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10 매일 시읽기 73일 

늙은 사내의 시 
- 미당 서정주 

내 나이 80이 넘었으니 
시를 못 쓰는 날은 
늙은 내 할망구의 손톱이나 깎아주자. 
발톱도 또 이쁘게 깎아주자. 
훈장 여편네로 고생살이 하기에 
거칠대로 거칠어진 아내 손발의 
손톱 발톱이나 이뿌게 깎어주자. 
내 시에 나오는 초등달같이 
아내 손톱 밑에 아직도 떠오르는
초사흘 달 바래보며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  


서정주 시인의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계속 읽는다. 80이 넘은 시인은 제목처럼 정말 소년으로 돌아간 듯하다. 삼분의 일 정도 읽었는데, 시들이 대체로 유쾌하고 구수하다. 옛말들은 정겹고 한자어들은 낯설다. 소년으로 돌아간 시인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 추억들은 훈훈해서 이따금 부럽기까지 하다. 시간이 훌쩍 지나 돌아보는 지난 날들은 미화가 되어 그럴까. 여든을 훌쩍 넘어 이제 아흔을 바라보는, 치매 걸려 현재를 모조리 까먹는 내 어미에게도 초등학교 시절만큼은 아름답게 기억된다. 그런 행복한 기억이 내 어미의 뇌에 아직 자리해 있어 나는 참 다행이라 생각한다. 언젠가는 지워질지언정.

서정주 시인은 금실 좋은 부부로 해로를 했던가 보다. <늙은 사내의 시>를 읽으면서, 시인님 시를 못 쓸 정도라면 손톱 발톱 깎을 힘은 더 없지 않을까요, 라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찾아 보니, 시인은 치매 든 아내의 손톱 발톱을 10년 넘게 깎아 주었다고 한다. 아내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후엔 79일간 곡기를 끊고 맥주로 연명하다 세상을 뜨셨다고. 이 사연을 접하고 시를 다시 읽으니, 마지막 두 행의
˝마음 달래자 / 마음 달래자, 마음 달래자˝가 사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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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혼란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차은정 옮김 / 민음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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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한 편 중 네 편을 읽었다. 낄낄대다(도덕적혼란) 훌쩍대다(실험실의소년들). 애트우드 언니. 글을 이렇게 잘 썼던 거였어? 왜 이제야 읽냐고. 애잔한 이야기를 거리 두기 화법으로, 시적으로 그려낸다. 연작 단편이라니. 이제부턴 순서대로 읽겠음. 좋으다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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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12-10 14: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행복한책읽기 님과 함께 미션에 참여하고 싶어요!! 애트우드 순사대로 읽기 미션. 👍

행복한책읽기 2020-12-10 21:32   좋아요 0 | URL
좋아요 좋아요. 완전 환영이요^^
 

20201209 매일 시읽기 72일 

나는 아침마다 이 세계의 산(山)1628개의 이름들을 불러서 왼다. 
- 서정주 

나는 
날이날마다 아침이면 
이 세계의 산(山) 1628개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서 왼다. 
이것은 늙어가는 내 기억력의 침체를 막기 위해서지만, 
다 불러서 외고 나면
<킬리만자로> 산(山) 밑의 사자떼들, 
미국 서부산맥의 깜정 호랑이떼들, 
<히말라야> 산맥의 흰 표범의 무리들도
내게 웃으며 달려와서 아양을 떨고, 
또 저 <트리니다드>의 하늘의 홍학(紅鶴)의 무리들도
수만마리씩
그들의 수풀에 자욱히 날아앉어
꽃밭이 되며 꽃밭이 되며
나를 찬양한다.
해와 달도 반갑게는 더 밝어지고
이래서 나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를 구매했다. 이 시집은 안도현 시인의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에서 알게 되었다. 시인이 <<늙은 떠돌이의 시>>(1993)이후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쓴 시들을 간추려 펴낸 시집이다. 이 늙은 나이에도 시집을
내는 것이 민망했던지, 시인은 시를 쓰는 자신을 ˝늙은 숫소 한 마리가 . . . 먹은 풀들을 거듭거듭 되뱉어내 되새김질 하고 있는 꼬락서니˝라 묘사한다.

˝이 책의 제목을 <80소년 떠돌이의 시>라고 한 까닭은 내 나이가 올해 83세인데다가, 아직도 철이 덜든 소년 그대로고, 또 도(道)도 모자라는 떠돌이 상태임을 두루 요량해서 그렇게 했다.˝(시인의 말 중)

나이 들면 철이 든다는 것, 지금은 이 말을 전부 신뢰하진 않는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반백 년을 살고 보니 철이 좀 든 사람 같다가도 여전히 철들지 않는, 혹은 철들지 못하는, 그것도 영영 철들지 못하는 ‘나‘란 사람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 서정주 시인도 바로 그 점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기억력 침체를 막기 위해 아침마다 1638개의 산 이름을 외운다는 시인의 처지가 아주 먼 일 같지 않아서, 마흔일곱 편의 시들 중 이 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내가 이 시집을 구매한 것은 이분의 친일 이력을 떠나 이만큼 산 사람은 무엇에 기대 삶을 영위하는지 궁금해서이다. 늙은 시인의 눈엔 사람과 자연이 자리해 있다. 1638개의 산 이름을 외고 났더니, 온갖 짐승들이 웃으면서 달려오고 홍학이 날아들고 해도 달도 반가이 인사를 하더랜다. 그들과 더불어 시인 자신도 다시 살아났다고. 아. 나는 저 나이가 아직 한참남았는데 (과연 그럴까), 늙었음을 호쾌하게(?) 인정하는 시인의 기분을 왜 알 것만 같을까.

