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구 현대시세계 시인선 39
박제영 지음 / 북인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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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20201106 매일 시읽기 39일

거시기
- 박제영

거시기한 맛이 업서부러야
긍께 머랄까 맥없시 맴이 짠-해지는, 거시기 말이여
느그 시는 그거시 없당께로
이 고들빼기 맹키로 싸한 구석이나 있으몬 쪼매 봐줄라나
그것도 업잔여
한마디로 맹탕이랑께

워까 가스내 맹키로 삐지기는
다 농잉께 얼굴 피고 술이나 마시뿌자
내 야그가 그로코롬 거시기 하면 서안나가 쓴 동백아가씨란 시가 있어야
낸중에 함 보라고 겁나게 거시기 할 텡께
장사이기가 오늘은 내 서방이여
이 대목에서 워매, 가심이 칵!
환장해분당께

아지매, 무다요 술이 업서야
지금 거시기해부렸응께 싸게 갖구 와야


박제영 시인의 <<식구>>를 3일째 읽다.

저 시의 말투를 빌자면, 워메, 저 구수한 사투리를 어쩔겨, 워메, 저 찰진 생활밀착형 대사를 어쩔겨. 워메, 저 재미난 아저씨아줌니를 어쩔겨.

<<식구>>는 사투리가 범벅된 해학으로 가득하다. 시인의 친구들과 동네 사람들이 등장하는 4부에서 사투리 화법은 절정을 이룬다. 읽다 보면 키득키득 웃음이 난다. 소리 내어 읽으면 흡사 랩을 하는 듯하다. 마음이 울적한 이들에게, 웃음이 필요한 이들에게 <<식구>>를 읽어 보라 권할 생각이다.

박제영 시인에게 ‘시‘란 뜬구름 잡는 글이 아니라 이 식구, 저 식구의 흔한 이야기를 담는 집이다.

˝시다 아직 덜 여문 것은 덜 익은 것은 죄다 시다 그러나 시다 詩다,고 하는 것들은 대개 시가 아니다 덜 영근 것이다 진짜는 시가 그 안에 든 것이라야 한다 詩든 것 그러니까 시는 시든 것이다 노인정 앞 돌계단에 노파 둘이 쭈그리고 앉아 있다 온전히 시든, 시집 두 채가 나란히 햇볕을 쬐고 있다˝(<시집 두 채> 전문)

박제영 시인에게 사람은 ‘숨쉬는 시‘이다. 사람의 말을 빌어 뜨개질하듯 엮어 한 편의 시로 완성한다. 그래서 시들이 친근하고 구수하고 맛깔난다. 그러나 사람 사는 게 어디 흥겹기만 하던가. 때론 시리고 아리다. 그런 저릿한 이야기들도 듬성듬성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식구>>는 전반적으로 마음에 드는데, 아내를 이야기하는 시들에선 손발이 좀 오글거린다. 달달한 표현들은 내 취향이 아닌지라. 내 취향과는 별개로 사람살이에 대한 연민이 짙게 깔린 그의 시들은 뭉클뭉클하다. <<식구>>를 읽고 있으면 시를 쓰는 건, 사람을 사랑하는 일과 멀지 않다는 느낌이 든다. 박제영 시인의 시는 ˝가슴이 칵! / 환장해˝부는 시는 아닐지 몰라도, ˝맹탕˝은 절대 아니고 ˝맥없이 맴이 짠-해지는 거시기˝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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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5  매일 시읽기 38일 

화투 
- 박제영 

점에 백 원짜리 밤새 쳐봐야 따로 잃어도 일이만 원이지만 화투판이란 게 본디 판돈이 십 원이든 백 원이든 감정조절이 그리 녹록한 게 아니어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게 마련이라 어젯밤도 그랬다 ˝아빠 빨리 죽어,˝ 그러니까 여동생이 자기 패가 좋으니까 아빠는 광이나 팔고 한 판 쉬시라고 한 것인데, 아버지 갑자기 화투판을 엎으며 ˝죽으라니, 그게 어디 애비한테 할 소리냐, 못된 년 같으니라고˝ 두어 시간 내내, 선
한 번 못 잡고 잃기만 했으니 속이 상하신 탓일 텐데, 마흔 살 넘은 딸도 울고 일흔 살 넘은 아버지도 울고 그렇게 판이 깨졌던 것인데, 오늘 아침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도 여동생 다시 판을 깔고 앉았더니 ˝어제 그리 난리치고도 또 하투냐˝ 형이 한 마디 던지는 것인데, 아침상 준비하던 두 며느리 그만 웃음보 터뜨리니 둥근 웃음이 방안 가득 번지더라


