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인간을 생각하는 디자인이 다양한 곳에 접목되네요.

장거리 노선 여행하다보면 정말 이코노미의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닌데 마음에 들어서 옮겨봅니다.

출처: http://bbs5.worldn.media.daum.net/griffin/do/photo/read?bbsId=413&articleId=201596&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

 

장거리 여행에서 가장 힘들고 지치는 순간은 좁고 불편한 이코노미 좌석에 갇혀 지내는 시간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코노미석도 편안하고 프라이버시를 보장할 수 있을 전망이다.

미국의 항공기 객실 디자인 전문업체인 톰슨 솔루션이 개발을 했는데 곡선형 칸막이로 인해서

옆사람과 직접 얼굴을 마주치지 않을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좌석을 어긋나게 배열함으로써 창가쪽 승객이 다른사람에게 불편을 주지 않으면서 복도를 나갈 수 있다는 점!!

이 이코노미석은 2010년에 보잉 767 시리즈에 도입될 예정이라고 한다.

 

음.. 이건 우리나라에 도입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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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벌이 부부로서 아이를 어머님께 맡기고 있는 저로서는 너무 공감가는 내용이네요.

흔히 혼자 벌어서는 먹고는 살아도 저축하기는 어렵다고는 하는데 참 현실적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현실.. 거기에 평생을 희생하시고, 나머지 여생까지 자식을 위해 희생하시는 어머니.

어머니는 대체 어떤 존재일까요. 낳아주시고 키워주시고, 거기다 이젠 손주까지~

과연 저희는 아이의 자녀들을 돌봐주게 될까요. 솔직히 자신이 없네요.

 

출처: http://media.daum.net/culture/others/view.html?cateid=1026&newsid=20080417130309402&cp=ohmynews&RIGHT_TOPIC=R4

 

[[오마이뉴스 정현순 기자]"어, 뭐야? 둘째는 안 봐준다더니 얘는 왜 데리고 나왔어?"
"왜는 내가 요즘 얘 보느라고 한동안 못나왔잖아. 이젠 날도 따뜻하니까 나왔지." 15일 친구 K가 몇 달 만에 모임에 얼굴을 내밀었다. 그것도 둘째 외손자를 데리고. 다른 모임에는 안 가도 이 모임에는 그래도 편하기 때문에 나왔노라고 K는 말했다.

친구의 딸은 맞벌이 부부다. 사위는 지방에 근무하고 딸은 서울에 있는 초등학교 교사다. 그의 딸 부부는 일주일에 혹은 이 주일에 한번 만나는 주말부부인 셈. 친구들도 K가 둘째 손자를 데리고 나오자 "진짜 봐주는 거냐"면서 모두들 의아해한다.

친구 K가 첫손자를 봐주면서 둘째는 절대 못 봐준다고 했을 때 난 '그럼 그렇지 손자 봐주기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하면서 동지애를 느꼈었다. 하지만 K가 둘째를 봐준다고 하니 배신감(?)같은 묘한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일말의 자책감 같은 것이리라.

"내가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데..."





직장 여성들에게 안심하고 아이를 맡길 곳을 찾는 일은 쉽지 않다. 이 때문에 친정이나 시댁에 신세를 지기도 하지만, 그것마저 여의치 않으면 직장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아무튼 교사인 K의 딸은 둘째를 낳고 2년간 휴직을 했다. 그리고 지난 3월에 복직을 해서 친구가 둘째손자를 봐주게 된 것이다. 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둘째는 절대 안 봐준다고 하더니 어쩐 일로 봐주네."
"어쩐 일은…. 힘들게 공부해서 들어가기 어렵다는 교대에 들어가서 힘들게 선생이 되었는데 말이 그렇지 어떻게 안 봐준다고 그래. 그렇다고 내가 집에서 특별히 하는 일도 없는데."

그는 첫손자를 22개월 동안 키웠다. 그는 첫손자를 봐주면서 무척 힘들어했다. 그러면서 못 봐준다는 말을 반복했다.

