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은 잴 수 없는 것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11
에밀리 디킨슨 지음, 강은교 옮김 / 민음사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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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9 매일 시읽기 11일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 에밀리 디킨슨(1830-1886)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ㅡ
그 크기는
그 파멸의 무덤에 들어가서 재는 대로
추측할 뿐 ㅡ

고독의 가장 무서운 경종은
스스로 보고는 ㅡ
스스로 앞에서 멸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 ㅡ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는 동안 ㅡ

공포는 결코 보이지 않은 채 ㅡ
어둠에 싸여 있다 ㅡ
끊어진 의식으로 ㅡ
하여 굳게 잠가진 존재 ㅡ

이야말로 내가 두려워하는 ㅡ 고독 ㅡ
영혼의 창조자
고독의 동굴, 고독의 회랑은
밝고도 ㅡ 캄캄하다 ㅡ

에밀리 디킨슨은 오래 전부터 좋아하는 시인들 중 한 명이었다. 올해 출간된 마리아 포포바의 <<진리의 발견>>에서 에밀리 디킨슨 편을 읽고 더욱 좋아하게 되었다. 디킨슨은 1789편의 시를 남겼다고 한다. 전해진 시만 그렇고 분실된 시들을 고려하면 2000편이 넘을 것이라고 한다.

에밀리 디키슨은 지독한 은둔자였다.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했다.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까지 책상 앞에 앉아 사색에 잠기거나 책을 읽거나 편지를 쓰거나 시를 쓰거나 소책자를 만들었다. 마리아 포포바가 들려주는 디킨슨의 은둔 생활은 가히 놀랍다.

"에머슨이 에버그린즈를 방문했을 무렵부터 디킨슨은 하얀색 옷을 입기 시작했고 자신이 쓴 시를 모아 바느질로 엮어 작은 책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 책자는 디킨슨이 세상을 떠난 후에야 발견된다. 디킨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깥세상과 거의 완전히 차단된 육체의 은둔 생활로 점점 더 깊이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남은 25년 동안 에밀리는 자신의 작은 책상에서 글을 쓰며 거의 침실을 떠나지 않았고, 육체가 없는 존재로 방문객을 맞아들이고, 손님들과는 응접실 문을 사이에 둔 채 대화를 나누었다. 심지어 어머니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 . "(<<진리의 발견>> 508쪽) ​

디킨슨은 바깥세상과의 문을 스스로의 의지로 굳게 닫아 걸었지만, 마음 한 켠에는 소통의 욕구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많은 시를 써서 책자까지 만들었을까. 실제 그녀는 한 시에서 말한다.

"이것은 세계에 보내는 편지야 / 세계는 결코 나에게 편지를 쓰지 않았지만 ㅡ"

이 구절을 읽을 때면 디킨슨이 얼마나 외로웠을지, 얼마나 소통하고 싶었을지 그저 느껴져서 짠해진다. 시인은 독자의 이런 감정에 불편해할지 모르겠다. 아마도 디킨슨은 자기 나름의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러다 더 이상의 노력이 의미 없다는 결론에 이른 게 아니었을까.

디킨슨에게 시는 자기만의 대화법이자 세상과의 소통법이었다. 시라는 갑옷으로 스스로를 무장해 보았지만 갑옷 속 디킨슨은 언제나 쓸쓸하고 고독했다. 그의 고독은 시에서 말하듯 "잴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시가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는 것은 세상 모든 이가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나만의 "잴 수 없는" 고독을 겪고 살기 때문이다. 슬픔처럼 고독 또한 절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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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꽃 (앙리 마티스 에디션)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지음, 앙리 마티스 엮고 그림, 김인환 옮김, 정장진 그 / 문예출판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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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8 매일 시읽기 10일

가을의 노래 Chant d'automne
-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1
머지않아 우린 차디찬 어둠속에 잠기리니,
잘 가거라, 너무 짧았던 우리 여름날의 찬란한 빛이여!
내겐 벌써 들리네, 음산한 충격과 함께
안마당 바닥 위로 떨어지며 울리는 소리가

분노, 미움, 전율, 공포, 그리고 강요된 힘든 노력
이 모든 겨울이 내 존재 안에 들어오려 하네,
그러면 내 심장은 극지의 지옥 속에 뜬 태양처럼
벌겋게 얼어붙은 덩어리에 지나지 않겠지.

난 몸을 부르르 떨며 장작 하나하나 떨어지는 소리를 듣네,
교수대 세우는 소리 그보다 더 육중하게 들리진 않으리라.
내 정신 집요하고 육중한 파성추에
허물어져가는 탑과 같아라.

