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은 얼마나 공정한가 - 세계 50개 기업에 대한 윤리 보고서
프랑크 비베 지음, 박종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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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커다란 회사들은 '윤리적으로 볼 때' 어디가 나쁘고 어디가 훌륭한가. 그 기업들이 자체적으로 밝힌 내용과 외부(주로 평가기관이나 비정부기구들)로부터 받은 평가를 바탕으로 소개해놨다. 기업들 스스로 밝힌 내용을 참고로 하되 정보공개의 '투명성'에 방점을 찍고 있고, 기업의 개선 의지에도 높은 배점을 부여했다.

기업의 행위를 '윤리적으로' 따지는 게 간단치는 않다. 탄소발자국이나 노동조건과 같이 어느 정도 글로벌하게 합의가 된 기준도 있지만 정보보호 측면(일례로 책에서는 페이스북의 경우 평점을 보류했다)이나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공적 경영(수익성)' 같은 것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한계가 있을수밖에 없는 간략 보고서 형식이지만 충분히 재미있다. 아무래도 독일 기자가 쓴 것이다보니 독일이나 스위스 등 '독일어권' 기업들이 많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거기엔 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 그들의 나름 앞서가는 윤리기준을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독일어권 기업이라 해도 대부분 엄청나게 유명한 기업들이다. 비록 외부의 압박에 의한 것이라고는 해도 각 기업들이 스스로 윤리적 기준을 높이며 취해온 구체적인 조치들이 상세히 언급돼 있다는 게 무엇보다 이 책의 강점이다.

 
한국 기업 중에서는 유일하게 삼성전자가 들어가 있다. 삼성전자의 평점은 별 세 개, '평균'이다. 삼성의 기준이 그래도 한국에서는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판단을 유보하게 만드는 모호한 부분이 많다'는 단서가 달려 있는 데에서 보이듯 아직 국제적인 민간기구의 감시가 부족하고 그래서 '덜 걸려든' 측면도 있다. 


저자가 누차 강조하듯이 투명하게 밝히고 적극 대응해 개혁하는 회사들은 아무래도 지적을 더욱 많이 받기 쉽고, 감추고 가리는 기업들은 문제제기를 덜 받는다는 딜레마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저자가 2014년에 책을 썼다면 삼성의 노동조건 문제, 산재 문제 등을 감안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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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 - 서발턴 개념의 역사에 관한 성찰들 프리즘 총서 11
로절린드 C. 모리스 엮음, 태혜숙 옮김 / 그린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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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박의 글은 두어번 본적 있지만 늘 어렵다. 스피박 뿐 아니라 라나지트 구하도 마찬가지다. 말이 비비 꼬여 있다. 하지만 끈질기고 엄밀하고 재미있다. 유럽철학 공부하는 사람들이 비비배배 꼬인 프랑스 철학자들의 글을 읽으며 얻는 지적 쾌감과 반짝이는 통찰력에 대한 감탄 등등을 나는 인도 서발턴학자들의 글에서 얻는 것같기도 하다. 



이 책은 스피박의 유명한 에세이(바로 이 책의 제목인 ‘서발턴은 말할 수 있는가’)가 나온지 25년이 지나서, 그 에세이 이후의 서발턴 논의를 보여줄만한 글들을 묶은 것이다. 애초의 에세이에 대한 차테르지 등의 평가도 들어있고, 스피박 스스로의 후일담같은 글도 묶여있다. 


무엇보다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쉬운 일은 아니지만 지랄같은 문장의 군더더기들은 지워가며 읽으면 된다) 애초의 에세이를 두 번에 걸쳐 훑게 된다. 책 앞머리에는 스피박 스스로 수정하고 덧붙인 버전이, 맨 뒤에는 1983년의 에세이 ‘원본’이 실려있기 때문이다. 


