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자도 이 정도면 정말 예술이라고 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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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의 감동 2배로 만드는 액자들


미술관에서 액자를 보고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림에 비해 액자를 그저 부수적인 장식 요소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액자는 복잡한 미학 개념 이해와 그림 감상에 여러모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매우 실용적인 이유에서 생겨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액자와 연관 지어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등한시되었고, 액자에 대해 논의된 적도 거의 없었다.


액자의 많은 기능 중 가장 의미 있는 것은 관람자와 그림 사이의 중재자 역할이다. 너무 크거나 장식이 과한 액자는 그림을 압도해 초라해 보이게 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액자가 왜소하고 장식이 지나치게 단조로워도 그림에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한다. 그림을 향한 관람자의 시선이 전시실 공간으로 흩어지지 않게 액자가 도와주지 못한다면 관람객의 집중력이 저하될 것이며, 감동 역시 덜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재자로서 액자는 두 가지 임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액자는 그림 속으로 우리를 초대하면서, 일단 경계 안에 들면 쉽게 빠져나갈 수 없도록 시선을 그림 안에 묶어둘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카스퍼 다비드 프리드리히(1774~1840)

「산 위의 십자가(테첸)」, 1807~08

 

이토록 훌륭한 액자가 아니었다면, 이 그림은 석양을 낭만적으로 그린 여느 작품과 전혀 달라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프리드리히는 액자를 통해 전혀 다른 느낌을 창출해낸 것이다. 고딕 양식의 아치 모양을 한 이 액자는 중세 종교미술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가득 차 있다.

 

액자 밑부분에 장식된 ‘신의 눈’은 광선에 둘러싸여 기단을 꽉 채우고, 양옆으로 성찬식을 의미하는 밀 다발과 포도넝쿨이 ‘눈’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이 문양들은 부조로 조각되고, 반짝이는 금박으로 덮여 있어서 따뜻한 흙빛 배경과 대조를 이룬다. 한편 양옆의 고딕식 기둥은 우아하게 뻗어 올라가 잘게 갈라진 야자나무 가지와 만나는데, 이는 종려주일(부활주일 바로 전 주일을 가리키는 말―옮긴이)과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 예수가 예루살렘에 입성한 영광스런 순간을 암시한다. 아치의 둥근 부분에 다섯 천사가 조각되었고, 이들은 그림 속을 들여다보려는 듯 몸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찬찬히 보지 않으면 가장 중요한 요소를 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다. 바로 산꼭대기 저 멀리, 전나무에 가려지다시피 한 십자가다. 십자가는 관람자 쪽에서 볼 때 비스듬한 각도로 서 있기 때문에, 전나무 사이에 선 앙상한 나무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림을 아래로 응시하는 다섯 천사의 시선으로 인해 우리는 그림의 중심을 잊지 않고, 기독교 최고 상징물인 십자가를 보지 않고선 자리를 떠나지 못하게 된다. 이 그림에서 액자는 그 형태와 상징 요소를 통해 낭만적인 풍경화를 강렬한 알레고리를 내포한 종교화로 탈바꿈함으로써 관람자가 작품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다.

 

 

 


프레데릭 에드윈 처치(1826~1900)

「안데스의 심장부」, 1859

 

「안데스의 심장부」는 처치가 두 번에 걸친 남미 여행 후 그 경험담을 녹여 만든 복잡하면서도 섬세한 작품으로, 약 2미터 높이에 폭은 약 3미터가 조금 안 되는 크기였다. 검은 호두나무로 만든 액자는 높이가 약 3미터, 폭은 4미터 정도였고, 단순한 액자라기보다는 제단장식물처럼 보였다. 관람자가 그림이 아닌 실제 풍경을 보고 있는 것처럼 느끼도록, 르네상스식 복고풍 창을 닮은 액자를 만드는 것이 화가의 의도였다.

 

그림은 선반처럼 생긴 받침대에 놓였고, 지평선은 성인 관람자의 평균 눈높이인 액자의 중간부분에 맞춰졌다. 액자의 윗부분과 양옆에 장식된 소란(小欄)의 구조와 위치는 그림이 관람자들에게서 실제보다 더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처치는 새로 지은 10번가 스튜디오 빌딩 내부, 천장이 유리로 된 중앙 홀에 그림을 걸 목적으로 런던의 ‘걸작 전시’(제약이 많고 경쟁도 심한 공식 살롱의 대안으로, 1850년대 런던과 파리에서 열린 전시를 지칭하는 말)구성에 익숙한 영국인 액자 제작자를 고용했다. 오프닝은 사교계의 큰 행사로 장대하게 치러졌고, 참석한 이들은 그 후 몇십 년 동안 이 날을 일생의 가장 중요한 문화 행사로 기억했다.

 

3주일간 하루 평균 방문자 수는 500명을 훌쩍 넘겼고, 사람들은 이 작품을 보는 특권을 누리기 위해 친히 25센트를 내고 전시장에 입장했다. 전시는 이 작품이 앞으로 몇 년간 겪게 될 비범한 여행의 시작에 불과했고, 처치에게는 생애 최고의 부와 명예를 안겨주었다. 당시 것과 똑같이 제작한 액자 속에 보관된 이 작품은 현재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상설 전시되고 있다. 이제 현대의 관람객도 장대한 그림과 그만큼 우아한 액자가 함께한 미술사의 한 단면을 음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1834~1903)

「분홍색과 회색의 변주」, 1871년경


휘슬러의 「분홍색과 회색의 변주」를 감싼 액자는 넓고 부드러운 나무판 위에 다다미 깔개 문양을 그린 것인데, 중앙에 다섯 획, 좌우의 가는 띠에는 세로선 세 개를 반복해 그어 간단히 표현했다. 액자 세로 틀의 왼쪽 부분에는 휘슬러의 유명한 나비 도안이 눈에 확 띄는 적갈색으로 그려 있는데, 마치 도금한 액자 표면 바로 위를 날아다니는 것 같다.