"둘째는 나도 몰라. 지들이 알아서 하라고 해."
그리곤 딸이 둘째를 낳고 휴직을 하자 그는 잠시 편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딸이 둘째를 낳고 산후조리가 끝나자마자 K는 딸아이 집을 왔다갔다 하면서 손자들을 다시 봐주기 시작했다.

딸이 직장 휴직을 했지만 K의 손자 보기는 계속됐다. 아들 둘만 키우기는 딸이 너무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큰손자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서 며칠씩 재우기도 하고, 그가 딸집에 가서 며칠씩 자고 오기도 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나고 딸이 복직을 하게 된 것이다. 딸아이가 복직을 하게 되면서 버스로 네 정거장 거리에 있던 집도 불편했는지, 지난 2월에는 딸이 친정집이 있는 아파트로 이사를 오기까지 했다. 친구K의 본격적인 둘째 손자 보기가 시작된 것이다. 둘째는 21개월. 기저귀 신세 면할 때까지만이라도 봐주기로 했단다.

"손자들 아플 때 제일 힘들어"

친구K를 만난 날 난 외손자 봐주면서 느끼는 감정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외손자들인데 친할머니가 안 봐주고 자기가 2명이나 봐 주는 것이 약 오르지 않니? 어떤 외할머니는 그런 생각하면 괜히 성질난다고 하던데." "글쎄 시어머니가 아주 멀리 살아서 그런지 그런 생각은 안 들어. 시집이 가까이 살면 나도 그런 마음이 들었을지도 몰라도." "자기 손자들 보면서 가장 힘들 때는 언제야?" "아무래도 아이들이 아플 때가 가장 힘들지." 사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식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도 손자들을 돌봐주다가 손자들이 아프면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드는게. 손자들이 제 엄마 아빠한테 있어도 아플 때 되면 아픈 것을 알면서도 왜 그리 미안한지. 그는 평소 깔끔한 성격이라 육아방법에 대해서는 딸과 큰 갈등은 없는 듯 했다. "자기 수고비 받아서 돈 많이 모았겠다. 한 달에 수고비는 얼마나 받아?"
"용돈 수준보다는 좀 더 많이 받지.(정확한 액수를 이야기 하지는 않았지만 대략 50만원 이상은 받는 눈치였다) 그런데 그게 그렇더라. 힘들다가도 그거 생각하면 힘든 줄도 모르겠어."

그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면서 통장이 두둑하겠다는 느낌도 들었다. 웬만한 어려움은 참을 수 있다는 듯.

요즘 친구K의 5살 된 큰손자는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다. 그래서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의 딸이 어린이집에 들러 큰손자를 데리고 친정으로 온단다. 그리고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작은손자만 데리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큰 손자는 할머니 집에서 재운다고 했다.

전에는 두 손자와 딸 모두 같이 친정에서 잤지만, 남자아이 둘이라서 모이면 전쟁터가 따로 없다고. 두 손자가 만나면 집안이 말 그대로 초토화가 되고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자는 통에 결국 딸과 친정엄마가 각자의 집에서 한명씩 나누어 자고 있다고 했다. 딸이 둘을 모두 데리고 집으로 가면 아침에 둘을 데리고 오기도 힘들고 해서. 결국 친구K는 두 손자를 번갈아가면서 봐주고 있는 셈이다.

난 나쁜 할머니일까





손자 보기를 외면한 나는 나쁜 엄마일까? 친구를 보면서 딸과 손자들 생각이 많이 났다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우리가 밥을 먹는 동안 21개월된 친구K의 둘째 손자는 보채거나 마구 돌아다니지 않았다. 낯가림도 큰손자만큼 심하지도 않았다.

