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7 매일 시읽기 50일 

무어라 해도 나는 믿노니​
- 앨프리드 테니슨Alfred Tennyson / 피천득 번역 

고귀한 분노를 모르는 포로를 
언제라도 나는 부러워하지 않노라 
조롱에서 태어나 여름숲을 모르는
그런 새를 부러워하지 않노라 

마음대로 잔인한 
짐승들을 부러워하지 않노라 
죄책감을 느낄 줄 모르는 
양심이 없는 

굳은 맹세를 해보지 않은 마음을 
나는 부러워하지 않노라 
잡초 속에 고여 있는 물같이 
부족을 모르는 안일을 나는 부러워 않노라 

무어라 해도 나는 믿노니 
내 슬픔이 가장 클 때 깊이 느끼나니 
사랑을 하고 사람을 잃는 것은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더 낫다고 

이 시는 19세기 영국 시인 앨프리드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중 일부이다. 요즘 읽고 있는 앤서니 스토의 《고독의 위로》(책읽는수요일)에서 이 시집을, 그 중 일부인 위의 시는 어느 블로그에서 발견했다. 피천득 시인이 엮은 《내가 사랑하는 시》(샘터사)에 이 시가 실려 있다.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은 한빛문화에서 2008년 펴낸 번역본이 있다. 100자평, 리뷰, 마이페이퍼 전무하다. 하긴 나도 어제야 알았으니. 이 시집은 테니슨의 절친이던 아서 핼럼의 죽음으로부터 탄생했다. 테니슨은 핼럼을 누구보다 사랑했고 그의 갑작스런 죽음은 그에게 삶의 의미를 앗아갔다. 어찌할 수 없는 상실의 시간을 테니슨은 시를 쓰며 버텼다. 그 세월이 17년이었다.

˝그러나, 갈피 못 잡는 마음과 머리엔 시구가 쓸모 있으니 슬픈 글자를 맞춰 시구나 엮는 것이
몽롱한 마취제처럼 고통을 마비시킨다.˝(《고독의 위로》 203쪽) 

테니슨에게 시를 쓰는 행위는 고통을 잊게 하는 ˝마취제˝이자 ˝치유제˝였다. 《인 메모리엄》을 다 읽을 생각도, 다 읽을 여력도 없지만, 위의 시의 마지막 연에 쓰인 시구만은 기억해 두고 싶다.

˝사랑을 하고 사람을 잃는 것은 / 사랑을 아니한 것보다 더 낫다고˝

나도 같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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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6 매일 시읽기 49일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 황인숙 

보라, 하늘을, 
아무에게도 엿보이지 않고 
아무도 엿보지 않는다.  
새는 코를 막고 솟아오른다. 
얏호, 함성을 지르며 
자유의 섬뜩한 덫을 끌며 
텅 ! 텅 ! 텅! 
시퍼런 용수철을 튕긴다. 


황인숙 시인은 1958년생이다.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문학과지성사)는 1988년에 출간된 시인의 첫 시집이다. 스물 중반부터 서른 즈음까지 쓴 시들로 추정된다. 최근작인 <<못다 한 사랑이 너무 많아서>> (2016)가 마음에 들어 시인의 첫 작품이 궁금해 구매했는데, 오늘 듬성듬성 몇 편을 읽다 난감해졌다. 어 렵 다. 좀 버겁게 어렵다. 힘이 들면 내려놓을 생각이다. 좋자고 읽는데 자꾸 무거워지면 행복한 책읽기가 아니지 않겠는가.

이 시집의 표제작인 <새는 하늘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를 보라. 하늘이 새를 풀어놓지, 새가 어찌 하늘을 풀어놓나? 뻥 뚫린 게 하늘인데, 어쩌자고 ˝엿보이지˝도, ˝엿보지˝도 않는다고 하나? 새들은 어찌 ˝코를 막고˝ 솟아오르나? 자유는 어쩌자고 ˝섬뜩한 덫˝인가? ˝텅 텅 텅˝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용수철이 튕기는 소리인가? 용수철은 하고많은 색 중 왜 시퍼런 색인가?