 

휘슬러는 거기서 약간 오른쪽 위, 액자의 가장자리 안쪽에 또 한 마리의 나비를 짙은 회색으로, 마치 고깃배 돛에 새긴 무늬처럼 그렸다. 나비 두 마리를 이렇게 가까이 배치하고 돛을 액자의 안쪽과 맞닿게 함으로써 휘슬러는 그림의 얕은 깊이감을 강조했고, 관람자가 액자의 끝부분을 주시하게 했다. 나중에 그는 그림 색조를 보완하는 중간색으로 미술관 벽을 칠해 이러한 효과를 극대화했다.

 

그림과 액자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은 휘슬러에게 매우 중요했다. 그는 단 한 점의 그림에도 서명하지 않는 대신 자신의 작품임을 상징하는 나비를 액자에 그렸다. 나비는 그의 작품임을 상징했고, 위조에 대한 대응책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갈대묶음 문양을 모방한 액자는 각기 다른 품질과 형태로 제작돼 유통되었고, 휘슬러 스타일을 모방한 액자들은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고가에 팔리고 있다.

 

 

 

플로린 스테트하이머(1871~1944)

「뒤샹의 초상」, 1923


뒤샹은 스테트하이머의 주변 인물 중 특히 중요한 사람이었다. 평소 플로린에 대한 뒤샹의 존경심 역시 남달랐다. 덕분에 그녀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평론가와 수집가들에게서도 큰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뒤샹의 초상」은 뒤샹의 이니셜로 만든 결합문자, 뒤샹이 여장을 하여 자신을 분신으로 삼은 로즈 셀라비, 「초콜릿 분쇄기」의 L자형 손잡이, 체스 말, 빛나는 후광이 있는 시계 등 다양한 상징 이미지를 창의적으로 배열한 작품이다.

 

스테트하이머가 액자 재료로 사용한 것은 뒤샹이 기계 작품에 사용한 회색 금속과 매우 유사하다.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진 쇠틀은 알파벳 ‘M’과 ‘D’들을 지탱하고, 이 글자들은 한 줄로 죽 늘어서 액자를 사방으로 둘러싼다. 스테트하이머는 그림이 어떤 더 큰 어떤 것의 일부이며, 영화의 한 프레임처럼 잠시 멈춘 상태로 일시 분리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박한 느낌의 액자는 화가의 이러한 생각을 잘 뒷받침해준다.

 

톡톡 끊는 스타카토 리듬이 만드는 선 덕분에, 액자는 그림 바깥 테두리에 기계의 역동성을 더하고, 그림 속 시계의 퍼져나가는 원형을 다시 한번 반복해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스테트하이머는 역동적이고 무중력 상태에 놓인 뒤샹의 우주를 이 액자 속에 가둬놓은 것이다.

 

 


 신디 셔먼(1954~)

「무제 211번」, 1990


셔먼은 액자를 선택할 때 그 어떤 미술사의 특성도 드러나지 않게 했다. 액자를 통해 관람자를 혼란에 빠뜨리고, 기억을 흐릿하게 하거나(내가 이 그림을 어디서 봤더라?), 혹은 완전히 좌절하도록(대체 누가 그린 거지?)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진지한(역사의 전통은 갖고 있되 난해한) 예술품을 현대에 맞게 패러디한 작품을 마주하고 있다.

 

이것은 예술 작품을 과거의 특정 시점에 되돌려놓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묵살하고, 나아가 과거와 현재의 개념에 의문을 갖게 한다. 셔먼의 사진 자체처럼 액자 역시 현존하는 역사의 산물을 복제하는 척하지 않았다. 이렇게 이들은 그동안 축적해온 미술사에 대한 우리의 기억을 희롱하고 있는 것이다.

 

한스 홀바인의 그림 속 여인의 옆모습을 닮은 「무제 211번」의 액자는 르네상스기 북유럽 초상화 액자의 일반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그것은 견고한 사각형 틀에 타원형 구멍을 낸 단순한 구조의 액자다. 액자의 나무 패널과 테두리에 반짝이는 검정 칠을 했는데, 여기엔 마치 오래된 액자인 것처럼 위장하려는 시도도 없다. 상처가 난 것처럼 보이기 위해 표면을 긁거나, 현대식 기계로 만든 티를 감추려고 표면을 깎지도, 혹은 먼지가 끼고 오래된 것처럼 보이려고 부순 돌가루를 끼얹지도 않았다. 현대 사진을 넣기 위한 새 액자임이 확실하다.

 

주목할 것은 액자와 이 그림 같은 사진이 매끄럽게 융화한다는 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부각하면서, 이들은 우리의 과거와 현재의 초상화들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면밀히 고안된 것이다.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는가? 초상화란 무엇이며, 이 초상화는 무엇인가? 그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가?

 

 

 

소방수들의 트로피 액자

1856년경


유럽에서 트로피 액자는 긴 역사와 함께 다양하고 풍부하게, 놀랄 만큼 많은 수량으로 제작되었다. 전쟁의 노획물을 전시하는 풍습에서 발전한 트로피는 르네상스시대와 이후 대중적인 장식 문양으로 쓰였다. 또한 트로피는 농업, 음악, 건축과 관련한 도구와 기구들을 재치 있게 배열하는 등 다양한 주제를 다뤘다.

 

한편 미국에서는 트로피 액자를 지역사회에서의 공로를 치하하는 상장을 넣는 데 사용했다. 19세기 시 정부는 재난 대책에 특별한 공을 세운 경찰이나 소방서에 종종 감사패를 증정했다. 소방관을 위해 화려하게 꾸민 상장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복잡하게 장식한 액자에 넣었고, 이 액자는 양식면에서 미국 액자 장식의 절정을 보여주었다.