이 유명하고도 어려운 에세이를 읽은 내가 대견스럽기는 하지만 사실 재미있었던 것은 앞뒤의 스피박 에세이 사이에 끼어있는 글들이었다. 예를 들면 라제스와리 순데르 라잔이라는 사람은 서발턴과 ‘죽음’에 대해 말하고(서발턴 즉 하위주체란 죽음으로 말할 때조차 제대로 읽히거나 들리지 않는 사람들이므로), 압둘 잔모하메드라는 이는 프레더릭 더글라스의 글을 인용하며 ‘노예제’를 서발턴 담론 안으로 끌어들인다(그러고 보면 <노예 12년>의 노섭은 참으로 특별한 존재다).


미셸 바렛의 ‘식민지 군대’에 관한 글은 지금껏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인 동시에, 식민통치를 겪었고 징병을 당했던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하지만 감춰진) 문제다. 리고베르타 멘추와 에스테르(사파티스타 여성 전사)를 다룬 진 프랑코의 글 역시 흥미진진. 그러고 보면 서발턴이란 난해한 말로 표현되는 ‘보이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만 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참으로 얼마나 많은지. 


정리해둬야할 내용들이지만 정리하기 힘들다는 핑계로 일단 책장은 덮고, 스피박이 하고 있다는 교육활동에 대해서나 좀더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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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의 윤리 -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한 헌사 프런티어21 18
알랭 바디우 지음, 이은정 옮김 / 길(도서출판)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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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바디우, 이름만 알고 누군지는 잘 모르다가 지난달 <투쟁을 위한 철학>이 은근 재미있어서 내친 김에 손을 댔다. 바디우가 '우리 자랑스러운 프랑스의 철학자들'에게 보내는 헌사다. 책의 원제는 쁘띠 판테온 어쩌구 하는 건데, 국내판 제목은 거기 비하면 몹시 거창하다. 오히려 부제 '현대 프랑스 철학에 대한 헌사'가 딱 맞는다.


무슨 책인지 잘 살펴보지도 않은 채 저자와 책 제목만 보고 가방에 넣은 뒤 지하철에서 펼쳤는데, 이 책이 '지하철에서 읽기에 적당한 책'에 들어가는지는 잘 모르겠다. 자크 라캉, 사르틀, 알튀세르, 들뢰즈, 데리다... 흐흐흐. 어차피 이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도 모르는 판에 이들에 대해 품평한 책을 읽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어서 살짝 망설이긴 했다. 


네임드로핑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 프랑스 철학자들 이름을 입에 달고다녀서 싸잡아 싫어했는데, 책은 뜻밖에도 재미있었다. 그 중 가장 인상깊었던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부분을 드문드문 옮겨본다. 순서는 내 맘대로 바꿨다.


"새로운 세대가 성취한 것, 그것은 자본의 회의주의, 즉 그것의 니힐리즘이다. 여기에는 사물들이 없다, 여기에는 인간이 없다. 여기에는 국경이 없다. 여기에는 앎이 없다, 여기에는 믿음이 없다. 여기에는 살아야 할/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

리오타르가 가혹하게 맞닥뜨려야 했던 것, 관통해야 했던 것, 사유해야 했던 것은 이 살기/죽기의 부재다. 그리고 그것에 매진하면서도 사랑만은 에외로 남겨둔다. "그 시절 동안 사랑하는 것만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단 한순간도, 우리의 관심을 끌만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아름다움이나 매력으로 향해갈 때면, 내가 떠올리게 되는 것은 언제나 밤이다. 리오타르에 따르면 이 밤은 이제부터 우리의 거점이다. 그가 오롯이 15년 동안 자신의 삶을 헌신했던 것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의 이름들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밤의, 어떤 특정한 밤의 정언명령. 예를 들면 알제리에 대한 1989년 텍스트의 서문에 등장하는 이 갑작스러운 진술들. 그리고 밤의 명령에 좀더 가까운, "자본주의의 지배를 대체할 근본적인 대안이라는 원칙은 단녕되어야 한다." 정언명령의 기표 '되어야 한다'는 표현이 텍스트에서 강조되고 있다.