내가 할 수 있는 해석 하나는, ˝엿보지˝도 ˝엿보이지˝도 않는 하늘이라면, 그 하늘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덫에 걸린 자유. 그래서 새를 풀어 하늘을 엿보이게 하려는 속셈인가?

이런 시는 철학서를 마주한 느낌을 준다. 생각해도 해석 불가. ‘생각을 한다‘에 방점을 찍는다면 시를 읽는 시간이 아깝지만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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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15 매일 시읽기 48일 

속 버무리는 남자 / 속 읽어주는 남자 
- 행복한책읽기 

당신들은 아는지 
빨간 고무장갑 두 손에 꽉 끼고서 
가족이 먹을 일 년 양식을 위해 
온몸을 들썩이며 양손을 빠르게 움직여 
김장 속을 버무리는 당신들의 모습이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당신들은 아는지 
아내들이 바라는 것 중엔 
부귀영화도 분명 있지만 
그보다 더더더더 바라는 건 
아내의 속을 읽어주는 것이란 걸 

당신들은 아는지 
온갖 재료가 뒤섞인 김장 속처럼 
아내들의 속에도 수만 가지 감정이 
어지러이 버무러져 있다는 걸 

그러니 아내의 속은 버무리지 마시길 
김장 속 알뜰히 비벼댄 것처럼 
아내의 속은 살뜰히 고루고루 
보아주고 읽어주시길 

그것이 아내들의 격한 바람이나니 


이것은 2013년에 김장을 끝내고 내가 쓴 글이다. 7년 전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우리 시댁 식구들은 김치에 욕심들이 많아 김장철이면 품앗이처럼 서로 돕는다. 김장 순서가 해마다 우리집이 꼴찌였는데 올해는 어쩐 일로 첫 타자가 되었다. 작년까진 50포기, 올해는 80포기. 후덜덜. 산처럼 높이 쌓인 김치통들을 보며 옆지기는 한없이 뿌듯해했다. 이 모든 걸 내가 했노라 하는 자부심과 더불어.

김치속 버무리기는 힘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여자들이 갓과 무와 실파를 깨끗이 씻어 동당동당 썰거나 채질을 하고, 육수를 내고 찹쌀풀을 개는 동안 구경만 하고 있던 남자들이 동원되는 때가 이때다. 한데 그 많던 고모부들이 올해는 어디를 갔나, 일하러 가고 없어 하나 있는 아들(내 옆지기)과 가장 젊은 막내딸이 속을 버무렸다. 우두두두ㅡ둑! 아이고 허리야. 정말로 허리 휘는 일이다.

아무리 허리가 휘고 삭신이 쑤셔도 속 버무리기가 속 읽어주기보다 어려울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긁적인 글이었는데, 7년이 지난 지금 드는 생각은 저것을 바란 나는 같이 사는 사람의 속을 얼마나 읽어주고 있나 하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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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1-16 0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정말 많이 하시네요!! 수고 많으셨어요. 시도 부럽고 저 많은 김장도 부럽습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0-11-16 10:12   좋아요 1 | URL
그죠. 누가 봐도 부러울 만한 양이에요. 맛도 진짜 좋은데, 맛보여 드릴 수 없어 아쉽네요. 댓글 고마워요~~~^^

라로 2020-11-18 16:33   좋아요 1 | URL
아쉽다고 하시니 더 먹고 싶네요!!! 어제 오늘 샌드위치로 때워서 더 그런가 봐요? 흑
 