 

트로피 액자를 만든 디자이너는 건축 요소들을 활용해 고전풍의 감실형 액자를 만들었다. 액자는 전통 교회의 구조를 빌려왔지만, 맹렬한 불꽃과 맞서는 소방수들이 있는 도시 건물 모양을 하고 있다. 액자 밑부분의 안테펜디움은 가문의 전통 문장이 아니라, 아칸서스 잎이 소화전을 둘러싼 기이한 결합을 보여준다. 그 위 프레델라의 넓은 선반은 기념문서 바로 앞의 말이 끄는 물 펌프 조각을 받치고 있다.

 

액자 양쪽에는 코린트식 기둥을 세우고, 주두 위에는 작은 톱니 모양의 코니스를 올려 현관 지붕이 경사져 있음을 암시했다. 이러한 디자인은 이 시기 미국에서 성행한 그리스 건축 부흥의 전형을 따른 것이다. 팔라디오식 창문과 벽돌로 된 건물 외벽은 지붕 아래의 삼각형 벽에 실물 같은 느낌을 더해주고, 분주한 소방수들의 모습과 창문에서 새나오는 검은 연기에 실재감을 더한다.

 

 

 

살바도르 달리(1904~80)

「머리가 구름으로 가득 찬 한 쌍」, 1936

 

다양한 심리 요소와 은유로 가득 찬 풍경화로 잘 알려진 초현실주의의 화가 달리는 이 한 쌍의 초상화에 사람 모양의 액자를 끼워 작품을 완성했다. 화가는 도금한 카세타 액자로 광대한 해변 풍경을 감쌌는데, 이 액자는 대화 중이거나 무엇인가를 모의하고 있는 듯한 남녀의 실루엣 모양을 하고 있다. 액자 역시 작품의 일부로, 관람자가 해변 풍경을 보는 동시에, 남녀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렇게 두 가지 세계가 공존하는 화면은 직사각형 액자 속에서처럼 이상의 세계가 아니라, 화가가 만든 불가사의한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다.

 

환상적인 그림과 액자를 융합하는 이러한 방식은 모더니스트들이 창문 형태의 전통 액자를 거부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리의 액자는 관람자와 그림의 영역을 확실히 구분하여 전통 방식을 고수했다. 달리는 결국 액자의 형태를 변형함으로써 액자의 영역에 대한 개념에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우리는 해변 풍경을 보며 액자 너머로 끝없이 펼쳐진 상상의 파노라마를 떠올리고, 분리된 두 그림을 잇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히게 된다. 수평선과 탁자의 윗면은 두 사람 사이의 공백을 메우고, 비록 상상 속에서일 뿐이지만 둘을 연결하며 공존을 확인케 한다.

 

액자와 그림의 융합이 얼마나 설득력이 강한지, 언뜻 봐서는 고개를 기울인 사람의 머릿속에 그려진 구름도 함께 기울어져 있음을 알아채기 어렵다. 시간이 약간 흐른 후에야 우리는 사람의 모습을 한 액자가 그림 속 하늘을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지녔음을 깨닫게 된다.

 

<그림보다 액자가 좋다> W.H.베일리 지음, 아트북스 펴냄

http://book.daum.net/bookdetail/book.do?bookid=KOR97889898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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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에서 나왔던 내용인 듯 한데.. 재미있네요..

외국 친구들한테 보여주면 재미있어 할 듯~~

출처: http://agorabbs3.media.daum.net/griffin/do/kin/read?bbsId=K153&articleId=8524&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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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실감나는 글이던지... 서른 다섯이라~ 서른다섯....

 

[한겨레] 일과 결혼에서 선택을 고민하는 삽십대 중반, 그 세 개의 물음표… 세상은 뿌리 박으라 등 떠밀지만 여전히 불가능한 도전을 꿈꾼다

▣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 이혜민 인턴기자·김규남 인턴기자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우리 시대 30대 중반은 두 번째 사춘기일까? 오늘의 30대 중반은 목하 고민 중이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짧으면 5년, 길면 10년이 지났지만 일에서 만족을 얻기란 쉽지 않다. 아니 서른다섯 살은 여전히 퇴근길 거리에서 ‘정말 이 일이 내 평생직업일까’ 고민한다.

한동안 열심히 살았으니 잠시 쉬고 싶다는 생각도 간절하다. 더구나 30대 중반의 비혼(미혼)이라면 세상에 발목 잡아주는 여우 같은 마누라(혹은 늑대 같은 남편), 토끼 같은 새끼도 없는데 ‘도대체 무슨 영화를 누리겠다고 고생을 하나’ 더욱 심각하게 자문하게 된다.

 




서른다섯은 영원한 솔로로 남느냐와 결혼의 막차를 타느냐의 분기점이 되는 시기다. 지나는 가족을 보면서 책임질 가족이 없어서 편하다는 생각과 비빌 언덕이 없어서 외롭다는 복잡한 심정을 느낀다. 일에서의 두 번째 선택, 결혼에 관한 결정적 선택, 남들은 모두 끝낸 고민을 오늘도 계속한다는 자괴감에도 빠진다. 게다가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몸은 벌써 청춘이 아니다. 쳇, 이건 머리 벗겨진 피터팬이야, 혼자서 구시렁거린다.

오늘날 서른다섯의 고민에 3개의 물음표를 던졌다. 이 물음표들에는 일, 결혼, 몸에 대한 고민이 녹아 있다. 글에서 서른다섯은 30대 중반의 대명사다. 한국에서 남성과 여성은 군대 문제 탓에 사회적 연령이 다르다. 여자 나이 서른셋, 넷, 남자 나이 서른대여섯 즈음을 축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30대의 비혼은 나이의 소수자다. 한국의 강력한 나이주의 탓이다. 예컨대 대졸 남성이라면 20대 중·후반에 취직을 하고,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30대 중·후반에 집을 장만하려 애쓰고, 이렇게 인생의 주기표가 주어진다. 하지만 30대 중·후반의 비혼은 인생의 진도표에서 벗어난 존재다. 정해진 길을 가기도 어려운데, 정해지지 않은 길을 가기란 더욱 힘겹다. 한국의 30대 비혼자는 1995년 76만3천여 명, 2000년 111만1천여 명, 2005년 177만3천여 명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10년 사이에 2.3배 가까이 늘어난 수치다. 전체 미혼 인구 중에서 30대 미혼자가 차지하는 비율도 1995년 7.23%, 2000년 10.17%, 2005년 15.45%로 2배 이상 늘었다(그래프 참조).