리오타르의 사유는 이 '해야 한다'에 대한 길고도 고통스럽고 복잡한 사색이며, 그가 사망한 후에는 우리에게 그 일이 맡겨졌다. 퇴락하지 않으면서 밤을 받아들여야 하는 과제. 이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 없이, 다시 말해 객관적인 역사적 주체 없이 그리고 어쩌면 그가 쓴 것처럼 "할당할 수 있는 목적들 없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이제 고집스럽게 충성해야 할 장소는 어디인가? 밤 속에서 우리의 일탈이 위치한 곳은 어디인가?


"사회 안에는 측량할 수 없는 다양한 장르의 담론들이 작동 중이며 어떤 한 가지도 나머지 모든 것들을 옮겨 적을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이들 가운데 하나, 자본 또는 관료주의는 자신의 규칙들을 다른 것들에 부과한다. 유일하게 전면적인 이러한 억압은 희생자들이 이에 대항해 증언하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고 이러한 담론의 철학자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것을 파괴해야만 한다."



바디우는 선배이고 동료이고 때론 논쟁의 적이었던 철학자들의 저서와 생각에 스스로의 평을 붙여 요약하고, 그들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헌사를 바친다. 이런 철학자들이 백가쟁명한 '철학의 시대'가 존재했다는 것, 그 자체로 얼마나 대단한가. 

책에는 사르트르와 미셸 푸코가 나란히 1971년 구트도르(파리 18구의 무슬림 이주민 거주지역)에서 벌어진 이주민 차별 시위에 나섰을 때의 사진이 실려 있다. 위 사진에서 전단지를 들고 있는 사람이 사르트르, 그 왼쪽이 푸코라고. 사르트르가 거리에 나서서 전단지를 돌리던 시대.


바디우는 '우리 프랑스의 철학자들'을 자랑스러워할만 하다. 이 헌사들은 지나간 '철학의 시대'에 대한 바디우의 추억담이면서, 그런 시대를 흘려보내고 반성 없는 막가파 자본주의의 시대를 살아가는 모두에게 건네는 편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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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 - 세 딸을 폭격으로 잃은 팔레스타인 의사 이야기
이젤딘 아부엘아이시 지음, 이한중 옮김 / 낮은산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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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아이들과 단란하게 살아가던 집에 포탄이 떨어진다. 목숨과도 같던 사랑스런 딸들은 ‘조각난 몸뚱이’가 되어 방 안에 흩어졌다. 목이 달아난 딸들의 몸, 잘린 손발을 발견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떨까. 이 아버지는 그 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자식들을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낸’ 자들을 증오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그렇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난민촌 의사로, 이스라엘군 공습에 세 딸을 잃은 이젤딘 아부엘아이시(58·사진)가 그 사람이다. 삶을 파괴당한 뒤 오히려 희망을 버리지 않고 이-팔 평화공존 운동에 나선 아부엘아이시는 “전쟁에서 승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에 우리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저서 <그러나 증오하지 않습니다>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해 서울을 찾은 그를 20일 만났다.

악수를 하려고 내민 그의 손을 붙들고 나는 "당신 책을 보면서 울었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내 책은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이니 그걸 읽고 우는 걸 바라지는 않는다"면서 웃었다. 그는 “남북한이 갈라져 긴장상태에서 살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이-팔 분쟁은 머나먼 남의 나라 일이 아닐 것”이라며 ‘비극이고 전쟁이었던’ 인생에서 희망을 찾아온 자신의 인생을 얘기했다.

아부엘아이시는 이스라엘에 점령당한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자랐다. 인구 170만명, 세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가자는 그 자체가 거대한 난민촌이다. 한국 사람들에게 가자는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이 곳의 역사는 유구하다. 그는 “구약성서에서 델릴라가 삼손의 머리칼을 잘라낸 곳이 오늘날의 가자지구”라고 소개했다. 그의 집안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을 전후해 터잡고 살던 곳에서 가자지구로 옮겨갔고, 그 후로 60년 이상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영구적인 난민’이 됐다.