"둘째 얘는 굉장히 순하다. 낯도 잘 안 가리고."
"응 얘는 지 형하고 떼어놓으면 봐줄만 해. 하지만 둘이 붙여놓으면 개구장이도 그런 개구장이가 없어. 이젠 형한테 대들기도 하고 갑자기 밀치기도 하고 해." 점심을 먹는 동안 그가 손자에게 생선가시를 발라주고 뜨거운 것을 식혀 먹이고, 매운음식을 가리면서 살갑게 보살펴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린이집에서 놀고 있을 손자들의 얼굴이 생각났다. 우리는 점심을 잘 먹고 공원으로 놀러 갔다. 그의 손자가 아주 재미있게 잘 뛰어 놀았다. 같이 있는 동안 울음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공원에서 잘 놀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그가 손자를 등에 업는다. 손자는 신이나 했다. 할머니 등에 업히더니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고, 손으로는 좋아서 그런지 할머니 등을 치면서 해맑게 웃었다. 손자를 업은 친구가 그렇게 멀어져갔다.

난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안심하고 직장에서 일하고 있을 그의 딸과, 지금쯤 어린이 집에 있을 두 손자 그리고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내 딸이 떠올랐다. 내 딸은 안심하고 일하고 있을까?

내가 큰손자를 못 봐준다고 했을 때 딸아이는 외국인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난 그런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자를 못 봐준다고 했다. 딸아이는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도 딸아이는 10개월이 지나 다시 직장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곤 둘째를 낳았고, 그 아이가 5개월 되었을 때부터 어린이집에 맡기면서 계속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

손자를 봐줄 때 수고비란 것도 받았지만 그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그 무엇이 있어 무척 힘들었다. 내가 손자 봐주기를 거절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친구K를 보면서 손자들과 딸 아이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그날 난 집에 돌아가 어린이집에 있는 손자들을 내가 찾았다. 그리곤 4살 된 작은 손자를 아주 오랜만에 업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녀석의 어리광이 한껏 늘어졌다. 코맹맹이 소리를 내면서 "함무니, 나 컹(형) 아니야, 나 아기야" 하면서 등에 쫙 엎드린다. 녀석의 그런 어리광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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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일요일에는 반가운 손님을 만났다.


영구피자에서~

3년전 이맘때 한국에 놀러온 에들린과 캐더린을 데리고 아들녀석과 함께 용인민속촌 구경을 시켜줬었는데, 3년이 지나 연락이 닿은 것이다.

어느 정도 컸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훌쩍 자라 둘다 숙녀가 되어있었다.

3년 전에는 작고 귀여운 소녀들이었는데, 이번에 만나니 에들린은 그새 키가 얼마나 컸는지 170cm는 족히 넘어보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예의바르고 착한 것은 여전했고, 오랜만의 만남이라 무척이나 반가웠다.

피자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중간중간에 아들녀석과 장난도 치고, 화장실도 데려다 주고, 어쩜 그리 이쁠 수가~

홍콩에 살면서 한국에서 사업하는 엄마를 만나기 위해 가끔 한국에 오는 아이들을 보면서 밝고 건강하게 자라는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았다.

키가 너무 클까봐 14살 어린 딸에게 일부러 무거운 걸 들게 해서 키가 더 자라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엄마의 농담이 아니더라도 정말 많이 큰걸 알 수 있었다.

3모녀가 정말 친구처럼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키우는 재미는 딸이 더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전의 인연으로 연락이 닿아 오랫만의 만남을 가졌기에 무척이나 즐거운 하루였다.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홍콩에 거주하는 아이들은 독일어, 영어, 광둥어,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데, 어쩌면 이 아이들야말로 코스모폴리탄의 전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의 세대에는 어쩌면 에들린과 캐더린처럼 코스모폴리탄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시대가 아닐까.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살이에 미쳐 적응도 하기 전에 또 저만큼 멀찍이 앞서나가는 세상에서 우리 아이는 과연 어떻게 살아갈까~

짧은 만남이었지만, 긴 여운을 갖게 한다.

어쩌면 앞으로 3년 후 다시 만나게 된다면 그때는 또 어떤 모습일지, 무슨 생각이 들지 참으로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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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드디어 원어데이에서 질렀다.

