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 -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기시모토 미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김현영·문순실 옮김 / 역사비평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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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더니... 가을 끝나고 겨울이 시작되면서 나의 독서는 끝장이라도 난듯이, 게으름만 늘었다. 책읽기도 리뷰 쓰기도 모두 귀찮아서 팽개치고 있었건만, 도저히 이 책은 칭찬을 해주지 않고서는 넘어갈 수가 없을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내내 나의 무지함을 꾸짖어야했고, 일본 학자들의 엄청난 학구열에 혀를 내둘렀다.

책은 일본의 중국사(명/청사) 전공자와 한국사 전공자, 두 사람이 각각 명-청과 조선 시대를 맡아서 근세의 여러 모습을 살펴보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나야 역사에 문외한이라서 이런 분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만 만일 '비교역사학'이란 분야가 있다면, 이 책은 필히 거기에 속한다. 명-청 시대와 조선시대를 교차 편집해서 보여주는데 서술 방식이 재미있고 내용도 알차다. 어느 정도 알차냐면-- 우리나라 국사교과서를 없애고 이 책으로 고교생들을 가르치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 대체 나는 우리 역사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던 것인지! 내 역사지식은 그러고 보면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정지된 것이나 다름없다. '고등학생 수준의 지식'이 뭐냐면, 결국 이런거다. '태정태세 문단세'를 외울 수 있고, 훈민정음 창제 연도를 알고 있고... 뭐 이런 식의 단순암기 수준 말이다.

책은 내가 '연도 외우기' 식으로만 알고 있던 것들 뒤에 숨겨진 배경, 역사적 의의를 설명해준다. 때로는 조선시대 어느 양반의 족보를 사례로 들어 양반사회의 진면목을 들춰내고, 때로는 중국-조선-일본-동남아를 오가는 왜구의 움직임을 종횡으로 연결한다. 구텐베르크에 앞선다는 고려의 금속활자는 어떤 의미/한계를 갖고 있는지, 이른바 '당쟁에 빠진 조선인'에 대해 조선인 스스로는 어떻게 보았는지-- 극히 협소한 '민족주의'를 강조하는 바람에 정작 자긍심은 커녕 최소한의 이해조차도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리는 역사교육을 6년간 받느니, 차라리 이 책 한권을 읽는 편이 낫겠다. 농담 아니다.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까지 포함해서)의 연구는 어떤 수준으로 진행돼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책 읽으면서 참 많이 쪽팔렸다.

쪽팔리기만 했나? 재미도 있었지... 책 참 재미있다. 딱히 어떤 '사관'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역사를 조명하는 일본 중앙공론사 시리즈의 일부분인 만큼 한정된 시대에 대한 개론적인 서술을 하고 있는 것이어서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곁들여진 삽화와 그림에서도 성의가 철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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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2-10 1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엄청난 감동지수가 느껴지는 리뷰로군. 에잇, 읽을 책 리스트만 늘어나면 뭐하누...(역시 게으름병과 바쁨병에 시달리고 있는 중이라...-,.-)

딸기 2004-12-1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게으름병+시한부말기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데...

마냐 2004-12-10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시한부말기증후군이 곧 바쁨병으로 바뀌리라는 게 짐작되니...어찌 '물귀신의 기쁨'이 없을소냐.. 나, 말년병장 완전 꼬여서...박민캡 모시구, 암7의 마와리처럼 구르고 있다 요즘...ㅠ.ㅜ

숨은아이 2004-12-10 2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사고 싶다. 흑흑.

딸기 2004-12-1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셔요 ^^

panda78 2004-12-13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음... 딸기님의 리뷰들도 정말... 그냥 넘어가질 못하게 만드는군요.. 쩝.. 비싸 보이는데...;;

딸기 2004-12-1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주 쉽게 읽을 수 있으니깐 심심풀이로 한번 보세요. 재밌어요.

딸기 2004-12-13 0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근데...



판다님이 나타났다!

로즈마리 2004-12-15 15: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읽어봐야 겠네요. ^^ 딸기님의 글에서 풍기는 그 열성(?)이 느껴집니다.