자발리야 난민촌에서 보낸 그의 어린 시절은 전후의 힘겨운 삶을 살아낸 한국의 옛 세대들 모습과 다를 바 없다. 그는 “구호기구에서 준 ‘멜빵바지’를 처음 보고 어떻게 입고벗나 고민한 적도 있다”며 “유엔이 주는 우유배급표를 모아 우유를 받아 팔며 살았다”고 회고했다. 지우개를 잃어버릴까 실에 꿰어 목에 걸고 다니며 글을 배운 그의 꿈은 “교육을 잘 받아 난민촌을 벗어나는 것”이었다. 집 잃고 땅 잃은 부모도 9남매의 장남인 그의 교육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부모의 바람대로 공부를 잘 해 이집트에 유학한 뒤 의사가 됐다.

팔레스타인인들의 생활은 여전히 대가족 중심이고, 그도 여덟 남매를 뒀다. 하지만 성공적인 듯했던 그의 삶에 2008년부터 어둠이 드리우기 시작했다. 아내 나디아가 급성백혈병에 걸린 것이다. 산부인과 의사이자 불임치료 전문가인 그는 가자지구와 이스라엘의 병원을 오가며 일하고 있었다. 아픈 아내를 이스라엘의 병원으로 옮기고, 숨진 아내의 주검을 다시 집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그는 ‘검문소의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운명을 맡겨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절감했다. “없어도 그만인 그림자 같은, 최소한의 존엄도 없는 존재로 취급당하는 모멸감”을 겪으며 아내를 떠나보냈다.

2009년 1월 16일, 가자지구는 이스라엘군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있었다. 아내가 숨진 지 몇달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공교롭게도 그는 이스라엘 친구가 많은 팔레스타인 의사였기에, 이스라엘 방송에 매일 전화로 가자지구의 상황을 알리고 있었다. 이스라엘 정부는 가자의 참상을 자국민들에게 감추려 했지만 진보적인 유대인 저널리스트 슐로미 엘다르는 아부엘아이시의 목소리를 TV에 내보내며 전쟁 소식들을 전했다. 공습으로 아부엘아이시의 세 딸이 숨진 직후에도 전화는 연결됐다. 고통에 절규하는 그의 목소리가 이스라엘에서 전파를 탔고, 유튜브를 통해 세계에 퍼져나갔다. 그의 호소는 가자 침공의 참상을 알리는 상징이 됐다.

4년이 지났지만 딸들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처지를 한탄하며 시간을 보내지도 않았고 누구를 미워하지도 않지만 왜 내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다. 보복과 응징 대신 공존을 믿지만 왜 딸들은 죽고 나는 살아남았는지 궁금할 때가 종종 있다.” 

책에는 '그 날'의 풍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 글 앞머리에 올린, 산산조각난 딸들의 몸과 그 방의 풍경이. 그걸 눈으로 보고도 어떻게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처음엔 '증오하지 않는다'라는 그의 책 제목을 보고 화가 났다. 왜 증오하지 않는가? 그런 짓을 당하면서 용서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저 당신이 힘 없는 쪽에 속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아마도 나는 '(현실에 대한) 분노'와 '(누군가에 대한) 증오'를 같은 것으로 혼동했나보다. 아부엘아이시를 만났을 때,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팔레스타인에 얼마나 있나요, 하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었으니 다른 이들도 다 (증오를 극복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아부엘아이시의 책에 당시의 감정에 대한 설명이 한 구절 나와 있다. 딸들이 희생된 뒤 자신 앞에는 '어둠(증오)의 길과 빛(용서와 공존)의 길' 둘 중 하나로의 선택이 남아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를 증오가 아닌 평화의 전달자로 일으켜세운 것은 역설적이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었다.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남은 다른 자식들을 치료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의사들이 도와줬다. 팔레스타인 테러로 딸을 잃은 이스라엘 아버지를 만나 마음을 나눈 경험도 있었다. 실상 이스라엘에도, 아부엘아이시처럼 '화해하고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다. 그들이 다수라고 할 수는 없어도, 아예 없지는 않다. 팔레스타인이 약하다보니 용서와 화해를 강요받는 것 아닌가, 하는 내 속좁은 의문은 거둬두기로 했다.