#혼돈 하나

그대는 아직도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가

하필이면 김광석이 노래하고 있었다. 8월14일 오후, 점심식사를 마친 서른다섯의 아저씨 둘이 팥빙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았다. 아무도 없는 커피숍에는 “비가 내리면~ 나를 둘러싸는 안이한 만족이 잊혀질까~”, 그들이 스무 살 무렵에 들었던 김광석의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신문기자로 일하는 기자의 대학 친구는 “얼마 전에 말이야 노래방에 갔는데 마흔 먹은 선배가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거야. 괜히 ‘저 사람이 부를 노래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말했다.

기자가 농담을 섞어서 답했다. “네가 부를 노래도 아니야. <서른 즈음에>는 서른셋 이상한테는 금지곡이야.” 친구가 답했다. “알거든.” 몇 달 만에 만났지만, 오늘의 주제도 역시나 직장 얘기였다. 친구는 “어떻게 10년을 일했는데 여전히 일이 버겁냐”고 토로했다. 말해 무엇하랴. 기자는 일부러 “휴가 동안 뭐했냐? 분식점 자리라도 알아보지”라고 ‘야렸다’. 그는 “한동안 너무 우울해서 병원 가볼까 생각도 했어”라고 한층 ‘업그레이드’된 고민을 털어놓았다. 이어진 그의 하소연. “요즘엔 마감하다가 자꾸 물을 마시러 왔다갔다 하거든. 불안하니까. 옆사람이 불편할 정도일걸. 그래도 전에는 가끔 내 기사를 보면서 괜찮게 썼다는 생각을 했는데. 요즘은 하루하루 버겁기만 해요. 밥값 못한다는 생각만 들지.” 이번에는 김광석이 “그루터기 가슴엔 회한도 없다~”고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일이 힘든지 모르겠어”

원래 투정은 기자의 몫이었다. 그는 대개 내 투정을 유머로 받아넘겼다. 듣기 좋은 풍월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는 투정이 민망해 기자가 투정을 그칠 무렵, 그의 하소연이 시작됐다. 벌써 두어 해 전이다. 요즘엔 그의 이름이 그가 일하는 신문에 보이지 않을 때면, 정말로 그만뒀나, 걱정이 들 정도다. 기자가 물었다. “야, 집사람한테는 이야기했냐?” “했지. 그래도 집사람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타입이라 다행이야.” 못 말리는 서른다섯의 피터팬은 여섯 살 아이의 아버지다. 물론 반성도 나왔다. “기자가 과분한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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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써서 생각을 나눌 수도 있으니까. 그런데 왜 이렇게 힘든지 모르겠어.” 그는 마치 나의 복화술을 하듯 내 심정을 말하고 있었다. 그의 스무 살, 스물다섯 살 때가 생각났다. “아저씨, 원래 조숙한 콘셉트 아니었어? 왜 이래? 네가 철이 없어서 그래, 철이.” 역시나 한 술 뜨면 두 술 뜨는 그의 대답, “조숙한 피터팬, 그거지”. 허탈한 웃음이 터졌다. “조숙한 척했지만 본질은 피터팬이라, 맞습니다, 맞고요.” 이렇게 서른다섯의 아저씨들은 스물다섯 살 때보다 더 우울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날 “점점 더 멀어져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로 시작되는 <서른 즈음에>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끝끝내 유쾌한 녀석은 “힘든 고민 끝나면 형한테 연락해!”라는 농담을 잊지 않았다.

#혼돈 둘

돈을, 아니 꿈을 갖고 튀어라?

서른다섯 살의 김정훈씨는 낮에는 온라인 광고회사에서, 밤에는 홍익대 앞의 바에서 일하는 ‘투잡스’족이다. 그는 2000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홍보대행 기획사에서 6년을 일했다. 기획사 편집팀장으로 월급도 꽤 받았다. 하지만 그는 2005년 7월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에게 서른다섯 살은 월급쟁이로 남느냐, 사업주가 되느냐는 분기점으로 다가왔다. 김씨는 “밤새우는 일이 많아서 체력에 부담을 느꼈고, 사업 기반을 잡아서 안정된 40대를 맞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직장을 그만둘 결심으로 저축을 시작했고, 저축금을 종자돈 삼아 동업으로 바를 열었다. 그는 “음악과 사람을 좋아하는 적성을 고려해서”라고 말했다. 때마침 사업 제의가 들어와 온라인 광고회사도 차렸다. 그렇게 그는 2006년 서른다섯을 맞이했다. 그는 “처자식이 없고 막내여서 회사를 때려칠 용기를 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사업을 시작했지만 결혼은 ‘아직’이다. 그는 “지금까지는 늘 오늘의 삶이 중심이었지만 이제는 오늘을 조금 떼어내 내일에 할애할 생각”이라며 “물심양면으로 준비되면 결혼도 하겠다”고 말했다. 적성을 살려 사업을 시작했지만, 서른다섯의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불안해서 바를 열었지만, 바를 연 뒤에도 여전히 불안하다”며 “스물다섯 살 때 했던 ‘하고 싶은 일’과 ‘잘할 수 있는 일’ 사이의 갈등은 여전하다”고 토로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 “마흔 살에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하는 남자를 고운 시선으로 보는 사회가 아니지 않느냐”. 자신의 꿈을 좇지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전직할 수 있는 마지막 시기