이 단조로운 충격 소리에 흔들리며
어디선가 누가 관에 서둘러 못질하는 소리 듣는 듯.
누굴 위해서?ㅡ어제만 해도 여름이었는데. 벌써 가을이!
저 신비스런 소리는 어떤 출발신호처럼 울리네.

2
난 사랑해요, 당신의 갸름한 눈에 감도는 초록빛을.
다정한 미녀여, 하지만 오늘은 모든 것이 씁쓰레하네.
그대의 사랑방이나 규방이나 난로 그 무엇도 모두
내겐 바다 위에 빛나는 태양만 못하오.

그래도 날 사랑해주오, 정다운 님이여! 내 엄마 되어주오,
은혜를 모르고 짓궂은 사람이라 해도
애인이거나 누님이거나, 영광스런 가을의
아니면 지는 태양의 순간적 감미로움 되어주오.

덧없는 인생, 무덤이 기다리는구나, 허기져 입 벌린 무덤이!
아! 제발 잠시나마 내 이마 그대 무릎 위에 묻고
작열하던 뜨거운 여름 그리워하면서,
만추의 따사로운 누런 햇빛 맛보게 해주오!

문예출판사에서 2018년에 출간한 보들레르의 <<악의 꽃>> 은 화가 마티스가 <<악의 꽃>> 1판에서 3판까지의 시들 중 직접 엄선해 삽화를 곁들인 것이다. 소장용으로 갖고 있기 좋은 시집이다.

보들레르의 시는 전반적으로 애수가 짙다는 게 내 느낌이다. 어린 시절이 불우하고 불안했다.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재혼. 고등학교 중퇴, 가난한 파리 생활. 1821년에 태어난 보들레르는 오른쪽 반신마비를 앓다 1867년 4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눈을 감았다. 이승을 너무 일찍 떠났다.

마티스는 1869년에 태어나 1954년 89세의 나이에 이승의 끈을 놓았다. 그는 천수를 누렸다.

<가을의 노래> 첫 두 행은 우리 인간의 삶을 압축해 놓은 느낌이다. 느낌표와 더불어 강렬하다. 잘 자거라, 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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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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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7 매일 시읽기 9일

내게는 느티나무가 있다 1
- 권혁웅

느티, 하고 부르면 내 안에 그늘을 드리우는 게 있다
느릿느릿 얼룩이 진다 눈물을 훔치듯
가지는 지상을 슬슬 쓸어담고 있다
이런 건 아니었다, 느티가 흔드는 건 가지일 뿐
제 둥치는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느티는 넓은 잎과 주름 많은 껍질을 가졌다
초근목피​​​​​(草根木皮)를 발음하면
내 안의 어린것이 칭얼대며 걸어온다
바닥이 닿지 않는 쌀통이나
부엌 한쪽 벽에 쌓아둔 연탄처럼
느티의 안쪽은 어둡다 하지만
이런 것도 아니다, 느티는 밥을 먹지도 않고
온기를 쐬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한번도 동네 노인들과 어울리지 않으셨다
그저 현관 앞에 나와 담배를 태우며
하루 종일 앉아 있을 뿐이었다
이런 얘기도 아니다, 느티는 정자나무지만
할머니처럼 집안에 들어와 있지는 않으며
우리 집 가계(家系)는 계통수보다 복잡하다
느티 잎들은 지금도 고개를 젓는다
바람 부는 대로, 좌우로, 들썩이며,
부정의 힘으로 나는 왔다 나는 아니다 나는 안이다
여기에 느티나무 잎 넓은 그늘이 그득하다

엄마를 모시고 병원에 다녀왔다. 먼 길이었다. 모든 부모는 자식들에게 느티나무 같은 존재들이다. 우람하고 든든하다. 물론 징글징글한 부모 또한 세상에는 생각보다 많고, 느티나무 같은 부모조차 때로는 뜨아한 면들이 없지 않다. 그것이 어쩌면 시인이 말하는 ˝느티의 안쪽,˝ 어두운 안쪽이지 않을까.

시인이 떠올리는 ‘느티‘는 이중적이다. 가지는 흔들리나 둥치는 굳건하고, 잎은 넓지만 껍질은 주름지고, 바깥쪽은 밝으나 안쪽은 어둡고, 빛을 쓸어담으면서 ˝그늘이 그득하다˝

무릇 존재라는 것이 그러하다. 나이 들면 많은 것들이 명징해져 어린 날과 젊은 날의 혼란과 방황 없이 나무들처럼 푸르게 푸르게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내가 드는 나이는 항상 처음이라,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고 아무리 먹어도 낯선 얼굴 마주한 듯 서먹하다. 더 황당한 건 부지불식간에 ˝내 안의 어린것이 칭얼대며 걸어˝ 나온다는 것.