물론 딸들의 죽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에게는 이스라엘 사람들과 교류해온 경험이 있었다. 어릴 때 돈을 벌려고 유대인 농가에서 일했던 경험, 훗날 의사가 되어 찾아갔더니 그 농가 주인이 아들처럼 따뜻하게 맞아주더라는 경험, 불임치료 연구를 하고 석사,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준 이스라엘 의사들과의 만남 등등 다른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비해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나눈 경험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를 유독 그만의 경험이라 할 수는 없다. 유대인(이스라엘인)들과 팔레스타인인들은 유사 이래로 그 곳에서 공존해왔고, 지금도 실상 경제적으로 서로 얽매여 있는 처지다. 정치인들이나 군인이 아닌 '보통 사람들'의 교류는 늘 있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또한 그럴 수밖에 없다.

그는 이스라엘을 향해  “안전을 확보하는 유일한 길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라고 호소하고,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아들딸을 보며 미래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지 잘 생각하라”고 말한다. 보복의 악순환으로는 아무것도 풀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코소보, 남아프리카공화국, 북아일랜드 분쟁이 모두 풀렸다”며 “중동 분쟁이라고 해법이 없을 리는 없다”고 말했다. “나는 의사다. 환자가 낫지 않으면 잠시 치료를 멈추고 환자의 상태를 다시 살피고, 치료 과정에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봐야 한다. 그게 의사의 일이며,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2010년 ‘생명의 딸들(Daughters for Life)’이라는 재단을 만들었다. 숨져간 세 딸, 베싼, 마야르, 아야를 기리며 팔레스타인 여성 교육과 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는 재단이다.

분쟁의 와중에도 두 나라 사이엔 풀뿌리 연대운동이 조금씩 퍼지고 있다. 평화캠프나 여름학교, 평화의 전화, 교육·의료 프로그램이 활발히 이뤄진다. 아랍계와 유대계가 함께 하는 농구 리그도 있다. 아부엘아이시는
“상황을 타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여성에게 주목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성 지위향상은 팔레스타인 안에서도 민감한 주제이지만 그는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제 목소리를 내는 것이 평화를 앞당기는 길이라 믿는다. 그는 “여성들을 가르치고 평화에 앞장서도록 하는 것이 내 딸들을 다시 살리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팔 공존이 ‘언젠가는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노력으로, 그 날을 조금이라도 앞당기고 싶을 뿐이다. 벨기에 정부는 2010년 그를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하기도 했다.

아부엘아이시는 2009년 여름 아이들과 캐나다로 이주, 토론토대학 교수로 일하고 있다. 영구 이주는 아니며 가자지구로 조만간 돌아갈 예정이다. 아이들은 가자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물었다. 살아남은 아이들에게도 엄청난 트라우마가 남아있을 터이니 말이다. "아이들 뜻은 아직 모르겠지만, 존중해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가자로 돌아가는 시기를, 아이들이 원하는 시기에 맞추겠다는 뜻이다. 하지만 가자로 돌아가는 것은 그에겐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분쟁이 벌어지는 바로 그 사회(공동체) 안에서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가자가 그에게는 "대가족이 남아있는 고향"이기 때문이다.