전직을 한 번쯤 꿈꾸지 않은 30대가 있을까. 지금 일을 바꾸지 않으면 평생을 ‘이 모양, 이 꼴’로 살아야 한다는 전직의 열병에 시달리는 30대가 적지 않다. 30대 중반은 직무를 바꾸는 전직의 마지막 기회라고 여겨진다. 헤드헌트 업체인 커리어케어 신현만 대표이사는 “30대 중반이면 과장급, 영어로 ‘매니저급’으로 승진 여부가 갈리는 시기”라며 “나의 가능성을 냉정하게 보면서 전직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업무에 잘 적응해온 사람조차도 전직을 꿈꾸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신 대표는 “전직을 하려는 사람에게 잘하는 일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권한다”고 말했다. 그는 “30대 중반까지 첫 번째 경력(First Career)을 쌓는 시기라면, 30대 중반은 평생직업이 될 만한 두 번째 경력(Second Career)을 선택하는 시기”라며 “서른다섯 이후에 시작한다고 해도 30년은 일할 수 있으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일, 예컨대 취미와 관련된 일을 하면 능률도 오른다”고 말했다. 한국의 20대가 시간에 쫓겨서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직장을 선택했다면, 30대 중반에는 시간을 가지고 자신을 응시하면서 직업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올해 서른다섯인 칼럼니스트 임경선씨는 “꺾어진 70이라는 말에서 보듯이, 우리는 유난히 나이에 민감하다”며 “서른다섯쯤 되면 주변 친구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초라하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남의 잔디밭이 파래 보이는 것일 뿐”이라고 덧붙였다. 더구나 오늘의 서른다섯은 대중매체가 생산한 시티 라이프(City Life)의 신화에 영향을 받은 세대다. 그래서 꿈은 창대하지만 현실은 초라하다고 느끼기 십상이다. 더구나 여성은 ‘위기의 서른다섯’을 호되게 겪는다. 박홍주 이화여대 여성학과 강사는 “통계를 보면 한국 여성은 평균 30~34살에 최고 임금에 오른다”며 “정규직 여성이 30~34살에 빠르게 줄어들어 35살 이후에는 비정규직이 늘어난다”고 지적했다.

몸도 마음도 지쳤지만, 회사를 박차고 나오지 못하는 서른다섯도 많다. 이민대행업체에서 일하는 서른다섯의 신희준씨는 “새로운 일을 시도하고 싶지만 돈만 축내지 않을까 싶어 엄두가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휴식에도 목이 마르지만 “돌아오면 상황이 갑갑할 것 같아” 그만둘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반면 생업을 꾸리면서 미래를 모색하는 30대 중반도 있다. 서른셋의 비혼 여성 임수현씨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면서 대학원에서 사진을 배운다. 임씨는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인테리어를 시작했지만, 밤새워 작업하는 일에 지쳐갔다. 그는 “다른 일을 결심하고 사진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사진은 예순, 일흔 살까지 지속 가능한 작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요즘 애들은 어려서부터 꿈을 찾는데, 나는 나이 들수록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씁쓸해했다. 지하철에서도 되도록 전공책을 본다는 그는 “길게 보고 끝을 보고 싶다”고 다짐했다.

현재의 30대 중반은 1970년대 초·중반에 태어난 세대다. 경제성장의 토대에서 성장했고, 80년대의 집단주의와 90년대의 개인주의 사이에서 대학을 다녔고,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로 취업난을 겪었다. 또 단군 이래 최초로 어학연수를 다녀온 세대다. 그리고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으로 어렵게 취업해서 힘겨운 생존경쟁에 시달리고 있다. 이들의 혼돈은 90년대의 후폭풍이다. 이영숙 한림대학교 교수(사회학)는 “이들은 다양한 삶의 가능성을 대학에서 실험해보면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구성할지 고민할 겨를도 없이 IMF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취업에 전력을 다한 세대”라고 분석했다. 한편으로는 이들의 문화적 태도는 386세대와도 다르다. 노명우 아주대 교수(사회학)는 “현재의 30대 중반은 386세대에 견줘 자기 욕망이 뚜렷하다”며 “문화적인 태도는 개인주의적, 쾌락주의적이지만 IMF로 물질적인 타격을 받아서 경제적 기반은 386세대에 견줘 허약하다”고 지적했다. 노 교수는 또 “평균수명이 늘어난 만큼 방황의 시기도 길어지는 것 아니겠느냐”며 “어쩌면 요즘의 서른다섯은 옛날의 20대 후반과 비슷한 나이대인지 모른다”고 말했다. 이영숙 교수도 “인터넷, 여행의 자유 등을 체험한 30대 초·중반은 획일성을 벗어난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아는 세대”라고 규정했다. 이렇게 서른다섯은 청춘의 끝을 잡고 달콤한 인생의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다른 삶은 가능하다’, 그들의 몸에 새겨진 슬로건이다.

한번 떠나면 돌아오기 힘들어

하지만 30대 중반에게 즐거운 외유는 섣불리 허용되지 않는다. 김정화씨는 로펌에서 비서로 3년을 일하다 2001년 스물아홉 살에 영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2년을 공부하고 돌아왔지만 사회의 반응은 냉담했다. 돌아와 5개월 동안 일주일에 서너 개씩 원서를 넣었지만 합격의 낭보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는 눈이 높아져서 돌아왔는데, 회사에서는 그냥 나이 먹은 사람으로 취급했다”고 돌이켰다. 결국 3년 만에 그는 유학 전에 일했던 로펌 비서직으로 ‘도돌이표’했다. 그나마 그 자리에서 일하던 사람이 유학을 떠나면서 생긴 기회였다. 그는 “처음에는 유학을 후회했지만 이제는 사는 데 자신감을 얻은 기회로 여긴다”고 말했다. 여전히 쉼없이 일할 것을 권하는 회사형 인간 사회인 한국에서는, 노동시장에서 한번 나가면 영원히 나가야 한다. 잠시 쉬었다 오겠다고 하면 영원히 쉬라고 말한다. 이렇게 서른다섯이 숨구멍을 찾기란 힘들다. 그래도 서른의 홍역을 겪은 사람은 서른다섯의 혼돈에 면역이 생긴다. 서른셋의 박종태씨는 서른 살 때 여행을 떠났다. 3년을 다녔던 일본계 회사를 떠나서 8개월 동안 어학연수를 하고, 10개월 가까이 지구촌을 누볐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두 가지를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행복할까, 무엇을 하면서 살면 좋을까. 그는 지구촌 곳곳에서 행복한 사람들을 관찰했고, 자신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다. 결론은 영업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생명보험사 컨설턴트로 일하는 그는 “행복하다”고 말한다. 이제는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은 그대는 이렇게 행복을 말한다.

