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부자가 되고 싶다면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 줌의 지식으로 수천만이 부딪치는 곳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다. 사회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그곳에서 성공하려면 수천만의 생명을 상대로 어르고 달래는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달라져야 한다.
인생은 통찰과 미시적인 부분의 대립
‘꽃을 본다’. 이 말에서 당신과 내가 소통하는 꽃이란 같은 꽃이지만 다른 꽃이다. 우선 ‘꽃’이라는 말에 당신이 무의식적으로 떠올린 이미지는 꽃이 아니라 ‘말’이었다. 당신이 생각한 이미지의 꽃을 만나려면 이 말 다음에 실제 꽃의 모양을 하나하나 그려봐야 한다. 그 다음에야 당신이 ‘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어떤 꽃을 떠올렸는지 스스로 알게 된다.
이것이 대개 우리가 사물을 인식하는 수준이다. 당신이 아직 어스름한 새벽에 숲길을 가다가 새끼줄을 보았다. 이때 당신이 새끼줄을 보고 뱀으로 착각해서 움찔하고 놀랐다면 그것은 당신이 받아들이는 오감의 매너리즘 때문이다. 그러나 당신은 순간 물러서서 그것을 자세히 살핀 다음 뱀이라기엔 질감이 딱딱하고, 움직임이 없고, 뱀보다 훨씬 길다는 것을 알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이때 뱀을 보고 놀라는 당신의 마음은 ‘숲길에는 뱀이 있을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이 두려움은 때로는 당신을 보호하지만 때로는 당신에게 숲을 즐길 수 없도록 만드는 마음의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는 통찰적인 부분과 미시적인 부분의 대립 속에 살아간다. 당신은 숲길에서 뱀을 밟을까 두려워 땅만 보고 걸어갈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 숲을 지난 다음에도 숲에서 들리던 아름다운 새소리와 들꽃의 아름다움, 하늘을 향해 뻗은 나무들의 군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당신이 숲을 느끼고 오래된 나무등걸에 자란 작은 들풀에 취한다면 언젠가는 뱀에게 발을 물릴 수도 있다.
그래서 통찰은 간과를 필요로 한다. 이번에는
김춘수 시인의 ‘꽃’을 감상해보자. 이 시에 등장하는 꽃은 대상이다. 그리고 그것을 불러주는 ‘나’는 그것을 인식하는 주체다. 지금 이 순간 설악산 계곡의 어느 골짜기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 한 떨기는 스스로 피어 있지만 없는 것이다. 그 꽃은 누군가의 눈에 띄어 ‘꽃’이라는 인식이 덧씌워지지 않는 한 그것은 꽃이 아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가 그렇다. 인간이 인식하는 세계는 지극히 작고 편협하다. 전 우주를 생각하고 흘러간 억겁의 세월을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한 점의 먼지에도 미치지 못한다. 지금 우리가 모르는 시간의 저편 공간 너머에는 무엇이 존재하고 무엇이 기다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때문에 우리가 아는 한 줌의 지식은 미시적으로 접근하면 할수록 한계에 다다른다. 우리가 지구를 알고 은하와 태양계를 다 안다고 해도 시공간이 만들어낸 거대한 차원의 공간에서는 그것 역시 한 줌의 먼지일 뿐이다. 그래서 이치를 알기 위해 양적인 지식에 집착하면 남극에서 길을 잃어버린 탐험가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영원히 이치의 주변을 맴돌 뿐 그것을 깨달을 수 없다.
성공은 수천만의 생명을 상대로 벌이는 치열한 전투격물치지(格物致知)의 원리는 그래서 중요하다. 사물의 이치를 깨닫기 위해 죽도록 그것을 부여안는 것이 격물치지다.
양명학의 아버지
왕양명은 격물치지를 위해 어린 시절 뜰앞의 나무를 하루 종일 보고 또 보았다. 나무가 자라는 이치, 봄바람과 가을바람이 나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무가 잎과 꽃을 피우는 과정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심지어는 침식을 전폐하고 그것을 들여다보느라 청년기를 다 보냈다.
물론 그것에서 그가 얻은 이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일생을 통해 이루어낼 학문의 모든 준비를 끝냈다. 심지어 바위와 마주 앉아 이치를 찾는 마음과 인내는 그가 생각한 ‘꽃을 보지 않으면 꽃은 없다’는 암중화의 인식론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그는 양명학의 태두로 우뚝 서서 한국의 실학사상에 깊은 영향을 남긴다.
동서고금을 통해 이치에 닿은 사람은 모두 그랬다. 그들은 초인적인 인내와 노력으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이상의 이치를 탐구했다. 모두가 꽃을 보고 ‘꽃이다’라고 할 때, 그들은 꽃이 피고 지는 이치를 생각했다. 모두가 ‘눈이 내린다’라고 할 때, 그들은 자연의 순환을 생각했다. 누군가가 상(喪)을 당하면 기의 순환과 인식을 뛰어넘는 윤회의 사상으로 연결지었다.