이번 한국 방문에서 그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과 한신대학교, 정동 프란치스코회관 등을 방문해 의료관계자와 독자들을 만난다. 1시간 반 정도의 짧은 대화를 마치고 헤어지면서 나는 "팔레스타인에 꼭 가보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8월에 가자지구로 돌아가 잠시 체류할 예정이니 혹시 올 수 있다면 꼭 방문해달라"고 했다. 그럴 기회가 과연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내가 겪은 일은 팔레스타인 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분쟁과 증오와 불의의 하나일 뿐”이라며 “한국을 비롯한 국제사회가 분쟁의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해줘야 할 역할들이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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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지지 않는 사슬 - 2천7백만 노예들에 침묵하는 세계
케빈 베일스 외 지음, 이병무 옮김 / 다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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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스키너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르포로 구성된 노예제 추적기라면, 이 책은 통계자료와 개념과 국제법과 국제 규약을 가지고 현대판 노예제의 실태를 전한다. 르포가 아닌 보고서에 가깝기 때문에 읽는 '재미'를 따지자면 스키너의 책이 훨씬 앞선다. 하지만 스키너의 책이 미국 정부의 노예제에 대한 입장과 세계 각지 노예 현실 르포를 뒤섞어 산만한 느낌이 드는 데 비해 이 책은 건조하지만 훨씬 짜임새 있다. 학자들의 '보고서'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책은 먼저 노예제를 철폐하기 위한 싸움의 역사를 소개하고, 현대의 '노예제'라는 이 낯익고도 낯선 개념에 대한 정의와 다양한 형태들을 소개한다. 그리고 노예제가 글로벌 경제 속에서 어떤 식으로 이윤을 창출하는지 살핀다. 


이어지는 장들은 현대의 노예제가 갖고 있는 특징적인 양상들에 대한 분석이다. 아직 어린 소녀들을 포함한 여성 노예들에게 유독 가해지는 폭력과 고통의 양상, 현대의 노예제에서 인종과 종족과 종교가 미치는 영향, 현대의 노예들을 양산하는 '시스템'인 무력 분쟁과 환경파괴, 그리고 현대판 노예들이 겪고 있는 건강상의 위험(신체적 정신적 위험이 모두 포함된다)과 그 결과들이다.


코트디부아르에는 코코아 농장이 약 80만개가 되며 여기서 전세계 코코아 공급량의 대략 절반이 생산된다. 대개 말리와 같은 인근 가난한 나라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 이들 중 일부는 외딴 시골 농장에서 노예로 일한다. 노예를 이용하는 농장이 얼마나 되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넉넉히 잡아도 5%에 미치지 못할 것으로 추정된다. 농장주들이 코코아를 도매업자에게 넘길 때 노예들이 재배한 그리 많지 않은 코코아는 '자유' 코코아와 뒤섞이는데 이 둘을 구별할 방법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 중 하나가 코코아 협약이다. 2001년 체결된 이 협약은 전 세계의 초콜릿 업계, 몇몇 노에제 반대 단체들, 노동조합들과 ILO를 결집시킨다. 이 협약은 전 세계 코코아 재배지역에서 모든 단체 간의 조약으로 기능하며, 한 업계 전체와 노예제 반대운동 간에 맺어진 최초의 조약이다. 이 협약에 따라 국제코코아기구라는 재단이 설립됐다. 재단은 초콜릿 업계로부터 2002~2008년 900만달러 이상을 제공받았다. 재단은 농장들이 노예노동을 인정하고 이를 포기하도록 종용했고, 노예가 발견되면 언제라도 도울 수 있는 보호시설을 준비했다. 이와 별도로 1백만 달러가 ILO에 전달돼 '상업적 농업에서 아동 노동 착취 근절을 위한 서아프리카 프로젝트'가 시행됐다. 업계에서 총 1000만달러를 희사한 셈이다. 

