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가는 마을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3
이바라기 노리코 지음, 정수윤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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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04 #시라는별 85

벚꽃
- 이바라기 노리코

올해도 살아서
벚꽃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은 한평생
몇 번이나 벚꽃을 볼까요
철들 무렵이 열 살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많아도 칠십 번은 볼까
서른 번 마흔 번 보는 사람도 많겠지
너무 적네
그것보단 훨씬 더 많이 본다는 기분이 드는 건
선조의 시각도 섞여들고 더해지며
꽃 안개가 끼기 때문이겠죠
곱기도 요상하기도 선뜩하기도
종잡을 수 없는 꽃의 빛깔
꽃보라 사이를 휘청휘청 걷노라면
어느 한순간
더 많은 승려처럼 깨닫게 됩니다
죽음이야말로 자연스런 상태
삶은 사랑스런 신기루임을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시집을 작년부터 한 권씩 한 권씩 사서 읽어보고 있다. 이 세계시인선은 기획자의 발굴의 눈이 돋보인다. 듣도 보도 못한 못한 시인들이 대부분인데, 시집을 열면 어떻게 이런 시인을 전혀 몰랐을까, 어떻게 이런 시들을 이제야 읽게 되었을까 통탄하게 된다.

『처음 가는 마을』​ 은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세 번째 시집이다. 지은이 이바라기 노리코는 우리에겐 일제 강점기였던 1926년 태어나 2006년 세상을 떠났다. ˝사랑스런 신기루˝ 같은 이승의 삶을 80년 살아냈고, ˝철들 무렵˝부터 ˝곱기도 요상하기도 선뜩하기도˝ 한 벚꽃들을 ˝칠십 번˝을 본 후 눈을 감았다. 반백 년을 살고 나면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이 ˝꽃보라 사이를˝를 걷다 얻은 저 깨달음, ,

[죽음이야말로 자연스런 상태
삶은 사랑스런 신기루임을]

이라는 진실을 온몸으로, 부르르, 느끼게 된다. 곱고 또 곱되 ˝선뜩하기도˝ 한 벚꽃 빛깔처럼 서늘한 진실이다. 올해는 날이 푹해 벚꽃이 일찍도 개화했다. 그 덕에 산수유,진달래, 매화꽃, 목련, 개나리, 벚꽃 등등의 온갖 꽃을 한 시기에 같이 보게 되는 호사를 누린다. 살아 봄꽃 잔치에 발을 디딜 수 있어 감사하다. 아직 ˝꽃보라 사이를˝ 허리 꼿꼿이 펴고 걸어다닐 수 있어 감사하다.

『처음 가는 마을』​ 에는 <벚꽃>보다 울림이 큰 시들이 많지만, 지금은 꽃들이 만개하는 4월이라, 그중 벚꽃이 유독 팝콘 터지듯 톡톡톡 꽃망울을 터뜨려 세상을 눈 온 것마냥 하얗게 물들이고 있어 이 시를 골랐다. 이바라기 노리코 시인은 좋은 시인이다. 윤동주 시인의 향기가 난다. 일본이 저지른 만행에 고개 숙이는 것을 넘어 고통 받은 이들을 대신해 그 잔혹함을 고발하고 그들을 위로할 줄 아는 시인이다. 이제라도 이바라기 노리코를 알게 돼 감사하다.

[그녀의 시에는, 명징한 주제를 되도록 쉽고 간결하게 표현하여 인간의 본질 근처를 단번에 찌르는 단호함이 있었다. 단순한 언어에 깊은 뜻을 담는 일, 어렵지 않은 시어로 강력한 의지를 드러내는 일, 그리하여 세상을 조금이라도 나은 쪽으로 가게 하는 일, 이것이 이바라기 노리코가 시인으로 살면서 숨을 거두는 그날까지 쉬지 않고 해온 작업이다.] (정수윤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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