나의 어미는 칭얼까지는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어린것이 되어 가고 있다. 나의 느티나무가 빛을 잃고 말라간다. 이제는 내가 빛과 그늘이 되어주어야 할 차례. 이 또한 삶의 이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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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07 18: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의 글과 같이 소개해주신 시를 읽으니 뭉클하네요. 내가 드는 나이는 처음이라 서먹하다는 내용 넘 공감가고 좋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10-07 22:45   좋아요 1 | URL
공감하셨다니. 미니님도 아시는군요. 그 느낌. 어느 시점부터 나이에 적응이 안 되네요. 몸은 분명 나이를 먹는데 맘은 그렇지 않아 여전히 당황스럽습니다^^;;
 
반달 만만한 만화방 1
김소희 지음 / 만만한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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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좋았다. 중딩딸의 소감 첫마디, 엄마 얘기 같았어. 송이는 나였다.슬픈 이야기지만, 슬픔의 정서도 피할 수 없는 감정 아닌가. 슬픔과 아픔도 꾹꾹 눌러 감추지 않고 이렇게 드러내면 힘이 되지 않나. 그럼 유쾌해지지 않나. 열세살 송이가 어리버리 어른이 되었다는 작가 후기에 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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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징가 계보학 창비시선 254
권혁웅 지음 / 창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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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06 매일 시읽기 8일

선데이 서울, 비행접시, 80년대 약전(略傳)
- 권혁웅

나의 1980년은 먼 곳의 이상한 소문과 무더위, 형이 가방 밑창에 숨겨온 선데이 서울과 수시로 출몰하던 비행접시들

술에 취한 아버지는 박철순보다 멋진 커브를 구사했다. 상 위의 김치와 시금치가 접시에 실린 채 머리 위에서 휙휙 날았다

나 또한 접시를 타고 가볍게 담장을 넘고 싶었으나 . . . . . . 먼저 나간 형의 1982년은 뺨 석 대에 끝났다 나는 선데이 서울을 옆에 끼고 골방에서 자는 척했다

1984년의 선데이 서울에는 비키니 미녀가 살았다 화중지병(畫中之餠)이라 할까 지병(持病)이라 할까 가슴에서 천불이 일었다 브로마이드를 펼치면 그녀가 걸어나올 것 같았다

1987년의 서울엔 선데이가 따로 없었다 외계에서 온 돌멩이들이 거리를 달아다녔다 TV에서 민머리만 보아도 경기를 일으키던 시절이었다

잘못한 게 없어서 용서받을 수 없던 때는 그 시절로 끝이 났다 이를 테면 1989년, 떠나간 여자에게 내가 건넨 꽃은 조화(造花)였다 가짜여서 내 사랑은 시들지 않았다

후일담을 덧붙여야겠다 80년대는 박철순과 아버지의 전성기였다 90년대가 시작된 지 얼마 안 되어 선데이 서울이 폐간했고(1991) 아버지가 외계가 날아가셨다(1993) 같은 해에 비행접시가 사라졌고 좀더 있다가 박철순이 은퇴했다(1996) 모두가 전성기는 한참 지났을 때다


이 시는 권혁웅 시인의 <<마징가 계보학>>(창비)에 실린 첫 번째 시다. 시인의 지난 기억들을 헤집고 있다. 이 시집의 다른 제목을 뽑으라면 기억의 계보학일 것이다. 물론 시인은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탈출기"라고 말하지만. 출애굽기라니. ㅋ

누구에게나 도망쳐보지만 되돌아오게 되는 시절이 있다. 누구에게나 하고프지만 못다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 그 시절, 그 이야기를 권혁웅 시인은 '시'라는 장치로 구질구질하지 않고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한 발짝, 아니 두 발짝, 아니 세 발짝 떨어져 나의 역사를, 마치 넘일 얘기하듯 말하는 이런 거리감 마음에 든다. 애틋함이 담담함에 가려져 있다고나 할까.

올초에 구입해 놓고 위의 시만 읽고 다른 책들에 밀려 펼쳐 보지 못한 시집. 이번 주는 권혁웅 시인의 계보학을 따라가볼 생각이다.

"나는 오랫동안 달동네에 살았다. 내게 1980년대의 후반부가 독재와 민주화운동과 시의 시절이었다면, 그 전반부는 원죄의식과 주사와 첫사랑의 시절이었다. 나는 거기 살던 내내 언젠가 탈출기를 완성하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 거기서 벗어난 지 십오년이 되었는데 이제는 그곳이 나를 벗어나려 한다. . . . . . (중략) . . . 나는 주름ㅡ사람들의 동선이 그어놓은ㅡ을 잔뜩 품은 어떤 장소에 관해서, 겹으로 된 삶에 관해서 말하고 싶었다. 내가 기억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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