협약에 따라 초콜릿 회사들은 코코아 재배에 아동이나 노예 노동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자발적인 업계의 기준'을 만들기로 합의했지만 아직 합의에 이르지는 못하고 있다. 게다가 코코아를 사용하는 제품을 만드는 업체 상당수가 협약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선의 길을 찾기 위한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스웨덴의 새 법률에 따르면 성을 파는 것은 합법이지만 그것을 구매하는 것은 불법이다. 성을 구매하는 것만을 범죄로 정한 것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힘의 불균형을 바로잡으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의회는 성을 파는 여성과 그것을 사는 남성 사이의 경제적, 사회적 관계를 불평등한 것으로 보고, 여성의 몸을 살 수 있는 남성의 능력은 일종의 남성 우월권으로 간주하여 저항하고 제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방식은 윤락업소를 합법화하고 정규화해 인신매매 여성에 대한 수요를 줄이고자 한 독일과 네덜란드 법률과 대비된다. 독일에서는 2002년 성매매가 합법화됐는데 노예제를 종식시키는 데에도 일부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엔은 여전히 독일을 성적 착취를 위한 인신매매 여성들(주로 중부 유럽과 동유럽 출신)이 흘러들어가는 '최상위' 도착지 국가로 지정하고 있다. 

스웨덴은 소비 부문에서 성매매와 인신매매 수요를 없애고자 한다. 독일과 네덜란드는 그와 달리 인신매매범을 체포함으로써 공급체계 내에서 노예들로 운영되는 성매매를 줄이고자 한다. 현 시점에서는 어던 접근방식이 실효를 거둘지 확실히 알지 못한다. 


미얀마 정부의 노예 이용에는 경제적 기능이 있다. 미얀마에는 국가 주도 노에제가 거의 20년 동안 널리 퍼져 있어서, 오늘날 아태 지역에 존재하는 국가 주도 노예제 피해자 200만명 중 상당수가 미얀마인이다. 1990년 군부 정권 집권 뒤 요직에 앉은 장성들은 나라를 개인 사업체처럼 운영했다. 노예들이 임금 한푼 못 받고 나무를 베고 광물을 캐고 길을 닦고 기간시설을 건설했다. 그 중 많은 수가 인종적, 종교적 소수민 출신으로 무장 민족단체의 지원줄을 끊으려는 정부의 의도에 따라 노예화됐다. 1990년대 이후 미얀마에서는 인신매매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여성 수천명이 인신매매돼 태국에서 강제 성매매에 종사하고, 남녀 성인과 아이들이 중국, 방글라데시, 말레이시아, 한국, 마카오로 팔려가성 착취를 당하거나 가정부로 일하거나 강제노동에 투입된다.

미국 정부는 인권 침해에 대한 대응으로 미얀마에 제재를 가했지만 미국 업계는 미얀마 군사정권의 전략을 용인해 비난을 받는다. 군사정권이 진행한 사업 중 하나는 미국 석유회사 우노칼, 프랑스 토탈, 태국 회사 PTT익스플로레이션 랜드 프로덕션(태국 정부가 일부 지분 소유)과 제휴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사업은 수천 명의 노예화된 노동자들을 이용했다. 

미얀마 정권은 아동병사를 징집하기도 했다. 수단 정부와 달리 미얀마 정권은 이런 관행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2003년 당시 정부군에는 아동 7만명이 존재했고 일부는 열한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 해 모집된 신병 중 40퍼센트가 아동이었다. 
파이프라인 사업에서는 현대 노예제의 또 하나의 요소가 드러난다. 환경파괴다. 노예들은 정부의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면서 미얀마의 산림을 파괴했다. 그러자 이제 이 사업 때문에 삶의 터전을 잃은 마을 주민들이 노예 신세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다. 정부가 노예를 동원해 나무를 벌목하면 티크 숲은 파괴된다. 그리고 목재 판매로 얻은 수익은 땅 파괴에 반대하는 소수민족들을 공격하는데 필요한 자금으로 쓰인다. 인권 침해가 곧 환경 침해로 이어지며, 그 역도 성립하는 것이다.


남아시아 강제 성매매 여성 중 많은 수가 어린 나이에 인신매매된다. 에이즈에 걸릴까봐 사춘기 이전의 어린 여자아이를 찾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미성년 소녀들은 생물학적인 이유 때문에 보호기구 없이 성관계를 가질 경우 외상을 입거나 성병에 감염될 가능성이 특히 크다.