#혼돈 셋

독거 노인은 비혼 남녀의 미래다?

서른다섯 살은 ‘영원한 싱글로 남느냐’와 ‘결혼의 막차를 타느냐’의 갈림길인지 모른다. 한국인의 평균 결혼 나이는 2005년 기준으로 여성은 27.7살, 남성은 30.5살이다(통계청 2006년 3월 발표). 30대 비혼이 늘었지만, 이들은 여전히 결혼시장에서 찬밥이다. 결혼정보업체 선우의 이웅신 대표는 “30대 중반 여성의 가입 문의가 전체의 30%를 차지하지만 재혼팀으로 많이 보내지는 탓에 실제 가입률은 15%에 그친다”고 말했다. 절반의 여성이 알아서 가입을 포기하는 것이다. 심지어 30대 중반에게 회비를 비싸게 받는 업체도 있다. 요즘엔 마흔이 넘은 만혼도 많지만, 30대 중반에 비혼이라면 혼자서 사는 인생을 고민하게 된다.

쉰살 남자를 만나고 펑펑 울다

올해 서른넷 살인 정수현씨는 ‘나에게도 남편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다. 20대 중반부터 맞선도 30번 넘게 보았다. 정씨는 “20대 중반에는 30대 아저씨들과 맞선을 보면서 ‘저런 아저씨들과 결혼해야 하나’ 생각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여유만만하던 그도 지난해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나는 결혼 안 한 거야’라며 부르짖고 다녔는데 올해 들어서는 ‘내가 결혼을 못한 것은 아닐까’ 고민한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편한 사람을 만나면 “내가 어떠니?”라고 자꾸 물어보게 된다. 그는 “이제는 친척들도 눈치를 보느라 결혼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며 “그것이 오히려 더 불편하다”고 말했다.

그는 여전히 “내년에는 연하의 남자를 만나서 결혼한다”는 점쟁이의 말을 믿지만, 혼자 늙으면 어쩌나 불안하다. 2세를 생각하면 마음이 급해진다. 출판일을 하는 서른일곱 살의 정은선씨는 “서른다섯을 넘기면서 오히려 결혼 스트레스가 줄었다”면서도 “나이가 불임의 첫 번째 이유라는 말을 들으면 가슴이 철렁한다”고 말했다. 그는 친구 결혼식에서 오랜만에 만난 첫사랑 대학 동창을 보면서 ‘쟤가 이혼을 하고 내게 온다면 과연 받아줄까’ 생각해보았다. 이렇게 결혼을 원하는 여성에게 30대 중반은 심란한 나이다. 임경선씨는 전한다. “내가 아는 서른일곱 살 언니가 소개팅을 나갔는데 쉰한 살의 할아버지가 나와서 집에 돌아와 펑펑 울었다고 한다. 스무 살에 서른다섯 살을 만나는 것은 그래도 괜찮지만 서른다섯 살에 쉰 살을 만나는 일은 슬프다. ”

그렇다고 30대 비혼이 결혼에 목숨을 걸지도 않는다. 서른일곱의 권순형씨는 증권회사에서 재무컨설턴트 일을 시작한 지 6개월 남짓 됐다. 그에게는 여전히 결혼보다 일이 우선이다. 그는 “독신을 고집하지는 않는데 세월이 흘렀다”며 “지내고 보니 혼자서 사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노명우 교수는 비혼의 증가에 대해 “대부분 월급은 한계가 있지 않느냐”며 “일확천금을 벌지도 모른다는 우연을 기대하기보다는 결혼을 안 하고, 아이를 안 낳아서 내포를 확장시키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분석했다. 안정된 결혼과 문화적 욕구 사이에서 자신의 욕망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노 교수는 “예전처럼 결혼을 하지 않으면 섹스리스(Sexless)로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며 “안정적인 섹스를 위해 결혼을 선택할 이유가 별로 없다”고 말했다. 비혼으로 30대 중반에 이르면,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2세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미혼의 서른다섯 살인 회계사 김진욱씨는 “만약 결혼을 한다면 30대 여성과 하지 않겠느냐”며 “아내를 생각하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이영숙 한림대학교 교수(사회학)는 “30대 중반은 주변에서 불안한 혼인관계를 목격한 세대”라며 “그래서 혼인이 ‘검은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관계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님을 안다”고 말했다.