하루에 한가지 상품만 판다는 특이함으로 눈여겨 봐왔던 사이트인데~

비염 심한 아들 녀석에게 좋을 것 같아

팍스 인 헤일러를 질렀다.

정말 효과가 좋았으면~

http://www.oneaday.co.kr/?id=ZW9tYWx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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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를린먼로가 "나는 잘 때 샤넬 넘버 5만 걸치고 잔다"라는 말을 해서

샤넬 넘버5가 널리 알려지게 된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제품이

아서 케이플이라는 샤넬의 영원한 사랑에게 헌정되었는지는 오늘 처음 알았네요.

좋은 글 잘 읽고, 남겨두고 푼 욕심에 요기에 옮겨둡니다.

출처: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835679


No.5 보다도 진했던 그들의 사랑

 

인류 역사를 통틀어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장 표현해주고 그 아름다움의 자유를 만끽하게 해준 최고의 이름은 바로 ‘샤넬’일 것이다. 숨도 못 쉬게 허리를 바짝 조인 코르셋을 과감하게 벗어내고 예쁜 몸매가 드러나는 좁은 치마와 편안한 자켓으로 아름다운 여성의 맵시를 뽐내게 해준 그녀의 패션은 그 어떤 혁명보다 강렬하였고 또 아름다웠다.

가브리엘 샤넬. 아름다움의 대명사 샤넬의 화려함과는 달리 어린시절 그녀의 삶은 슬픔과 고통의 연속이었다. 1883년, 프랑스의 작은 마을 ‘소뮈르 Saumur’ 에서 태어난 샤넬은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로 인해 어려움 속에서 어머니가 죽자 수녀원에 동생들과 함께 버려진다.

물론 이곳에서의 생활은 훗날 샤넬 패션의 기본이 되는 흑백의 조화와 심플한 라인으로 나타나지만 단조롭고 지루한 수녀원에서 생활을 견디다 못한 샤넬은 결국 그곳을 나와 ‘물랭 Moulins’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비로소 세상과 조우한다.

물랭에서 특별한 직업을 갖지 못하던 샤넬은 어린 시절부터 닦아온 노래실력을 무기로 ‘라 로통드 La Rotunde’ 이라는 조그마한 뮤직홀에서 노래를 부르며 가수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는데, 이곳에서 그녀가 자주 부르던 ‘코코가 르로카데로에서 만난 사람 Qui qu’a vu Coco’ 이라는 노래를 통해 샤넬은 ‘코코’라는 애칭을 얻게 된다.

하루하루 뮤직홀에서 삼류가수로 그럭저럭 생활을 이어가던 샤넬은 어느 날 부르조아 집안의 아들 ‘에티엔트 발상’ 이라는 첫번째 후원자를 만나게 되고 그녀의 인생에 커다란 기회를 갖게 된다.

발상을 통해 프랑스 상류사회를 접하게 된 샤넬은 자신감 있는 옷차림과 개성으로 당시 최고의 미술작가와 소설가, 시인, 배우, 스타일리스트 등 많은 친구들을 사귀게 되고, 샤넬의 아름다움과 개성에 매료된 상류사회의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주변에 모였으며, 샤넬은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꿈꿔온 패션사업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한편 잘나가던 사업가이자 폴로선수였던 ‘아서 케이플’은 어느 날 친구의 초대로 참석한 파티에서 이제 막 상류사회에 첫발을 디딘 샤넬을 만나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게 되는데, 미남에 능력까지 갖춘 케이플을 만난 샤넬도 첫눈에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뛰어난 사업적 능력과 안목을 가진 케이플은 자신의 연인으로 감각적이고 세련된 샤넬의 모습에서 잠재되어있는 능력을 한눈에 알아보았고 적극적으로 그녀의 패션업계 진출을 돕는데, 모자와 의상 디자인 샵으로 처음 패션사업을 시작한 샤넬에게 사업자금을 빌려주고 그녀의 시작을 이끌어 준것도 바로 아서 케이플이었다.