박제영 시인의 <<식구>>를 이틀째 읽는다. 삼분의 일쯤 읽었는데, 시집 제목처럼 이 시집은 쌀독에 쌀이 그득그득하듯 식구들 얘기로 그득그득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 삼촌, 형제자매 같은 친구, 선배, 후배 등등등.

‘화투‘는 가족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다툼을 익살맞게 잘도 그렸다. 딸이 웃자고 한 소리에 늙은 아비가 죽자고 덤빈다. 아비가 화투판을 엎으며 ˝죽으라니, 그게 어디 애비한테 할 소리냐, 못된 년 같으니라고˝ 하는 대목에서 깔깔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익숙한 풍경인가.

나는 나만의 가정의 만들기 전까진 식구라곤 ‘엄마와 나‘ 달랑 둘 뿐이어서 단란한 가족, 화목한 가정, 그런 분위기를 접하고 살아본 적이 없다. 내 어린 시절의 가정은 늘 ‘쓸쓸함‘으로 남아 있다. 그 쓸쓸함을 달래준 것이 친구와 책(학창시절엔 주로 만화책)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단란과 화목과는 거리가 먼 둘만의 식구 간에도 갈등과 오해와 섭섭함은 어찌나 많은지, ‘화투‘의 일흔 아버지처럼 내 어미가 나를 향해 ˝못된 년 같으니라고˝ 하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고 살았다. 내 어미에게 듣는 망할 욕들조차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리라곤, 예측하지 못했지만.

가족은 울타리이자 등대다. 물론 모든 가족이 든든한 울타리이자 밝은 등대가 되어주진 않는다. 십대 이십대 삼심대 땐 둘밖에 없는 식구인데도, 다정한 말 대신 잔소리만 몰아치는 가족이 참 신물났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몸서리쳐졌다. 가족은 날것의 우리 모습을 여과 없이 내보이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징글징글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도망치려 한다.

가족은 좋든싫든 많은 것을 함께 겪는 관계다. 겪어내는 과정 중에 무수한 희노애락이 교차한다. 어느 날 문득 그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징글징글한 순간들조차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다고. 인생의 어느 순간까지 식구만큼 나의 날들을 공유하는 사이가 없다고. 감정의 교류를 저만치 물리치고 나면, 거기서 오는 섭섭함을 거두고 나면, 가까이든 멀찍이든 내 옆에 존재했던 그 사람만 남는다.

나는 내가 꾸린 가족은 ‘화투‘의 저 표현처럼 종내에는 ˝둥근 웃음˝이 가득 번지는 가족이 되었으면 한다. 허나, 그것조차 욕심일 수 있음을 이제는 받아들이려 하는 중이다. 인생이 어찌 해피엔딩이기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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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1-06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구들이 화투하는 모습이 재미있게 보이네요 명절에 화투하다 싸움난 이야기가 있기도 하던데, 별거 아니어도 하다보면 이기고 싶은 건지도... 전날 싸웠는데 다음날 또 하는군요 그것도 재미있네요 많은 사람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단란한고 화목한 가정은 텔레비전 드라마에나 나오지 않나 싶어요 아주 없지 않겠지만...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0-11-06 23:16   좋아요 0 | URL
ㅋ 무릇 가족이란 가끔 화목단란, 대개 데면데면, 때론(혹은 자주) 지긋지긋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같이 살잖아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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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4 매일 시읽기 37일 

식구 
- 박제영 

사납다 사납다 이런 개 처음 본다는 유기견도 
엄마가 데려다가 사흘 밥을 주면 순하디순한 양이 되었다 

시들시들 죽었다 싶어 내다버린 화초도 
아버지가 가져다가 사흘 물을 주면 활짝 꽃이 피었다 

아무래도 남모르는 비결이 있을 줄 알았는데
비결은 무슨, 짐승이고 식물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면 돼 그러면 다 식구가 되는 겨 


박제영 시인의 <<식구>>(북인)를 오늘부터 읽는다. 이 시집은 북플에 누군가 올린 글을 보고 알게 되었다. 

