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113 매일 시읽기 46일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 이원하 

점심 먹을 시간이 왔고 
내일모레 그가 와요 

부탁할 건 없고 
내일모레 그가 와요 

실랑이도 함께 와요 

수국의 성대를 잡고 꺾으면 
수국이 울고 
우는 수국으로 
꽃병을 찌르면 그가 좋아해요 

꽃병을 찌르다가 수국 대신 
내가 울고 싶은데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 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내일모레와 동시에 그가 왔고 
준비한 수국을 꺼내려 하는데 
그의 팔꿈치에 이미 수국이 펴 있어요 

그는 살아요 
매년 혼자서 잘 살아요 

수국도 내가 참견 안 했으면 
잘 살았을 거예요 

혼자서 잘 사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것이 
바로 내가 울게 되는 지점이에요 

나도 나 없이 살아지죠 
살아지지만 
그럴 경우 

교접하지 못하는 두 개의 안녕 때문에 
발목에 호수가 생기는 게 문제죠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다시 펴들었다. 

이 시인의 시들에선 역설이 많이 보인다. 시집 제목부터 그렇다. 시인은 한겨레 신문과의 당선 인터뷰에서 술이 약하지 않다고 고백했다. 이 시의 제목은 김소월 시인의 ‘진달래꽃‘ 마지막 구절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의 부드러운 버전 같다. ˝나를 받아줄 품이 내 품˝밖에
없다는 사실은 목 놓아 울어도 시원찮은 일이지, ˝울기에 시시한˝ 일이 아니다.

사랑은, 특히 슬픈 사랑은, 그 중에서도 실연은 시를 낳고, 노래를 짓게 하고, 소설을 탄생시키곤 한다. 이원하 시인의 시작(詩作)도 짝사랑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 시는 ˝교접하지 못하는 두 개의 안녕˝을 노래한다. 나는 그에게 내 모든 걸 다 줄 마음이 있지만, 그는 혼자서도 잘 산다. 그의 마음에 내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그는 곁을 내주지 않는다. 그럴 때의 마음이란, 겨울 칼바람보다 더 시린 바람이 속에서 휘몰아치듯 서늘하다. 그래도 살아는 진다. 발목까지 물이 찬 호수를 쇠고랑처럼 차고서 말이다. 얼마나 무거울까.

이원하 시인의 시들은 이십대 청춘의 방황과 고뇌가 잘 묻어 있다. 기형도 시인의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처럼 이 시인에게 시는 시인 자신을 받아주는 ‘품‘이다.

정체의 끝을 모르겠고 ˝발전에 끝이˝ 없다고(‘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말하는 이 시인의 발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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