어린것이 칭얼대며 걸어온다
바닥이 닿지 않는 쌀통이나
부엌 한쪽 벽에 쌓아둔 연탄처럼
느티의 안쪽은 어둡다 하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느티는 밥을 먹지도 않고
온기를 쐬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한번도 동네 노인들과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저 현관 앞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하루 종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얘기도 아니다, 느티는 정자나무지만
할머니처럼 집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으며
우리 집 가계(家系)는 계통수보다 복잡하다
느티 잎들은 지금도 고개를 젓는다
바람 부는 대로, 좌우로, 들썩이며,
부정의 힘으로 나는 왔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안이다
여기에 느티나무 잎 넓은 그늘이 그득하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먼 길이었다.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느티나무 같은 존재들이다. 우람하고 든든하다. 물론 징글징글한 부모 또한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고, 느티나무 같은 부모조차 때로는 뜨아한 면들이 없지 않다. 그것이 어쩌면 시인이 말하는 ˝느티의 안쪽,˝ 어두운 안쪽이지 않을까.

시인이 떠올리는 ‘느티‘는 이중적이다. 가지는 흔들리나 둥치는 굳건하고, 잎은 넓지만 껍질은 주름지고, 바깥쪽은 밝으나 안쪽은 어둡고, 빛을 쓸어담으면서 ˝그늘이 그득하다˝

무릇 존재라는 것이 그러하다. 나이 들면 많은 것들이 명징해져 어린 날과 젊은 날의 혼란과 방황 없이 나무들처럼 푸르게 푸르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드는 나이는 항상 처음이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아무리 먹어도 낯선 얼굴 마주한 듯 서먹하다. 더 황당한 건 부지불식간에 ˝내 안의 어린것이 칭얼대며 걸어˝ 나온다는 것.

나의 어미는 칭얼까지는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어린것이 되어 가고 있다. 나의 느티나무가 빛을 잃고 말라간다. 이제는 내가 빛과 그늘이 되어주어야 할 차례. 이 또한 삶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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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07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의 글과 같이 소개해주신 시를 읽으니 뭉클하네요. 내가 드는 나이는 처음이라 서먹하다는 내용 넘 공감가고 좋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10-07 22:45   좋아요 1 | URL
공감하셨다니. 미니님도 아시는군요. 그 느낌. 어느 시점부터 나이에 적응이 안 되네요. 몸은 분명 나이를 먹는데 맘은 그렇지 않아 여전히 당황스럽습니다^^;;
 
반달 만만한 만화방 1
김소희 지음 / 만만한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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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다. 중딩딸의 소감 첫마디, 엄마 얘기 같았어. 송이는 나였다.슬픈 이야기지만, 슬픔의 정서도 피할 수 없는 감정 아닌가. 슬픔과 아픔도 꾹꾹 눌러 감추지 않고 이렇게 드러내면 힘이 되지 않나. 그럼 유쾌해지지 않나. 열세살 송이가 어리버리 어른이 되었다는 작가 후기에 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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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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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6 매일 시읽기 8일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 권혁웅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 . . . . . . 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화중지병(畫中之餠)이라 할까 지병(持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달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로 끝이 났다 이를 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造花)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가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이 시는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창비)에 실린 첫 번째 시다. 시인의 지난 기억들을 헤집고 있다. 이 시집의 다른 제목을 뽑으라면 기억의 계보학일 것이다. 물론 시인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탈출기"라고 말하지만. 출애굽기라니. ㅋ

누구에게나 도망쳐보지만 되돌아오게 되는 시절이 있다. 누구에게나 하고프지만 못다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 그 시절, 그 이야기를 권혁웅 시인은 '시'라는 장치로 구질구질하지 않고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한 발짝, 아니 두 발짝, 아니 세 발짝 떨어져 나의 역사를, 마치 넘일 얘기하듯 말하는 이런 거리감 마음에 든다. 애틋함이 담담함에 가려져 있다고나 할까.

올초에 구입해 놓고 위의 시만 읽고 다른 책들에 밀려 펼쳐 보지 못한 시집. 이번 주는 권혁웅 시인의 계보학을 따라가볼 생각이다.

"나는 오랫동안 달동네에 살았다. 내게 1980년대의 후반부가 독재와 민주화운동과 시의 시절이었다면, 그 전반부는 원죄의식과 주사와 첫사랑의 시절이었다. 나는 거기 살던 내내 언젠가 탈출기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거기서 벗어난 지 십오년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곳이 나를 벗어나려 한다. . . . . . (중략) . . . 나는 주름ㅡ사람들의 동선이 그어놓은ㅡ을 잔뜩 품은 어떤 장소에 관해서, 겹으로 된 삶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기억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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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시작 창비시선 112
박노해 지음 / 창비 / 199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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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5 매일 시읽기 7일

#바람 잘 날 없어라
- #박노해

바람 잘 날 없어라
내 생의 길에
온 둥치가 흔들리고
뿌리마다 사무치고

아 언제나 그치나
한 고비 넘으면 또 한 고비
너무 힘들다
너무 아프다
이렇게 살아야 하나
이렇게 싸워야 하나

바람 잘 날 없어라
울지 마, 살아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 아픔 속에 외로움 속에
푸르게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이다
​​​

이 시는 박노해 두 번째 시집 <<참된 시작>>에 실려 있다. 박노해는 대학시절 시보다 노래로 먼저 다가온 시인이었다. 노동자 시인. 현장 노동자가 시로 풀어내는 노동 현장과 노동자의 삶은 구름 잡는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손에 잡히는 현실의 풍경이었다. ​

이 시집은 대학 졸업 후 학교 인근 서점에서 알바를 할 때 사장님이 읽어보라며 내민 책이다.

책도 인연도 흐른다. 둘 다 관계를 맺는 것보다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어렵다. 지금까지는 맺는 것보다 이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다른 생각이 든다. 인생의 어느 한때, 나와 관계를 맺은 책과 인연. 그땐 모르고 지냈지만 그들이 삶을 버텨내는 힘으로 작용했다는 것.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다는 것. 그렇기에 다른 형태로 이어진다는 것.

저 시집이 손에 들어온 날. 나는 많이 아프고 많이 외로웠던가 보다. '바람 잘 날 없어라'를 읽고 내가 쓴 글. "가슴을 죄어왔다. 눈물날 만큼이나 공감을 했다고나 할까. 나 또한 너무도 끈질지게 살고픈 사람이다."

30여 년이 흐른 오늘. 나 살아 있음에 박수를 쳐주리. 박노해의 시는 어렵게 읽히지 않아 좋다. 사장님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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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괜찮아 - 엄마를 잃고서야 진짜 엄마가 보였다
김도윤 지음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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팟캣을 통해 알게 된 갈로아. 지독한 곤충광. 어버버 귀염둥이로만 알았는데 이런 사연이 있는 줄 몰랐네요. 목차만으로도 가슴이 저며요. 떠난 보낸 엄마를 이해하고 엄마와 화해하고 엄마를 품에 안고 기억에 담는 모습. 넘 아름다워요. 이미 좋아하고 있었지만 더 좋아질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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