딸기 2004-12-15 17: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요샌 열성???이고 뭐고... 서평도 게을러져서 통 안 쓰게 되더라고요.

연말을 앞두고... 무종의미..가 되려고 해요
 

"책, 책! 언제나 책이네요, 할아버지! 언제나 아시게 될까?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이 세상은 우리도 그 일부이고,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이 지나치지 않은 세상이란 것을? 자, 보세요!" 그녀는 창을 크게 열어젖히고 달빛이 비치는 정원의 검은 그림자 사이로 반짝이는 흰 빛을 우리에게 보도록 했다. 정원에는 약간 찬 여름밤의 바람이 불었다. "보세요! 저것이 이 시대 우리의 책이예요. 두 분!"


윌리엄 모리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News from nowhere,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 미래의 낙원에서 책을 평가절하해버린 모리스의 통찰력. 저것은 책 속의 엘렌이 내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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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붕잡억 -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 지식인의 회고
계선림 지음, 이정선,김승룡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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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좋은 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다 읽고난 뒤 "아, 재밌었다!" 하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책장을 덮은 뒤에도 생각할거리가 뒤통수에 달라붙은듯 마음이 묵지근해지는 그런 책도 있다.
이 책은 분명히 후자 쪽이다. 책을 집어들었던 초반에는 '지지부진한 노인네 잔소리같으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요점만 간단히' 하지 않고서 질질 끄는 것이 맘에 안들기도 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 '노인네 잔소리'가 마음에 걸려서 읽는 속도는 오히려 느려졌다. 다 읽은 뒤에는 뒤통수에 달라붙은 '생각거리'의 무게가 제법 무거워서 주체를 못하게 됐다.

우붕잡억. 문혁때 지식인을 잡아가두고 이른바 '노동개조'를 시켰던 헛간(외양간)을 우붕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붕에 갇혔던 저자가 우붕시절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낱낱이 드러내보이는 것이 이 책, '우붕잡억'이다. 책에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 지식인의 회고'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문화대혁명, 그리고 '지식인'. 책의 화두는 이 두 가지다. 둘 중 어느 하나도 가벼운 것이 아닐진대, 아흔을 넘긴 '노지식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정제되고 또 정제되어, 천근의 무게를 가진다. 독일에서 인도학을 공부하고 베이징대에서 동양학부 교수로 평생을 보낸 저자 계선림은 중국에선 꽤 유명한 '지식인'인 모양이다. 자꾸만 '지식인'이라는 말에 작은따옴표를 치게 되는데, 책의 3분의2 정도는 문혁 당시의 '인간 학대'를 서술하고 있지만 뒷부분 3분의1은 '지식인론'에 촛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문혁 당시 '사냥감'이 됐던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잔혹함만을 보자면, '사람아 아 사람아' 같은 소설을 읽는 편이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책 '우붕잡억'은 제목에서 보이듯이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시시콜콜한 우붕의 기억을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고, 또 거의 모든 단락이 반어법으로 구성돼 있어서 보다가 질리기 십상이다.
저자의 진면목, 그러니까 '노인네 잔소리'가 가슴을 치며 머리속에 들어오는 것은 뒷부분에 가서다. 저자는 '중국의 지식인'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지식인의 존재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체 지식인이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체면'과 '기개'같은 개념을 들어 중국 지식인의 역사적 기능을 소개한다. 노학자 스스로는 '정치적 감각이 없고 아둔했다'고 하면서도 지식인과 정치/사회를 분리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지식인의 존재의미 중에 '저항'이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베이징대 부총장과 이러저러한 학술단체의 우두머리를 맡았다고 하는데, 저자의 글은 다분히 고전적이다. 문장도 고전적이고, 생각도 고전적이다. 일종의 '선비정신'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아흔이 넘도록 그런 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의 글이기에 책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벼운 글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이의 글이 묶여져나온다는 것만 해도 반가운 일이다

