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29 #시라는별 64
고사목
- 이산하
바로 저기가 정상인데
그만 주저앉고 싶을 때
저기 고사목 지대가 있다.
무성했던 가지들과
푸른 잎들 떠나보내고
제 몸마저 빠져나가버린
오직 혼으로만 서 있는
한라산의 고사목들 . . . . . .
천둥 같은 그리움인 듯
폭설 같은 슬픔인 듯
죽어서도 썩지 않는다.
이산하 시인의 『존재의 놀이』 를 느리게, 정말로 느리게 읽고 있다. 시인의 최신작인 『악의 평범성』 이 너무 좋아 내쳐 『한라산』 을 읽었고, 이어서 시인의 첫 시집인 이 책까지 구매해 버렸다. 아무래도 이산하의 책들은 모조리 찾아 읽지 싶다. 다음은 1999년도판 <시인의 말>의 일부다.
‘첫 시집‘인 듯하다.
1부는 내가 잔잔했던 최근(1998년 봄~1999년 봄)의 작품들이고
2부는 내가 출렁거렸던 약 20년 전(1977년봄~1985년 봄)에 쓴 것들이다.
그 ‘잔잔함‘과 그 ‘출렁거림‘ 사이가 멀리서 들려오는 천둥소리처럼
너무 아득하다.
벌써 가슴이 뜨거워져온다.
문학동네가 1996년 절판되어 명성으로만 남아 있는 옛 시집 복간 기획으로 시작한 ‘포에지 2000‘ 시리즈를 재개했다. 『존재의 놀이』 도 이 기획으로 되살아났다. 개정판 <시인의 말>에서 이산하 시인이 기뻐하는 목소리를 냈다.
편집자와의 착오로
바뀐 시집 제목을
22년 만에
바로 잡아 다행이다.
1999년도판 시집 제목은 『천둥 같은 그리움으로』 였다. 이 제목은 아마 초판본 <시인의 말>과 제주도 한라산의 고사목들을 노래한 <고사목>에서 따온 듯하다.
나는 한라산 대신 17년만에 지리산 천왕봉을 밟았다. 설악산 만경대가 오랜 시간 내 속에 불씨로 남아 있던 등반 열정에 불을 지펴 기어이 설악 대청봉을 찍고 끝내 지리산 천왕봉까지 오르게 만들었다.
지리산 고사목은 17년 전 등린이였던 나를 사로잡았던 나무였다. 고사목은 해발 1600고지쯤 이르러야 만날 수 있다. 다리는 후들거리고 심장은 쿵쾅거리고 숨은 턱까지 차 올라, 시인의 말대로 그만 딱 주저앉고만 싶을 때 두 눈 번쩍 뜨이게 하는 존재가 바로 고사목들이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산다는 주목나무를 처음 맞닥뜨렸을 때의 감동. 너희들은 대체 무슨 힘이 남아, 아니 무슨 한이 남아 죽어서도 산다니, 그것도 천 년씩이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무성했던˝ ˝푸른 잎들 떠나보내고˝ 가느다랗고 허연 몸뚱이로 그 바람 부는 높은 곳에 버티고 선 자태가 무척이나 경이로웠다.
지리산 제석봉(1800고지) 고사목 군락지에는 슬픈 내력이 있다. 한때 울창한 숲을 이루었던 이곳은 도벌꾼들이 도벌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불을 지르는 바람에 지금과 같은 나무들의 공동묘지가 되었다. 묘지는 언제나 삶과 죽음을 성찰하게 만든다. ˝제 몸마저˝ 빼놓고 ˝오직 혼으로만 서 있는˝ 나무들. ˝죽어서도 썩지 않는 나무들˝. 그 까닭은 살았을 적 푸른 가지들의 길이만큼 뿌리가 땅 속 깊이 깊이 박히기 때문이라고, 같이 산행을 한 숲 해설가가 설명해 주었다. 그런 거였구나, 그래서 산 시간만큼 죽어서도 사는 거였구나.
17년만에 찾은 제석봉에는 고사목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죽음 속 삶이 버거웠던지, ˝혼으로만 서˝ 있기 힘겨웠던지, 많이들 자취를 감췄다. 그래, 그네들에게도 온전한 쉼이 허락되어야 한다.
나는 다시 찾은 설악과 지리에서 내 생의 숨구멍을 찾았다.
20211023 지리 산행
산행구간: 백무동 ~ 장터목 ~ 천왕봉(1915m) ~ 장터목 ~ 세석 ~ 한신계곡 ~ 백무동
산행거리: 약 25km(후덜덜)
산행시간: 14시간 30분(04시 출발 18시 30분 종료. 뜨아아~~~)
산행걸음: 약 4만 7천보(신기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