서른의 위기는 이성애 결혼에 편입될 의사가 없는 사람에게도 찾아온다. 올해 서른두 살인 여성주의자 고현정씨는 벌써 “내 몸뚱아리 하나밖에 없어”라고 말하고 다닌 지 오래됐다. 어느새 “내 한 몸 제대로 건사할” 나이가 됐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친구들은 비타민을 삼키고, 재테크를 시작하고, 보험에 가입한다. 첫째는 건강, 둘째는 경제, 원초적 본능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친구들이 모이면 어디가 아프면 어디를 가라, 적금은 어떤 것이 좋더라, 이런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에게 세상에 넘쳐나는 재테크 정보는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정보가 4인 이성애 가족에게 맞춰진 탓이다. 한채윤 성소수자문화인권센터 대표도 “재테크 정보는 넘치지만 인생테크는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씨는 서른 살의 위기를 맞아서 고민 끝에 여성주의 연구소를 그만두었다. 그는 “지금이 아니면 앞으로 이렇게 쉬면서 또 다른 자신을 찾아볼 용기를 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사진을 배우고 있고, 드럼도 배울 생각이다. 그는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서 패스트푸드점에서 프렌치프라이를 튀길 생각도 했지만, 주변에서 ‘철없는 생각’이라는 핀잔만 들었다”고 말했다. 직장을 그만둔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는 “나는 잠시 옆 골목으로 다녀오겠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살던 골목이 아스팔트가 아니라 고속철도로 바뀌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을 떨치기 힘들다”고 말했다. 그래도 그에게는 힘들 때 달려와줄 친구들이 있다. 그는 “택시로 5분 걸리는 거리에 친구들이 모여산다”며 “나이들수록 공동체의 중요성을 절감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중년을 앞둔 비혼은 늘고 있지만, 독신을 보호할 안전망은 여전히 부실하다. 박재흥 경상대 교수(사회학)는 “국가의 사회적 안전망 강화와 개인의 비혈연 네트워크 조성이라는 두 차원에서 해결책을 생각할 수 있다”면서도 “아무리 노인복지가 좋아져도 고독의 문제는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비혼의 서른다섯은 벌써부터 고독에 시달린다. 임경선씨는 “주변에 불면증에 시달리는 30대 중반이 적지 않다”며 “외롭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것이 일상이 됐지만, 외로움을 토로하면 오히려 외로움이 커지는 것을 아니까 외로움을 커밍아웃하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더구나 ‘아직도’ 스물다섯 같은 고민을 되풀이한다는 자괴감까지 겹친다. 그렇게 겉은 멀쩡하지만 속은 멀쩡하지 않은 서른다섯 살이 적지 않다.

맙소사, 여전히 질풍노도라니!

서른다섯 살의 위기를 검색하다 우연히 발견한 윤준국씨의 블로그에는 나이에 대한 단상이 올라 있다. “서른넷이라는 나이가 참 묘하다. 한 살만 더 먹으면 서른다섯. 왠지 끊어지는 느낌. 빼도 박도 못하는 중년에 들어서는 나이가 된다. ” 그리고 음악이 흐른다. “아임 낫 고잉 애니웨어~.”(I’m not going anywhere) 음악이 심금을 울린다.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지만 어디론가 가는 사람이 부러운 나이, 서른다섯은 망연자실하다.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으면 또 어떠랴, 상념에 잠긴다. 갈수록 길동무가 줄어도 어쩌랴. 다만 건강하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기도 한다. 작가 김영하의 에세이집 <랄랄라 하우스>에는 ‘35세’라는 에세이가 있다. “일간지에 에베레스트 사고 소식이 날 때마다 유심히 그것을 들여다보는데 이상하게도 사망자 중에 35세 남자가 많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왜 그럴까. 함께 암벽을 등반하는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에베레스트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들지. 입산료만 해도 1천만원이 넘을걸?… 여하튼 거기 가려면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는 말씀. 늘어가는 경제력과 줄어드는 체력이 딱 만나는 지점이 바로 35세쯤인 거야. 20대부터 직장을 다니며 돈을 모아 35세가 되면 네팔로 가서 오랜 꿈을 실현하게 되는 건데, 불행히도 몸이 안 따라주니까 사고가 나는 거야.’” 세상은 땅에 뿌리박고 몰두하고 성취하라고 등을 떠밀지만, 서른다섯은 여전히 불가능한 도전을 꿈꾼다. 서른다섯 살에 여전히 질풍노도에 시달리다니, 맙소사!




당신들도 나처럼 아프구나
우울한 젊음을 등에 진 스물다섯의 서른다섯 취재기

▣ 이혜민 인턴기자 taormina@hanmail.net

내 블로그 이름은 ‘찬란한 젊음’이다. 그런데 블로그 분위기는 전혀 찬란하지 않다. 기자를 꿈꿨을 때부터 만들었는데 여태껏 우울하다. 그래서 젊음이라는 말이 무섭다. 이 단어를 등에 업고 있으면 산꼭대기까지 바위를 끊임없이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처럼 고단하게 살 것 같다. 인턴으로 일하니 오랜만에 행복했다. 꿈에 다가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인턴) 기자가 됐는데도 취재력이 부족해서 기사도 쓰지 못하니 거북이처럼 목을 숨겨야 했다. 그러자 내일이 흔들렸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자질 없는 나를 보자 가슴이 쓰렸다. 기획기사를 쓰겠다고 큰소리쳤는데 1단 기사도 쓰지 못하고, 사형수를 취재한다고 해놓고 무기수들을 만나려고 했던 머리 용량이 원망스러웠다. 기획이 좋았더라면 내가 기획한 ‘내 기사’를 썼을 텐데 아쉬웠다. 저물어가는 8월 하늘을 보니 진득한 눈물이 떨어졌다. 우물쭈물해하며 새로운 기획안을 내지 않자 사회팀 팀장은 나를 문화팀으로 급파했고 그때부터 나는 30대 중반 언니, 오빠들을 취재하는 일에 투입됐다.

