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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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3 매일 시읽기 36일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 박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좋아서, 아쉬워서, 박준의 시를 또 읽는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읽고 나면 '슬픔은'이 '슬픔도'로 자꾸 읽힌다. 더는 자랑할 것이 없어지는 세상에서, 정말 "좋지 않은 세상에서" "많은 눈물을" 흘리고 흘리고 또 흘려도, 그래도 더껑이처럼 남는 슬픔, 그 슬픔은 쉬이 내보이기 힘들다. 많이들 그러거든. 그만큼 울었으면 됐잖아. 그만 슬퍼해도 되잖아.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사회적 죽음, 사회적 슬픔을 떠올렸다. 2014년 4월 16일. 그 많은 사람들, 특히 학생들이 구조의 손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수장되는 걸 두 눈 뜬 채, 속수무책으로 보면서 나는 한 명의 어른으로서 엄청난 분노와 슬픔과 죄책감을 느꼈다. 그들을 보러 갔다. 일일이 새길 수 없는, 너무 많은 얼굴들이 웃고 있었다. 다른 한편에선 소리조차 낼 수 없어 눈으로만 우는 이들이 있었다.

박준 시인은 "촌스럽더라도 작고 소외된 것을 이야기하는 시인이 되고 싶다"(<한겨레21> 통권2호 p67)고 말했다. 2011년 한진중공업 노동자 수백 명이 부당 정리해고를 당한 것에 항의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크레인에 올라가 300일 넘게 고공농성을 하고 있을 때, 송경동 시인을 비롯한 젊은 시인들이 '그 사람을 보라'는 주제로 <프레시안>에 시를 연속 기고했다. 그 젊은 시인들의 대열에 박준이 있었고, 그가 쓴 시 제목은 '당신이라는 약'이었다.

박준 시인은 "좋지 않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의 "아득한" 슬픔에 다가가 같이 부대끼고 어우러지고 스며들다, 마지막엔 '시'라는 약을 제조해 그네들을 치료해줄 줄 아는 시인이다. 시인 자신이 아픈 독자에게 '당신이라는 약'이 되어 주는 것이다.

"비 마중 나오듯 / 서리서리 모여드는 /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 좋기도" 한 것은, 저도 모르게 방울방울 맺히는 그 눈물이 나의 슬픔, 너의 슬픔, 우리의 슬픔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유리알이기 때문이다. "이를 악물고" 살아야 하는 풍진 세상에서 앙다문 턱의 긴장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은, '여기, 있는 나'를 바라봐주는 누군가의 촉촉한 눈빛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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