문혁에 대한 회고도 회고이지만, 뒷부분에 실린 저자의 '지식인론'은 학문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법한 글이고, 더불어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띤 역자들의 '후기'도 읽어볼 만하다. 번역이건 편집이건 몹시 꼼꼼하게 성의를 기울인 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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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반지 - 그는 짐승, 새, 물고기와 이야기했다
콘라트 로렌츠 지음, 김천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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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재미있는 동물이야기'이다. 저자가 콘라트 로렌츠이고 보면, 그닥 두껍잖은 책이지만 뭔가 알짜배기 내용을 기대하는 것이 독자로선 당연한 일.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심오한 철학이 있냐고? 이 책을 펼치는 독자라면, '비교행동학의 창시자' 혹은 '노벨상 수상자'라는 로렌츠의 경력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읽기를. 이 책은 로렌츠가 노벨상을 받기 훨씬 전에 쓰여진 것이다.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로렌츠의 모습은 '두리틀 선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도나우강 근처의 어느 유럽식 주택, 집안에는 개와 햄스터가 돌아다니고 지붕 처마밑에는 갈가마귀 무리, 서재에는 거위와 기러기가 들락거린다. 엉망진창인 집의 한구석에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과학자' 아저씨가 지저분하게 털이 뜯겨져나간 카페트를 밟고 서서 어항속 물고기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다-- 이 정도면 책의 분위기가 전달되려나. 책은 로렌츠가 '집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면서 관찰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들로 구성돼 있다. 로렌츠는 친절한 동물가게 아저씨처럼 이 동물은 어떻고 저 동물은 어떻고, '집에서 기르려면 이런 애완동물을 골라라'는 충고까지 해주면서 다양한 동물친구들을 소개한다. 이런 로렌츠의 모습은 마법의 반지를 가지고 동물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솔로몬 왕보다는 수의사 두리틀 선생을 더 닮았다.

로렌츠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상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책을 읽기전 내 눈에는 뭐랄까, 색안경 같은 것이 한꺼풀 씌워져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로렌츠의 '나치 부역' 경력이다. 이 책은 로렌츠가 알텐베르크라는 곳에 살 적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1937년 로렌츠는 실업자였다. 가톨릭성향의 빈 대학은 종교적인 이유로 동물본능에 대한 연구를 금지했다. 그는 자비로 새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알텐베르크로 내려갔다. 그리고 독일 정부에 연구비를 신청했다." 매트 리들리는 <본성과 양육>에서 '나치토피아'라는 제목으로 로렌츠의 나치 경력을 들춰내고 있다. "1938년 6월 오스트리아 합병 직후 로렌츠는 나치당에 가입해 인종차별 정책에 일조했다. 그는 즉시 동물행동에 관한 자신의 연구가 나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연설하고 글로 쓰기 시작했다. 1940년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후부터 1944년 러시아 전선에서 체포되기까지 몇년동안 그는 일관성 있게 과학적으로 입증된 인종정책', '국민과 민족에 대한 인종 개량',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들의 제거' 등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주장했다."(<본성과 양육>에서 인용)

<솔로몬의 반지>에는 나치는 커녕, 정치적인 어떤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도 나와 있지 않다. 주위 사람들에게 미친사람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물에 몰두한 어떤 학자와, 그의 동물친구들 얘기만 나와 있을 뿐이다. '학문은 학문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잖아? 책을 덮으면서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이 재미난 에세이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믿어야할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로렌츠가 밝혀낸 개념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물의 '각인'이라는 것이다. 동물원의 공작이 하필 바다거북한테 필이 꽂혀 어긋난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실은 이 책에 나와 있는 것이다. 한데 리들리의 설명을 빌자면, 로렌츠는 자신을 엄마처럼 쫓아다닌(잘못된 '각인'의 실제 사례) 러시아 오리를 몹시 끔찍스러워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는 등장하는 '모든' 동물에 대한 로렌츠의 애정이 철철 넘쳐나고 있어서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어찌됐든 책은 굉장히 재미있다. 로렌츠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번역이 형편없지만, 전문과학자 겸 에세이스트로 활약했었다는 로렌츠의 이야기 솜씨는 대단하다. '닐스의 이상한 여행' 저리가라다(재밌게도 로렌츠는 이 동화를 책에서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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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12-0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굉장히 좋아하는데, 로렌츠가 나치에 부역했다고요? 충격... 그럼 전후에 사과라도 했나요?

바람구두 2004-12-0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콘라트 로렌츠의 책이네요. 헐헐...

