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209 매일 시읽기 72일 

나는 아침마다 이 세계의 산(山)1628개의 이름들을 불러서 왼다. 
- 서정주 

나는 
날이날마다 아침이면 
이 세계의 산(山) 1628개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러서 왼다. 
이것은 늙어가는 내 기억력의 침체를 막기 위해서지만, 
다 불러서 외고 나면
<킬리만자로> 산(山) 밑의 사자떼들, 
미국 서부산맥의 깜정 호랑이떼들, 
<히말라야> 산맥의 흰 표범의 무리들도
내게 웃으며 달려와서 아양을 떨고, 
또 저 <트리니다드>의 하늘의 홍학(紅鶴)의 무리들도
수만마리씩
그들의 수풀에 자욱히 날아앉어
꽃밭이 되며 꽃밭이 되며
나를 찬양한다.
해와 달도 반갑게는 더 밝어지고
이래서 나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서정주 시인의 <<80소년 떠돌이의 시>>(1997)를 구매했다. 이 시집은 안도현 시인의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에서 알게 되었다. 시인이 <<늙은 떠돌이의 시>>(1993)이후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쓴 시들을 간추려 펴낸 시집이다. 이 늙은 나이에도 시집을
내는 것이 민망했던지, 시인은 시를 쓰는 자신을 ˝늙은 숫소 한 마리가 . . . 먹은 풀들을 거듭거듭 되뱉어내 되새김질 하고 있는 꼬락서니˝라 묘사한다.

˝이 책의 제목을 <80소년 떠돌이의 시>라고 한 까닭은 내 나이가 올해 83세인데다가, 아직도 철이 덜든 소년 그대로고, 또 도(道)도 모자라는 떠돌이 상태임을 두루 요량해서 그렇게 했다.˝(시인의 말 중)

나이 들면 철이 든다는 것, 지금은 이 말을 전부 신뢰하진 않는다.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다. 그러나 반백 년을 살고 보니 철이 좀 든 사람 같다가도 여전히 철들지 않는, 혹은 철들지 못하는, 그것도 영영 철들지 못하는 ‘나‘란 사람이 존재한다는 느낌이 든다. 서정주 시인도 바로 그 점을 느낀 것이 아니었을까.

기억력 침체를 막기 위해 아침마다 1638개의 산 이름을 외운다는 시인의 처지가 아주 먼 일 같지 않아서, 마흔일곱 편의 시들 중 이 시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내가 이 시집을 구매한 것은 이분의 친일 이력을 떠나 이만큼 산 사람은 무엇에 기대 삶을 영위하는지 궁금해서이다. 늙은 시인의 눈엔 사람과 자연이 자리해 있다. 1638개의 산 이름을 외고 났더니, 온갖 짐승들이 웃으면서 달려오고 홍학이 날아들고 해도 달도 반가이 인사를 하더랜다. 그들과 더불어 시인 자신도 다시 살아났다고. 아. 나는 저 나이가 아직 한참남았는데 (과연 그럴까), 늙었음을 호쾌하게(?) 인정하는 시인의 기분을 왜 알 것만 같을까.

반백 년을 살았는데, 손에 쥐는 게 없는 삶을 산 듯한 헛헛함이 어느 날 덜커덩 찾아들었다. 한 번 찾아든 이 느낌은 무시로 찾아온다. 무시로 와서 때론 무섭다. 그러다 알게 되었다. 아, 이 헛헛함은 절대 사라지지 않겠구나. 나 죽는 날까지 같이 가겠구나. 나도 80세
되면(그때까지 살려나?) 시인처럼 1638개의 산 이름을 외우리(살았으나 그런 기력이 있으려나?). 그러면 허파로 드나드는 바람 한 점 잡을 수 있겠지.

서정주 시인은 1915년 일제강점기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2000년 12월 24일에 이승의 무게를 내려놓았다. <<80소년 떠돌이의 시>> 를 출간하고 3년 후인 86세의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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