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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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02 매일 시읽기 35일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

나는 오늘 너를
화구에 밀어넣고

벽제의 긴
언덕을 내려와

산 사람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며
말을 건네는 친구에게

답 대신 근처 식당가로
차를 돌린 나는 오늘 알았다

기억은 간판들처럼
나를 멀리 데려가는 것이었고

울음에는
숨이 들어 있었다

사람의 울음을
슬프게 하는 것은
통곡이 아니라

곡과 곡 사이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숨의 소리였다

너는 오늘
내가 밀어넣었던

양평해장국 빛이라서
아니면 우리가 시켜 먹던
할머니보쌈이나 유천칡냉면 같은 색이라서

그걸 색(色)이라고 불러도 될까
망설이는 사이에

네 짧은 이름처럼
누워 울고 싶은 오늘

달게 자고
일어난 아침
너에게 받은 생일상을 생각한다

이건 미역국이고 이건 건새우볶음
이건 참치계란부침이야

오늘 이 쌀밥은
뼈처럼 희고
김치는 중국산이라

망자의 모발을 마당에 심고
이듬해 봄을 기다린다는
중국의 어느 소수민족을 생각하는 오늘

바람은 바람이어서
조금 애매한

바람이
바람이 될 때까지
불어서 추운

새들이
아무 나무에나
집을 지을 것 같지는 않은

나는 오늘


박준의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를 계속 읽는다. 이 시집에는 너, 당신, 미인이 자주 등장하는데, <한겨레 21> 통권 21호 인터뷰를 읽고 그 이유를 알았다. "시집에 등장하는 미인 중 30% 정도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 누나예요. 그리고 10%, 5% 등의 지분으로 다 다른 사람들이 있어요."(한겨레 21 통권 21호 p65)

'오늘의 식단 - 영(暎)에게'에 등장하는 너는 아무래도 시인의 누나 같다. '화구를 밀어넣'을 만큼 가까운 사이는 보통 가족이니까. 피붙이를 떠나 보내도, 그 이별이 아무리 가슴 찢기듯 아파도, 친구의 말마따나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 그렇기에 울음 대신 해장국을 삼킨다.

기억이 "간판들" 같다며 이어지는 문장 앞에서 숨을 멈췄다. "사람을 / 슬프게 하는 것은 / 통곡이 아니라 / 곡과 곡 사이 / 급하게 들이마시며 내는 / 숨의 소리였다" ​

이 느낌을 나는 안다. "곡과 곡 사이", 그 끊어질 듯, 끊어질 듯 위태위태한 소리를 이어주는 것이 후욱후욱 들이키는 "숨의 소리"다. 사랑하는 이를, 그것도 급작스럽게, 그것도 황망하게, 잃어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문장 앞에서 찌르는 듯한 고통과 더불어 어루만지는 듯한 위로도 같이 느끼지 않을까.

박준의 시는 서정적이다. 이리 와봐, 내가 위로해줄게, 라고 대놓고 말하지는 않지만, 나도 당신들의 슬픔을 압니다 라고 느 끼 게 한다. 더 나아가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도 있다"('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며, 그만 좀 슬퍼하라고 말하는 이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버린다. 전혀 힘차지 않은 표현인데, 나는 이 시구에서 슬픔의 장례식을 자꾸만 요구하는 우리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듯한 통쾌함을 느꼈다. 슬픔의 유예기한은 당사자만이 정할 수 있다. 그러지 강요하지 말라.

박준의 시는 느리게 읽힌다. 해장국을 입 안으로 밀어넣듯 시어들을 마음 안으로 밀어넣을 수가 없다. 입 안 가득 물고 있다, 침이 고이려 할 때 오물오물 씹어야 제대로 맛을 음미할 수 있다. 하기사 대개의 시들이 그렇다만.

83년생 박준 시인은 생업으로 6년째 창비에서 편집자로 일하며 틈틈이 시를 쓴다고 한다. 머릿속으로 영감이 떠오를 때면 수첩이나 다이어리, 휴대전화 메모에 옮겨놓는다고. 그런 글들을 다듬고 다듬어 "미학적 도약"을 한 것이 두 권의 시집과 한 권의 산문집이다. 세 권 모두 경이로운 판매 수치를 보였다고. "무인도에 혼자 남아도 시를 쓸 것 같아요. 좋은 시를 한 편 쓰고 나면 엄청 행복하거든요"(한겨레 21 통권 21p65)라고 말하는 이 젊은 시인이 또 어떤 시들로 독자들의 마음을 적셔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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