어린 여성의 경우, 생식기 내부에 형성된 점막질 표면의 영역이 얇고 덜 성숙해 외상이나 감염 위험이 높다. 게다가 강제 삽입이 이뤄지는 난폭한 성행위는 작고 덜 성숙한 질과 자궁경부에 외상을 입히기 더더욱 쉽다. 게다가 알코올과 같은 가벼운 수렴성 용액으로 질 세척을 해 질을 건조시킬 것을 강요받기도 한다. 건조된 질 점막은 약한 충격에도 찢어지기 쉽다. 이로 인해 성명에 걸리기 쉬워지고 HIV에 감염될 위험성 또한 커진다. 성병에 감염된 성매매 아동들은 HIV에 감염될 확률이 4배로 높아진다.


지금 지구상에 '노예'로 불려야 마땅한 사람들이 2700만명이나 존재한다는 기본 '팩트'를 출발점으로 삼는 것은 스키너의 책을 비롯해 노예제에 대한 대부분의 글들이 다 마찬가지다. 지구상에 유사 이래 이렇게 많은 노예들이 존재한 적은 없었다. 지구상에 지금처럼 인구 자체가 많았던 적이 없었으니까. 

이 책의 저자들은 "노예의 수는 유례 없이 많지만 노예가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적다"고 말한다. 현대의 경제에서 사실 인간의 노동력이 차지하는 비중은 적다.
 목화 따위를 키우는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노예 노동력을 동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전세계 목화 시장 규모에서 노예 노동력으로 생산된 목화의 비중은 굉장히 적다. 이를 테면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가 그토록 많은 까닭은?

핵심은, 노예를 구하고 부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사상 유례없이 낮아졌다는 것이다. 유럽 각국이 노예무역에 매달릴 때에 비해, 지금의 노예들은 운반비를 비롯한 모든 비용이 턱없이 적게 들어간다! 세상에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사람 수가 너무 많기 때문, 사람 값이 그만큼 싸졌기 때문이다. 비록 비중은 얼마 안 되지만, 워낙 노예가 싸기 때문에 이 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노예를 부리는 이점이 생긴다. 하지만 뒤집어 말하면, 노예제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그렇게 작기 때문에 우리는 그 값싸고 양 많은(!) 노예들을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공급망의 모든 단계에 있는 이들이 제품 생산에서 노예제를 이용하지 않기로 한다면 노예 착취 농장이나 의류공장에 노예제 반대 활동가들을 파견하는 것은 쉬워진다. 코코아 협약은 업계가 인권단체, 소비자단체, 노동조합과 협조하면 노예제를 사라지게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예는 마틴 기타 회사다. 이 회사는 환경단체들과 협조해 최고급 기타 제작에 필요한 마호가니 나무를 노예 없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벌목하도록 하고 있다. 이 사안은 벌목장에서부터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 것이다.

또다른 예로 러그마크 재단(책에는 러그마크 재단으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굿 위브 인터내셔널'로 바뀌었음)을 들 수 있다. 1994년 설립된 국제 자선단체인 이 재단은 남아시아 카펫 공장들을 조사해 인증서를 발부한다. 인증을 신청할 때 제조업자들은 열네 살 이하의 아동은 고용하지 않으며 성인 직조공들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할 것임을 약속한다. 가내 공장의 경우 보조자로 고용된 아이들이 정규교육을 받게 해야 하며 직기 소유주 자신의 아이들만 일할 수 있다. 
러그마크 라벨에는 고유의 일련번호가 부착돼 어떤 카펫이든 제조된 직기에서부터 매장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유럽과 미주의 카펫 수입회사들은 카펫 가격의 약 1%를 러그마크 재단에 지불한다. 이 돈은 카펫업계에서 노예로 일하다 해방된 아이들을 위한 학교와 재활 프로그램을 지원하는 데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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