이것은 이치를 구하는 방식의 문제가 아니라 이치를 접하려는 자세를 상징한다. 우리가 고작 한 줌의 지식으로 수백만 수천만이 부딪치는 곳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교만이다. 사회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다. 그 안에서 성공을 꿈꾸는 것은 나를 제외한 수천만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생명을 상대로 어르고 달래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는 것과 같다.
지금 당신이 성공하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못난 사람이라고 수긍하는 데서 출발해라. 지금 당신의 작은 지위가 혹은 지식이 혹은 재산이 남보다 많고 우월하다고 생각된다면, 그 모든 것은 단지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해라. 지금까지 주어진 행운이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가진 게 아무것도 없고, 스스로 누추하다고 여겨지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라.
당신은 버릴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차라리 채우기가 쉽다. 어설프게 알고 어설프게 가지면 그것을 버리지 못하는 미련이 더 괴롭고 힘든 것이다. 당신이 성공을 꿈꾼다면 쓸데없는 것들은 모두 버리고(간과하고) 통찰력(이치)을 키워라. 한 가지 이치를 깨달으면 다른 이치를 볼 수 있는 눈은 저절로 열린다.
그렇다면 통찰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것은 바로 늘 변화하는 것이다. 인간은 한 가지 영역에 집중할 때 최선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당신이 부자를 꿈꾸는 것은 바로 보유한 자산이 일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일등이 되는 과정이 언제나 다른 사람들이 해온 일들을 답습하고 다른 사람들이 하라는 것을 배워서 익히면 가능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재테크 역시 나만의 철학과 노하우를 확립하고 그것을 개선하고 발전시키면서 세상의 변화에 끊임없이 조화를 이루어 나가는 일이다. 재테크는 과정의 결과일 뿐 목표가 아니다. 당신이 성공하기 위해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안목을 기르는 것이고, 그러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이 발전하는 데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것은 옳은 판단이고, 옳은 판단은 탁월한 안목을 필요로 한다. 안목은 무엇인가? 그것은 같은 사물을 보고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이다.
그런 면에서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철학적이다. 당신의 눈에 비치는 사물들은 당신의 머릿속에서 재해석된다. 모든 사람이 무심코 지나는
태종대 자갈밭에서 수백만원짜리 수석을 캐는 사람이 있고, 공원을 걷다가 이름 모를 들풀에 가슴 아파하는 사람은 그것을 잡초로 알고 스쳐가는 사람과는 다르다.
삶을 관리하고 자신을 단련시키는 노력이 필요당신이 음악을 좋아한다면 길거리를 지나다가 들리는 모차르트의 선율에 가슴 저린 감동을 받겠지만, 그 반대의 경우라면 당신의 귀는 소음에 시달렸을 뿐이다. 같은 사물을 두고 그것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 그것을 해석하고 교감하는 당신의 뇌는 스스로에게 더 나은 발전을 요구한다.
부자가 되고 싶으면 도전하는 사람이 되라. 당신의 눈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사물의 형상에 자극받고 당신의 귀를 통해 들리는 소리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라. 그 과정에서 당신은 세상을 푸는 지혜를 발견한다. 예술가가 작품으로 드러내고자 했던 영감을 포착해본 경험이 있는가?
베토벤이 신을 향해 절규하던 그 마음이 ‘9번 교향곡’을 들으 느껴지는가? 무용처럼 대사 하나 없는 몸짓을 보고 무엇을 말하는지 이해할 수 있는가?
현대미술관 앞뜰에 놓인 설치미술에서 그것을 만든 이의 영감을 떠올려본 일이 있는가?
당신이 그것을 이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작품이지만, 당신이 지나치면 그것은 고철 덩어리다. 당신이 소리를 듣고 작곡가와 연주자의 영감을 느낄 수 있다면 당신은 이미 언어라는 교착된 수단을 벗어나서도 타인과 교류할 수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이성에게 고백하고 싶다면 그(그녀)의 표정에서, 눈빛에서 그것을 읽을 수 있는가? 굳이 고식적인 언어 수단을 이용하지 않고도 소리나 색깔로 혹은 격식과 문법이 사라진 시어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이미 당신의 오감은 살아 있다. 당신의 오감을 일깨우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당신은 길을 걷다가 발바닥으로 전달되는 땅의 느낌을 느끼는가? 지금 당신이 앉아 있는 의자에서 당신의 엉덩이가 닿아 있는 그 느낌을 이 글을 보지 않고서도 항상 느낄 수 있는가? 지금 당신의 뺨을 스치는 공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할 수 있는가? 지금 당신의 오감은 어떠한가?

어느새 당신은 그것들을 전부 활용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고 단순화된 수단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당신의 호흡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가 폐를 거쳐 동맥을 타고 손가락마디, 발끝까지 흐르는 그 살아 있는 느낌을 당신은 느낄 수 있는가?