박제영 시인은 매주 월요일 ‘소통의 월요일 시 편지‘라는 제목으로 시를 배달하는 이메일 우편배달부이다. 그의 이메일 아이디는 소통(sotong@naver.com) 이다. 2020년 11월 2일에 733호 <취매역(박제영)>을 전국 각지(또는 세계 각지?)로 쏘았다. 나는 이 사실을 오늘에야 알았다.

‘식구‘라는 시를 읽으니 2005년에 개봉한 <웰컴투동막골>의 대사가 겹쳐졌다. 동막골의 많은 사람들을 별 잡음 없이 이끌어가는 마을 어르신의 조용한 카리스마가 부럽기도 하고 본받고도 싶었던 인민군 리수화가 은근슬쩍 묻는다.
˝고함 한 번 지르디 않고, 부락민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 . 거, 위대한 영도력의 비결이 뭐요?˝
마을 어른은 표정 변화 하나 없이, 예의 그 담담하고 무심한 톤으로 대답한다. ˝머를 마이 멕이야지 머.˝​

식구(食口)의 사전적 의미는 집에서 함께 살면서 끼니를 같이하는 사람이다. 어릴 때와 젊을 때는 몰랐는데, 나이를 들면 들수록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의 중요성을 알겠다. 식구는 단순히 밥만이 아니라, 밥이 놓인 밥상과 밥상에 앉은 사람들, 그들의 밥상머리 예절까지 내포하고 있는 듯하다.

먹는 것이 곧 그 사람을 이룬다고도 하는데, 주부로 엄마로 살아 보니 식구들 입에 뭘 먹이는 일의 무게가 묵직하다. ˝멀 마이 멕이고,˝ ˝끼니 잘 챙겨 먹이˝는 일이 무겁지 않고 가볍고, 귀찮지 않고 즐겁고, 괴롭지 않고 신 나는 일이면 좋겠는데, 그건 참 안 된다.

슬쩍슬쩍 들춰본 박제영 시인의 시들은 일단 ‘구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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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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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3 매일 시읽기 36일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좋아서, 아쉬워서, 박준의 시를 또 읽는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읽고 나면 '슬픔은'이 '슬픔도'로 자꾸 읽힌다. 더는 자랑할 것이 없어지는 세상에서, 정말 "좋지 않은 세상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고 흘리고 또 흘려도, 그래도 더껑이처럼 남는 슬픔, 그 슬픔은 쉬이 내보이기 힘들다. 많이들 그러거든. 그만큼 울었으면 됐잖아. 그만 슬퍼해도 되잖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사회적 죽음, 사회적 슬픔을 떠올렸다. 2014년 4월 16일. 그 많은 사람들, 특히 학생들이 구조의 손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수장되는 걸 두 눈 뜬 채, 속수무책으로 보면서 나는 한 명의 어른으로서 엄청난 분노와 슬픔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을 보러 갔다. 일일이 새길 수 없는, 너무 많은 얼굴들이 웃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선 소리조차 낼 수 없어 눈으로만 우는 이들이 있었다.

박준 시인은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한겨레21> 통권2호 p67)고 말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수백 명이 부당 정리해고를 당한 것에 항의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을 때, 송경동 시인을 비롯한 젊은 시인들이 '그 사람을 보라'는 주제로 <프레시안>에 시를 연속 기고했다. 그 젊은 시인들의 대열에 박준이 있었고, 그가 쓴 시 제목은 '당신이라는 약'이었다.

박준 시인은 "좋지 않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아득한" 슬픔에 다가가 같이 부대끼고 어우러지고 스며들다, 마지막엔 '시'라는 약을 제조해 그네들을 치료해줄 줄 아는 시인이다. 시인 자신이 아픈 독자에게 '당신이라는 약'이 되어 주는 것이다.