딸기 2004-12-01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님 혹시 로렌츠 책 보신 것 중에 재미난 거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근데 ... 웃음소리가 바뀌었네요?

숨은아이님, 로렌츠는요 전후에 '사과'는 아니고요, 자기가 진짜로 나치즘을 신봉한 것은 아니고, 과학적 원칙을 굽히긴 했다, 이렇게 얘기했대요. 근데 로렌츠 사후에, 로렌츠가 훨씬 적극적으로 나치즘에 가담했던 것이 드러났다나요. 재미난 것은, 나치즘의 우생학은 로렌츠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거였고, 실제로 로렌츠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답니다.

바람구두 2004-12-0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제가 과학책인데, 읽었을리 없잖아요. 그 방면에 대해서만큼은 제가 딸기님에게 묻고 싶다고요. 콘라트 로렌츠에 대해서 알게 된 건 라이프에서 예전에 나왔던 자연사 시리즈 중에서 "동물의 행동"이던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 책에서 그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서 그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나치즘의 우생학이 로렌츠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는 건 딸기님 말씀이 맞을 겁니다. 그때만해도 로렌츠는 애송이 과학자였을 테니까요. 게다가 가는 길도 많이 다르고.... 하여간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었군요. 나한데 이런 책 좀 많이 소개해주지? 흐흐.

딸기 2004-12-0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흐흐'로 돌아왔군요 ^^

제가 보기엔 구두님도 인문사회과학, 음... 그러니까 '문과' 쪽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머리 회전방향을 잠시 돌리기 위해, 존 홀런드의 '숨겨진 질서'를 재미삼아 읽어보세요. 다른 과학책들하고도 사뭇 다르고, 문과쪽 책들하고는 전혀 다른 재미가 있거든요.

바람구두 2004-12-0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홀런드? 일단 콘라드 로렌츠도 읽고.... 그 책도 읽어보도록 할께요.

저보다는 딸기사마가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과학 분야에도 그렇게 관심을 가질 줄이야.... 김동춘 선생 책은 가능하다면 한 번 읽어보시고, 서평 올려주시길... 나야 김동춘 선생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라...(그렇다고 딸기사마가 다르다는 건 아니지만) 궁금해요.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고... 흐흐, 오늘은 학술세미나에 가서 꾸벅꾸벅 졸다가 이제 막 사무실로 돌아왔답니다. 오늘은 딸기사마 서재에서 농탕질치고 있군요, 흐흐.

딸기 2004-12-0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학술세미나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학술세미나, 하면 생각나는 기억.

회사 들어간 첫해. 그 다음해가 '쥐의 해'였거든요. 쥐...에 대해 쓰라는 지시를 받고, 쥐에 관한 학술회의에 갔지요. 어찌나 재미가 없던지...쯧쯧. 쥐에 대해 한바닥(지면 한 면을 몽땅) 쓰는데, 쥐와 관련된 민담, 쥐 토템(실제로 있어요), 쥐가 나오는 꿈, 쥐를 묘사한 그림과 조각 기타등등... 그런걸 다 긁어모아야 했답니다. ^^

김동춘선생 책을 전에 한권 읽어봤는데, 글의 논지가 명확하고 내용이 아주 좋았어요. 근데 ... '글'을 조금만 더 잘 쓰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글재주는 타고나는 거니깐 너무 과한 요구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나저나 지금은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많아서, 아마도 귀국한 뒤에나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람구두 2004-12-0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김동춘 선생은 사회학자 중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축에 속하는데... 무슨 글을 읽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건지...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가요. 글구, 소위 주제(야마)가 명확한 걸 좋아하는 경향은 저에게도 있지만, 기자들이 지닌 직업병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시압. 흐흐, 귀국 얼마 안 남았구랴. 내 선물도 하나 사다 주려나....?

딸기 2004-12-0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음... 김동춘선생 글 중에서 뭘 읽었더라... 아마도 '근대의 그늘'이 아니었던가 싶어요(제목은 정확하게 기억 안 나지만). 그분 글을 다시한번 꼭 읽어봐야겠네요.