반백 년을 살았는데, 손에 쥐는 게 없는 삶을 산 듯한 헛헛함이 어느 날 덜커덩 찾아들었다. 한 번 찾아든 이 느낌은 무시로 찾아온다. 무시로 와서 때론 무섭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아, 이 헛헛함은 절대 사라지지 않겠구나. 나 죽는 날까지 같이 가겠구나. 나도 80세
되면(그때까지 살려나?) 시인처럼 1638개의 산 이름을 외우리(살았으나 그런 기력이 있으려나?). 그러면 허파로 드나드는 바람 한 점 잡을 수 있겠지.

서정주 시인은 1915년 일제강점기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2000년 12월 24일에 이승의 무게를 내려놓았다. <<80소년 떠돌이의 시>> 를 출간하고 3년 후인 86세의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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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창비시선 44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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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8 매일 시읽기 71일 

식물도감 
- 안도현 

*
사무치자 
막막하게 사무치자 

매화꽃 피는 것처럼 내리는 눈같이(첫 연)
​ 

이름에 매달릴 거 없다 
알아도 꽃이고 몰라도 꽃이다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마지막 연) 

안도현 시인의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에서 제3부 작약작약 비를 맞네 <식물도감>편을 읽었다. 

시집을 내지 않은 8년 동안 시인은 ˝돌을 주워 상자에 담는 일과 풀을 뽑아 거머쥐는 일과 새소리를 듣고 담아두는 일에˝(시인의 말 중) 매진했던 모양이다. <식물도감>에는 얼마나 많은 식물과 꽃이 등장하는지, 보았으나 모르겠고 읽었으나 모르겠고 들었으나 모르겠는 생명들로 넘쳐난다.

식물에는 자기만의 시계가 장착돼 있어 피고 지는 시기를 어김없이 알아 피고 지고 피고 지고를 거듭한다. 그들의 시계에 사람은 생활을 맞춘다. 가령 이 시집의 제목에 등장하는 능소화는 여름에 피는 꽃이다. 능소화가 피는 무렵엔 악기를 창가에 걸어두면 되나 보다. 왜인지는 나도 모른다. 매화는 추운 겨울과 따신 봄 사이에 핀다. 송홧가루는 ˝봄을 떼메고˝ 간다. 봄이 둥실둥실. ˝연두가 연두일 때˝ ˝모화꽃이 핀다.˝
˝오동꽃˝ 피면 ˝5월이 간다.˝

6월에 제주 가면 ˝멀구슬나무 꽃˝을 보라 한다. 꽃의 생김을 모르니, 보아도 필시 본 줄 모를 것이다. 갯멧꽃은 바닷가에 산다. 참새떼는 찔레 덤불을 좋아한다. 채송화밭에선 나비들이 ˝점방˝을 차린다. 봉숭아 꽃씨는 ˝꽃의 화력발전소˝란다. 오메, 꽃이 얼마나 흐드러지게 피면 이런 표현을 쓸까나.

˝마타리꽃 피었다 / 곧 개강이다 / 나는 망했다.˝ 푸하하. 꽃들의 시계에 맞춰 이런 유머를 구사할 줄 아는 시인, 왜케 귀여우신가. 참새떼는 강아지풀 씨앗을 우루루 삼킨다. 바랭이풀은 버티고 버티다 ˝서리 내리자˝ 풀썩 ˝무릎 끓었다˝고. 눈 내리기 시작하면 억새들은 고개
돌려 눈을 바라본다. 복수초는 봄철 눈이 녹기 전 설산에서 꽃을 피운다.

이 많은 식물을 내가 어찌 알랴. 설령 공부한들 오래 기억할 리 만무하리. 식물에 관심이 있긴 하나 지그시 바라볼 여유 없는 독자를 왜 이리 괴롭히시나, 하며 시인을 원망하려는데, 마지막 연에서 활짝 웃었다. 알아도 몰라도 꽃은 꽃이다. 그냥 예뻐하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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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0-12-11 0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식물도감을 보면 정말 많은 식물을 만날 수 있겠습니다 꽃 하면 봄이 먼저 떠오르지만 여름 가을 겨울에도 피는 꽃이 있지요 꽃 이름 몰라도 된다니 다행이네요


희선
 

20201207 매일 시읽기 70일 

그릇 
- 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안도현 시인의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를 짬을 내 두어 편 읽었다.

<그릇>은 구도자의 길을 노래한 시 같다. 61년생 안도현 시인은 올해로 예순이다. 반백년에서도 십 년을 더 산 사람이 ˝자잘한 빗금˝이 수없이 나 있는 그릇을 보며 나의 ˝허물˝을 읽는다. 금 투성이 주제에 멀쩡한 백자 흉내를 내고 살았느냐며 조용히 스스로를 훈계한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 나라는 그릇˝임을 볼 줄 아는 자는 이미 도통해 있다. 시인의 그릇은 허물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작아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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