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05  매일 시읽기 38일 

화투 
- 박제영 

점에 백 원짜리 밤새 쳐봐야 따로 잃어도 일이만 원이지만 화투판이란 게 본디 판돈이 십 원이든 백 원이든 감정조절이 그리 녹록한 게 아니어서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지게 마련이라 어젯밤도 그랬다 ˝아빠 빨리 죽어,˝ 그러니까 여동생이 자기 패가 좋으니까 아빠는 광이나 팔고 한 판 쉬시라고 한 것인데, 아버지 갑자기 화투판을 엎으며 ˝죽으라니, 그게 어디 애비한테 할 소리냐, 못된 년 같으니라고˝ 두어 시간 내내, 선
한 번 못 잡고 잃기만 했으니 속이 상하신 탓일 텐데, 마흔 살 넘은 딸도 울고 일흔 살 넘은 아버지도 울고 그렇게 판이 깨졌던 것인데, 오늘 아침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아버지 어머니 나 그리도 여동생 다시 판을 깔고 앉았더니 ˝어제 그리 난리치고도 또 하투냐˝ 형이 한 마디 던지는 것인데, 아침상 준비하던 두 며느리 그만 웃음보 터뜨리니 둥근 웃음이 방안 가득 번지더라


박제영 시인의 <<식구>>를 이틀째 읽는다. 삼분의 일쯤 읽었는데, 시집 제목처럼 이 시집은 쌀독에 쌀이 그득그득하듯 식구들 얘기로 그득그득하다. 아버지, 어머니, 아내, 딸, 삼촌, 형제자매 같은 친구, 선배, 후배 등등등.

‘화투‘는 가족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다툼을 익살맞게 잘도 그렸다. 딸이 웃자고 한 소리에 늙은 아비가 죽자고 덤빈다. 아비가 화투판을 엎으며 ˝죽으라니, 그게 어디 애비한테 할 소리냐, 못된 년 같으니라고˝ 하는 대목에서 깔깔깔 웃음이 절로 나왔다. 얼마나 익숙한 풍경인가.

나는 나만의 가정의 만들기 전까진 식구라곤 ‘엄마와 나‘ 달랑 둘 뿐이어서 단란한 가족, 화목한 가정, 그런 분위기를 접하고 살아본 적이 없다. 내 어린 시절의 가정은 늘 ‘쓸쓸함‘으로 남아 있다. 그 쓸쓸함을 달래준 것이 친구와 책(학창시절엔 주로 만화책)이었다.

그런데 웃긴 건, 단란과 화목과는 거리가 먼 둘만의 식구 간에도 갈등과 오해와 섭섭함은 어찌나 많은지, ‘화투‘의 일흔 아버지처럼 내 어미가 나를 향해 ˝못된 년 같으니라고˝ 하는 소리를 수도 없이 듣고 살았다. 내 어미에게 듣는 망할 욕들조차 그리워지는 순간이 오리라곤, 예측하지 못했지만.

가족은 울타리이자 등대다. 물론 모든 가족이 든든한 울타리이자 밝은 등대가 되어주진 않는다. 십대 이십대 삼심대 땐 둘밖에 없는 식구인데도, 다정한 말 대신 잔소리만 몰아치는 가족이 참 신물났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폭력이 몸서리쳐졌다. 가족은 날것의 우리 모습을 여과 없이 내보이는 사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징글징글하고, 그래서 어떻게든 도망치려 한다.

가족은 좋든싫든 많은 것을 함께 겪는 관계다. 겪어내는 과정 중에 무수한 희노애락이 교차한다. 어느 날 문득 그런 깨달음이 찾아왔다. 징글징글한 순간들조차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다고. 인생의 어느 순간까지 식구만큼 나의 날들을 공유하는 사이가 없다고. 감정의 교류를 저만치 물리치고 나면, 거기서 오는 섭섭함을 거두고 나면, 가까이든 멀찍이든 내 옆에 존재했던 그 사람만 남는다.

나는 내가 꾸린 가족은 ‘화투‘의 저 표현처럼 종내에는 ˝둥근 웃음˝이 가득 번지는 가족이 되었으면 한다. 허나, 그것조차 욕심일 수 있음을 이제는 받아들이려 하는 중이다. 인생이 어찌 해피엔딩이기만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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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1-06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구들이 화투하는 모습이 재미있게 보이네요 명절에 화투하다 싸움난 이야기가 있기도 하던데, 별거 아니어도 하다보면 이기고 싶은 건지도... 전날 싸웠는데 다음날 또 하는군요 그것도 재미있네요 많은 사람이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단란한고 화목한 가정은 텔레비전 드라마에나 나오지 않나 싶어요 아주 없지 않겠지만...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0-11-06 23:16   좋아요 0 | URL
ㅋ 무릇 가족이란 가끔 화목단란, 대개 데면데면, 때론(혹은 자주) 지긋지긋한 것이 아닐까 싶어요. 그래도 같이 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