근데 다 좋은데, 선물...은 대체 뭡니까. ^^ 지인들 선물로는 몽땅 가네보 클렌징 폼(뭔지 아우?)을 사갈 생각인데 그거라도 좋다면 하나 준비해 가지요. ㅋㅋ

바람구두 2004-12-0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건 싫어요. 흐흐. 그보다는 좀더 기념이 될만한 선물을 주시길...

욕심이 과한 건 알지만, 주려거든 좋은 걸 주고, 싫은 아예 주지 말아요.

그런다고 서운해할 사람도 아닌데...

딸기 2004-12-0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아무려면 제가 구두님한테 클렌징 폼 같은거 줄까봐요 ^^

(상상만 해도 웃기네요)
 
이미지의 삶과 죽음
레지스 드브레 지음, 정진국 옮김 / 시각과언어 / 1994년 11월
구판절판


덧없는 것에 대한 고뇌가 없다면 기억이란 것도 필요하지 않으리라.-28쪽

기술과 신념의 공동의 진화는 우리를 보이는 것의 역사 속에 세 시기들로 이끌어간다. 즉 마술적 시선과 미적 시선, 그리고 경제적 시선으로. 첫번째 것은 우상을 불러내고 두번째 것은 예술을, 세번째 것은 영상적 시각을 불러내었다. 비전 이상으로, 거기에 세계의 조직이 있다.-47쪽

그림으로 그려진 감각에는 언어적 등가물이 없다-54쪽

클로망 롯세, '회화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선 관객에 따라 그 스스로 의미가 된다.'-56쪽

이미지가 그 고유한 수단을 통해 인정받지 못하면 못할수록, 더욱더 그것을 말하게 할 해설자들이 필요해질 것이다.-59쪽

하나의 이미지는 영원하고도 결정적으로, '최선의 독해'가 불가능한 수수께끼이다.-66쪽

발터 벤야민이 '기술적 복제 가능성'으로 인한 그 소멸을 한탄했던 이 거룩한 분위기 즉 '아우라'는 그가 그렇게 염려했던 대로 사라져버린 것이 아니라 인격화되었을 뿐이다. 우리는 작품들을 더이상 우상화하지 않는 대신 예술가들을 우상화하고 있다.-71쪽

이미지는 모든 사람과 신이 만들어가는 하루하루마다, 크고 작은 비용을 들여가며 무의식적인 모방성향을 제공한다. 자기와 동일시하는 상상적 모델의 문제는 결코 새롭지도 또 서구만의 것도 아니다. 우리가 가정할 수 있는 것은 빙하기의 젊은 들소 사냥꾼이 벽화를 보았기 때문에 쓸데없이 만용을 부리는 위험스런 짓들을 했었으리라는 점이다.-128쪽

어째서 단테는 '중세의 시인'이며 단 일년 차이 밖에 없는 그와 동시대 사람은 벌써 '르네상스 화가'라고 불리는 것일까? 왜 뉴턴의 연속적, 도일적이며 동위체적인 공간이 이미 그보다 한세기 전에 원근법의 발견자들에게서 찾아지는 것일까? 어째서 프라고나르의 가벼운 화풍은 단지 궁전의 각도를 바꿔놓을 뿐인데도 그토록 깊게 앙시앙 레짐의 몰락을 알리고 있는 것일까? 왜 풍경화가 위베르 로베르으 폐허들이 혁명의 파괴들을 예고하는 것일까? 왜 터너는 열역학보다 먼저 불의 은유들을 그려 보이는가? 왜 큐비스트의 작품에서 관점의 해체가 기초적인 인문학적 주제의 성급한 소멸을 재촉하는 것일까? 왜 미래파는 문학이기 이전에 파시즘의 한 형태인가? 왜 1939년 이전에 막스 에른스트가 그린 방향감각을 상실한 도시들 속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윤곽이 어른거리는 것일까?
왜냐하면 감각적 이미지는 이 세상 속에서 메아리치며, '열등한' 에너지의 원천으로부터 자양을 취하며, 따라서 '우월한' 정신 활동보다 덜 감시받거나 더 반칙적이며, 더 자유롭거나 덜 통제받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더 멀리 그리고 더 낮게 포착하는 레이더를 만든다.-13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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