"비 마중 나오듯 / 서리서리 모여드는 /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 좋기도" 한 것은, 저도 모르게 방울방울 맺히는 그 눈물이 나의 슬픔, 너의 슬픔, 우리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유리알이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하는 풍진 세상에서 앙다문 턱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은, '여기, 있는 나'를 바라봐주는 누군가의 촉촉한 눈빛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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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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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2 매일 시읽기 35일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

나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벽제의 긴
언덕을 내려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답 대신 근처 식당가로
차를 돌린 나는 오늘 알았다

기억은 간판들처럼
나를 멀리 데려가는 것이었고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너는 오늘
내가 밀어넣었던

양평해장국 빛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시켜 먹던
할머니보쌈이나 유천칡냉면 같은 색이라서

그걸 색(色)이라고 불러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에

네 짧은 이름처럼
누워 울고 싶은 오늘

달게 자고
일어난 아침
너에게 받은 생일상을 생각한다

이건 미역국이고 이건 건새우볶음
이건 참치계란부침이야

오늘 이 쌀밥은
뼈처럼 희고
김치는 중국산이라

망자의 모발을 마당에 심고
이듬해 봄을 기다린다는
중국의 어느 소수민족을 생각하는 오늘

바람은 바람이어서
조금 애매한

바람이
바람이 될 때까지
불어서 추운

새들이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나는 오늘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계속 읽는다. 이 시집에는 너, 당신, 미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겨레 21> 통권 21호 인터뷰를 읽고 그 이유를 알았다. "시집에 등장하는 미인 중 30% 정도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누나예요. 그리고 10%, 5% 등의 지분으로 다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한겨레 21 통권 21호 p65)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에 등장하는 너는 아무래도 시인의 누나 같다. '화구를 밀어넣'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보통 가족이니까. 피붙이를 떠나 보내도, 그 이별이 아무리 가슴 찢기듯 아파도, 친구의 말마따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울음 대신 해장국을 삼킨다.

기억이 "간판들" 같다며 이어지는 문장 앞에서 숨을 멈췄다. "사람을 / 슬프게 하는 것은 / 통곡이 아니라 / 곡과 곡 사이 /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 숨의 소리였다" ​

이 느낌을 나는 안다. "곡과 곡 사이", 그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위태한 소리를 이어주는 것이 후욱후욱 들이키는 "숨의 소리"다. 사랑하는 이를, 그것도 급작스럽게, 그것도 황망하게, 잃어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문장 앞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어루만지는 듯한 위로도 같이 느끼지 않을까.

박준의 시는 서정적이다. 이리 와봐, 내가 위로해줄게, 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도 당신들의 슬픔을 압니다 라고 느 끼 게 한다. 더 나아가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도 있다"('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며, 그만 좀 슬퍼하라고 말하는 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버린다. 전혀 힘차지 않은 표현인데, 나는 이 시구에서 슬픔의 장례식을 자꾸만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듯한 통쾌함을 느꼈다. 슬픔의 유예기한은 당사자만이 정할 수 있다. 그러지 강요하지 말라.

박준의 시는 느리게 읽힌다. 해장국을 입 안으로 밀어넣듯 시어들을 마음 안으로 밀어넣을 수가 없다. 입 안 가득 물고 있다, 침이 고이려 할 때 오물오물 씹어야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하기사 대개의 시들이 그렇다만.

83년생 박준 시인은 생업으로 6년째 창비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틈틈이 시를 쓴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영감이 떠오를 때면 수첩이나 다이어리, 휴대전화 메모에 옮겨놓는다고. 그런 글들을 다듬고 다듬어 "미학적 도약"을 한 것이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이다. 세 권 모두 경이로운 판매 수치를 보였다고. "무인도에 혼자 남아도 시를 쓸 것 같아요. 좋은 시를 한 편 쓰고 나면 엄청 행복하거든요"(한겨레 21 통권 21p65)라고 말하는 이 젊은 시인이 또 어떤 시들로 독자들의 마음을 적셔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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