1914년 노르망디의 아름다운 휴양도시 도빌(Deauville)에 문을 연 샤넬의 의상실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고, 그녀만의 패션 감각과 뛰어난 센스를 통해 만들어진 모자와 의상을 통해 샤넬의 의상실은 도빌에서 최고의 판매를 올리는 가계가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샤넬에게 위기가 찾아오는데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이다. 전쟁이 일어나자 도빌에 있던 모든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성공가도를 달리던 샤넬사업은 아무도 남지 않은 도빌에서 커다란 위기를 맞게 된다.

하지만 이때에도 케이플은 샤넬의 귀향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곳에 남아 계속 패션사업을 이어가라고 조언한다. 결국 샤넬은 도빌에서 사업을 이어나가고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최고급 의상을 구하려는 사람들의 구매로 샤넬의 사업을 더욱 큰 성공을 얻게 된다.

이렇듯 샤넬은 처음 시작한 패션사업에서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기 시작하였고, 그런 그녀에게 케이플은 비아리츠(Biarritz)에서의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며 그녀에게 도약의 계기를 마련해준다. 케이플의 도움으로 유럽의 신흥 패션리조트였던 비아리츠에 새로운 의상실을 오픈한 샤넬은 케이플의 예상대로 시작부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였고, 당시에 이곳에서 드레스 한 벌을 구입하려면 3000프랑(약 60만원)을 지불해야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곳에서 성공도 샤넬의 야망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아리츠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샤넬은 이듬해에 다시 파리로 돌아왔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파리에 머물며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였다.

1914년 처음 6명으로 시작해 이제 300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리며 탄탄한 성장을 한 샤넬은 드디어 파리에 자신의 샵을 오픈하고 샤넬이란 이름을 세계에 알리게 되는데, 그 당시 이미 미국을 포함한 많은 곳에서 샤넬의 패션을 카피한 의상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으며, 세계 최고의 패션잡지 <하퍼스 바자>에서도 샤넬을 최고의 디자이너로 소개하기에 이른다.

드디어 샤넬은 명실상부한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대열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고, 그런 그녀의 앞길을 가로 막을것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언제까지나 그녀의 곁에 머물지 않았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1919년 12월 21일, 샤넬에게 천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진다. 자동차광이었던 케이플이 크리스마스 파티를 위해 자신의 승용차를 몰고 깐느로 가다 참변을 당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사고로 샤넬은 자신의 영원한 사랑 케이플을 잃게된다.

자신의 꿈을 이루게 해준 사람.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 사람을 신뢰하기보다는 의심하고 경계하던 자신을 이해해주고 새로운 삶을 갖게 해준 사람. 이렇게 소중했던 케이플은 한없는 사랑과 신뢰를 전해주고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된다.

여성이 사업가로 회사를 경영하는것이 불가능했던 시대에 샤넬은 자신의 사업을 성공시켰으며, 모두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게 된다. 물론 그 모든 성공 뒤에는 그녀의 영원한 사랑 아서 케이플이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이후 샤넬은 평생 많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그들의 성공을 도왔는데, 세계 최고의 예술가로 인정받는 피카소, 살바도르 달리, 스트라빈스키, 장 콕토우, 디아길레프 등 당대의 예술가가 그녀를 통해 많은 도움을 얻었으며 그녀는 항상 그들의 후원자이며 친구로 함께했다.

아서 케이플이 자신에게 주었던 신뢰와 후원을 보답하듯이. 훗날, 샤넬은 자신이 만들어낸 최고의 패션아이템 <샤넬 No.5>향수를 아서 케이플에게 헌정한다. 그리고 그것은 케이플과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그녀에게 있어 최고의 기쁨이기도 했다.

1971년 1월 10일, 세계 최고의 디자이너 코코 샤넬은 그녀의 새로운 컬렉션 발표를 며칠 앞두고 파리 리츠호텔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녀에게는 케이플과의 아름다웠던 추억을 담은 샤넬 No.5가 함께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하고 싶은 그녀의 바램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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