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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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6 매일 시읽기 8일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 권혁웅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 . . . . . . 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화중지병(畫中之餠)이라 할까 지병(持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달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로 끝이 났다 이를 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造花)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가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이 시는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창비)에 실린 첫 번째 시다. 시인의 지난 기억들을 헤집고 있다. 이 시집의 다른 제목을 뽑으라면 기억의 계보학일 것이다. 물론 시인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탈출기"라고 말하지만. 출애굽기라니. ㅋ

누구에게나 도망쳐보지만 되돌아오게 되는 시절이 있다. 누구에게나 하고프지만 못다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 그 시절, 그 이야기를 권혁웅 시인은 '시'라는 장치로 구질구질하지 않고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한 발짝, 아니 두 발짝, 아니 세 발짝 떨어져 나의 역사를, 마치 넘일 얘기하듯 말하는 이런 거리감 마음에 든다. 애틋함이 담담함에 가려져 있다고나 할까.

올초에 구입해 놓고 위의 시만 읽고 다른 책들에 밀려 펼쳐 보지 못한 시집. 이번 주는 권혁웅 시인의 계보학을 따라가볼 생각이다.

"나는 오랫동안 달동네에 살았다. 내게 1980년대의 후반부가 독재와 민주화운동과 시의 시절이었다면, 그 전반부는 원죄의식과 주사와 첫사랑의 시절이었다. 나는 거기 살던 내내 언젠가 탈출기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거기서 벗어난 지 십오년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곳이 나를 벗어나려 한다. . . . . . (중략) . . . 나는 주름ㅡ사람들의 동선이 그어놓은ㅡ을 잔뜩 품은 어떤 장소에 관해서, 겹으로 된 삶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기억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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