20201114 매일 시읽기 47일

김치
- 김기덕

하얀 속살 뽀드득 씻은 알몸의 
여리던 가슴
예리한 칼끝에 쪼개져
쑤셔 박히던 짜디짠 소금물통
간이 배어 적당히 세상맛이 들고
뻣뻣하던 줄기
부들부들 연해지거들랑
고춧가루 푼 비린 젓갈에 묻혀
숨막히는 항아리 속
부글부글 끓어도 함께 끌어안고 
사근사근 익어
한 겹 한 겹 쓰린 살을 비비며
새콤달콤 살다가
군내 나기 전에 
빈 항아리만 남기고는 가는 거라고
사시사철 밥상 위에 올라 
삶의 입맛을 돋군다


오늘은 김장하는 날. 그래서 김장 시들을 찾아보았더니, 놀랍게도 배추 김치, 총각 김치, 알타리, 파김치, 깍두기, 갓김치, 백김치 등등등 김치 관련 시들도 참 많더라.

내년엔 김장 독립에 도전해볼까 한다. 절이는 대신 절인 배추를 사서 김장을 해도 일 년 농사에 비유되는 김장에는 손이 많이, 아주 많이 간다. 힘들었고 후련하고 뿌듯하다.

김기덕 시인은 2000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집 『열매들은 소리 지르지 않는다 1, 2』,『십자가 나무1, 2』, 『사랑한다는 메시지가 낡아 보인다』, 시론집 『주역에서 시를 보다』,『상자 속의 수평선』이 있다. 타로시의 창시자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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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1-15 0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맛있어 보여요!!👍😍
 

20201113 매일 시읽기 46일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 이원하 

점심 먹을 시간이 왔고 
내일모레 그가 와요 

부탁할 건 없고 
내일모레 그가 와요 

실랑이도 함께 와요 

수국의 성대를 잡고 꺾으면 
수국이 울고 
우는 수국으로 
꽃병을 찌르면 그가 좋아해요 

꽃병을 찌르다가 수국 대신 
내가 울고 싶은데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 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내일모레와 동시에 그가 왔고 
준비한 수국을 꺼내려 하는데 
그의 팔꿈치에 이미 수국이 펴 있어요 

그는 살아요 
매년 혼자서 잘 살아요 

수국도 내가 참견 안 했으면 
잘 살았을 거예요 

혼자서 잘 사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내가 울게 되는 지점이에요 

나도 나 없이 살아지죠 
살아지지만 
그럴 경우 

교접하지 못하는 두 개의 안녕 때문에 
발목에 호수가 생기는 게 문제죠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다시 펴들었다. 

이 시인의 시들에선 역설이 많이 보인다. 시집 제목부터 그렇다. 시인은 한겨레 신문과의 당선 인터뷰에서 술이 약하지 않다고 고백했다. 이 시의 제목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마지막 구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의 부드러운 버전 같다. ˝나를 받아줄 품이 내 품˝밖에
없다는 사실은 목 놓아 울어도 시원찮은 일이지, ˝울기에 시시한˝ 일이 아니다.

사랑은, 특히 슬픈 사랑은, 그 중에서도 실연은 시를 낳고, 노래를 짓게 하고, 소설을 탄생시키곤 한다. 이원하 시인의 시작(詩作)도 짝사랑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시는 ˝교접하지 못하는 두 개의 안녕˝을 노래한다. 나는 그에게 내 모든 걸 다 줄 마음이 있지만, 그는 혼자서도 잘 산다. 그의 마음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는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럴 때의 마음이란, 겨울 칼바람보다 더 시린 바람이 속에서 휘몰아치듯 서늘하다. 그래도 살아는 진다. 발목까지 물이 찬 호수를 쇠고랑처럼 차고서 말이다. 얼마나 무거울까.

이원하 시인의 시들은 이십대 청춘의 방황과 고뇌가 잘 묻어 있다. 기형도 시인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처럼 이 시인에게 시는 시인 자신을 받아주는 ‘품‘이다.

정체의 끝을 모르겠고 ˝발전에 끝이˝ 없다고(‘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말하는 이 시인의 발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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