처음에는 이 취재가 싫었다. 내가 기획한 기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둠이 오면 별이 뜨듯, 기사를 쓸 수 있는 기회를 놓쳤더니 인생을 살 수 있는 기운을 얻었다. 나와 똑같은 삶의 무게 때문에 쉼없이 넘어지고 일어서는 사람들을 보니 힘이 났다. 서른 즈음이면 멀어져간 청춘을 뒤로하고 안정적으로 살 줄 알았는데 든든한 직장을 다니는 언니도, 성실하게 일하는 오빠도 나처럼 치여 살고 있었다. 같은 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니는 장사꾼들의 연대감은 든든했다. 아픈 30대가 아픈 20대를 살린 셈이다. 취재 중에 알게 된 <서른 살, 뭔가 다르게 살 순 없을까>(좋은책만들기 펴냄)의 저자는 “서른 살 위기에 놓인 사람들은 모든 일에 좌절할 수 있다”며 “이런 느낌들은 자기 정체성의 문제로서 우리를 주눅들게 하므로 서른 살 위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하며 아픈 30대들의 얘기를 털어놓는다. 아픈 그들이 아픈 당신을 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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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마철 빨래, 뽀송뽀송 말리는 요령 오늘도 부슬부슬 소리없이 안개비가 내립니다. 지루한 장마로 인해 햇살이 그리운 날이기도 합니다. 비가 연이어 내리는 바람에 빨래 말리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드럼 세탁기가 있으면 드라이까지 해서 나오면 걱정 없겠지만, 혼수품으로 가져 온 세탁기 아직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기에 바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여름이 되면 주부들은 늘어나는 빨랫감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옷을 갈아입히고 한나절만 지나도 땀 냄새가 폴폴 나는 아이 때문에 빨랫감이 끊일 날이 없기 때문 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말리지 않아 눅눅하고 군내 나는 옷을 식구들에게 입힐 수는 없는 일입니다. ★ 빨랫감이 부쩍 많아지는 장마철, 보송보송 옷을 말릴 수 있는 요령 ★ 1. 30-40℃ 정도의 미지근한 물에 빨래를 합니다. 또 마지막 행굼은 뜨거운 물로 하면 그 열기로 수분도 빨리 증발 한답니다 2. 선풍기를 이용하는 것도 좋습니다. 건조대나 의자에 빨래를 걸어 선풍기와 마주보게 하면 잘 마릅니다. 3. 습기가 많은 장마철, 이런 때일수록 오래 널어두지 말고 하루만에 말리는 것이 더 보송보송하답니다. 4. 비오는 날은 빨래 건조대를 방안으로 들입니다. 이때 건조대 밑바닥에 신문지를 깔면 더 효과적이고, 세탁물에 선풍기 바람을 쏘일 때는 방문을 열고 선풍기의 바람 방향이 문 쪽을 향하도록 합니다. 5. 다림질을 합니다. 안 말랐다고 2~ 3일 더 널어놓아 봤자 옷에 습기만 더 차고 잘 마르지 않습니다. 걷어서 다림질을 대충 한 뒤 넣어두는 것이 좋다. 이때 스팀다리미보다는 다림풀을 이용하면 더 잘 마른답니다. 6. 우려낸 녹차 티백 말려 활용합니다. 녹차는 탄닌, 엽록소의 강력한 흡수력이 옷의 곰팡이 냄새를 제거하고 항균 작용을 하는 카테킨은 좀벌레, 곰팡이 번식을 억제합니다. 7. 마지막에는 행굼제를 꼭 사용합니다. 빨래 냄새의 원인은 빨래에서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때가 수분과 만나 생기는 곰팡이 때문입니다.

 

▶ 온 가족이 벗어 내는 빨래줄이 감당을 못하여 보일러 틀어 놓고 말리는 모습입니다.
    ★ 장마철 집안관리 노하우 ★ 1> 옷장/이불장 관리법 ① 헤어 드라이어의 뜨거운 열을 이용, 장롱 속의 습기를 제거합니다 ② 가루비누가 습기 제거에 좋다. 이러한 가루세제는 유기산 염, 인산염이 들어있어 흡습성이 있어 수분을 잘 빨아 들입니다 2> 장마철 눅눅한 이불, 어떻게...
    이불 사이사이에 신문지를 끼워둔다. 신문지는 흡착 다공성 구조로 주변의
    수분을 빨아들이고, 잡균, 미생물 오염 등을 억제합니다 3> 욕실 곰팡이 해결법 실리콘을 마무리 한 가장자리, 곰팡이균으로 검게 된 것은 휴지를 돌돌말아 곰팡이가 쓴 곳에 놓고 락스를 듬뿍 적셔둔 뒤 하룻밤 지나면 하얗게 깔끔하게 되어 있을 것입니다. 6> 고무장갑 관리법 냉장고에 넣어두면 고무장갑 안 습기는 완전 제거됩니다. 7> 싱크대 냄새 제거 싱크대 냄새의 원인은 배수구에 낀 음식 찌꺼기 때문이다. 못쓰는 칫솔 3개를 원통형으로 고정시킨 다음 배수구 안을 닦아줍니다. 8>신발장 관리 선반마다 신문지 두 장씩 접어서 깔면 방습 효과가 있습니다. 가죽 냄새와 발 냄새가 뒤섞여 있는 쾌쾌한 신발장 냄새는 장마철 실내 불쾌지수를 높이는 주범으로 습기와 냄새를 제거하려면 숯과 탈취 젤이 같이 들어있는 방습제를 사용하거나, 선반마다 신문지를 두 장씩 접어서 깔아주면 효과적입니다. 향이 강한 원두 커피 찌꺼기를 넣어둬도 신발장 속의 나쁜 냄새를 줄일 수 있습니다 신발 자체의 냄새와 습기를 없애기 위해선 신발 안에 숯을 빻아서 한지나 망사에 싸서 넣어 두거나, 과자나 김에 들어있는 방습제(실리카겔)를 넣어 두면 됩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구두에 곰팡이가 생겼을 땐 바세린을 바른 뒤 4~5시간 지나서 닦아내면 없어진답니다. 자, 어떻습니까? 습기가 많고 곰팡이가 생기기 쉬운 장마철, 건강하게 보내시길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의 노하우 함께 공유합시다!
     
     
    ★ 플래닛으로 초대합니다 ★
     
원문보기 : http://blog.daum.net/hskim4127/7826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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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으로 자주 사용하는 마늘은 마늘 다지기로 다져놓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시간이 지나면 색이 변하는 단점이 있다.

이럴 때는 설탕을 조금 뿌려놓자. 설탕을 뿌려놓으면 색깔이 변하는 것을 막고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다.

파는 깨끗이 씻어서 푸른 부분을 물기를 제거한 다음 냉동 보관하면 오래 동안 사용할 수 있다.

생고추는 갈아서 냉동실에 보관한 뒤 양념 등을 만들 때 조금씩 꺼내서 쓰면 된다.

ㅎㅎㅎ.. 이런게 바로 생활의 지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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