내 눈에 보이는 것, 내 귀에 들리는 것, 내 손으로 만지는 것, 당신이 사물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경로는 혹시 그것이 전부가 아닌가? 보이지 않는 것, 들리지 않는 것, 만질 수 없는 것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판단하는가?
통찰적 사고를 하려면 다른 사람과 다른, 지금과는 다른 잣대가 필요하다. 예전에 당신이 보고 듣고 만져보고 판단했다면 이제는 느끼고 판단하는 능력을 키워라.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달라져야 한다.
하루에 잠은 여덟 시간 이상 자는 것이 좋다는 망발을 잊어버려라. 지금 당장 당신의 삶을 관리하고 자신을 단련할 준비를 시작해라.
그 방식은 무엇이라도 좋다. 지금 당장 맨발로 땅위를 걷는 운동을 시작해도 좋고, 모차르트 전집을 사서 그것을 다 외울 때까지, 그것이 소음이 아닌 아름다운 선율로 들려 오르가슴을 느낄 때까지 그것만 들어도 좋다.
황동규의 시집을 사서 ‘풍장’을 소리내어 외워도 좋다. 아니면 곰브리치의 미술사를, 힐드베르거의 철학사를 붙잡고 이를 악물면서 읽어도 좋다.
그냥 지금과 달라지면 된다. 내일은 오늘과 달라지고 모레는 내일과 달라지면 된다. 거리를 걸으면서 공기를 맛나게 먹는 연습도 하고, 물을 한 잔 마실 때 꼭꼭 씹어 먹어도 좋다. 당신의 죽어 있는 오감을 살리기 위해 지금부터 당신은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을 한 가지씩만 돌파하라. 책을 읽는 것이 싫다면 철학사를, 음악 듣는 것이 싫다면 말러를, 그림이 싫다면 피카소와 맞서라. 그저 당신의 오감을 편안하게 하는 일들을 하나씩 주변에서 치워나가라.
손쉬운 수단의 선택… 성공 가능성 멀게 해그것이 익숙해지면 다음 단계로 들어가자. 당신이 1년만 그런 도전을 한다면 도전 결과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 될 것이다. 예전에는 관심 없었던 혹은 싫어했던 것을 아끼고 사랑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 대한 새로운 지식에 대해 자부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에게 놀라운 경험을 안겨줄 것이다. 어느 날 아침에 굴드의 골드베르거를 들으며 일어나는 당신을, 읽다 베갯머리에 두고 그대로 잠든
데리다의 해체론에, 당신의 거실에 걸려 있는 리히터의 그림에 스스로 놀라고 변화한 자신에 대해 당황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 다음 일에 도전하라. 그것도 당신이 가장 하기 싫었던 순서대로 시작하라. 영어 회화를 선택하든, 중국어를 배우든, 가게에 한 시간 일찍 나가 유리창을 닦든 간에 당신의 일에서 중요하지만 미루면서 가장 하기 싫었던 일부터 먼저 도전해라.
그리고 그것이 익숙해지면 다시 그 다음으로 당신이 하기 싫은 일을 골라 뛰어들어라. 그러면 당신은 어느새 화두를 들고 수십 년을 선방에 앉은 스님보다 맑은 정신과 판단의 소유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깨달음 혹은 통찰은 목숨을 건 수행과 불가능에 대한 도전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다. 당신이 가장 손쉬운 수단을 선택하려는 순간 당신에게서 성공의 가능성은 점점 멀어질 뿐이다.
돈을 벌고 싶은가? 부자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필자의 책을 비롯한 돈을 벌게 해준다는 그 수많은 ‘쪽집게’ 책들부터 마당으로 끌어내 불사르라. 주식에서 성공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당장 TV에서 흘러나오는 증권방송 채널부터 망치로 부숴버려라.
통찰은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것이다. 스스로를 담금질하고 스스로를 일깨우고 스스로를 개발할 때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바로 통찰이다. 당신이 진정 성공하고 싶다면 먼저 도전하는 사람이 되라.
▶ 연재를 시작한 ‘시골의사’ 박경철씨는…‘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고 있는 박경철씨(42)는 현직 의사로는 드물게 주식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의대 재학 중 재미 삼아 주식에 투자했다가 실패한 후 오기가 발동해 동료들과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주식 공부를 시작했다. 10년간의 도전 끝에 큰돈을 벌었고, 증권사 게시판과 경제 신문 등에서 ‘시골의사’라는 필명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지난 2001년 MKS(매경증권방송)의 ‘고수 대 고수’에 출연해 솔직하고 뼈 있는 이야기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년에 50여 차례 이상 기업 연수원과 공공기관에서 강연을 하고, 얼마 전에는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책을 출간해 뜨거운 사랑을 받은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하다. 현재 고향 안동에서 신세계연합의원을 운영하고 있고, MBN에서 ‘머니 레볼루션’도 진행하고 있다. 얼마 전 「
시골의사의 부자경제학」(리더스북) 출간했다.
■기획 / 최영진 기자
■ 글 / 박경철
■ 사진 / 박원태·경향신문 포토뱅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