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로몬의 반지 - 그는 짐승, 새, 물고기와 이야기했다
콘라트 로렌츠 지음, 김천혜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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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그대로 '재미있는 동물이야기'이다. 저자가 콘라트 로렌츠이고 보면, 그닥 두껍잖은 책이지만 뭔가 알짜배기 내용을 기대하는 것이 독자로선 당연한 일.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 심오한 철학이 있냐고? 이 책을 펼치는 독자라면, '비교행동학의 창시자' 혹은 '노벨상 수상자'라는 로렌츠의 경력을 너무 의식하지 말고 읽기를. 이 책은 로렌츠가 노벨상을 받기 훨씬 전에 쓰여진 것이다.

책에서 만날 수 있는 로렌츠의 모습은 '두리틀 선생'과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도나우강 근처의 어느 유럽식 주택, 집안에는 개와 햄스터가 돌아다니고 지붕 처마밑에는 갈가마귀 무리, 서재에는 거위와 기러기가 들락거린다. 엉망진창인 집의 한구석에는 텁수룩한 수염을 기른 '전형적인 과학자' 아저씨가 지저분하게 털이 뜯겨져나간 카페트를 밟고 서서 어항속 물고기의 안부를 걱정하고 있다-- 이 정도면 책의 분위기가 전달되려나. 책은 로렌츠가 '집에서' 동물들과 함께 살면서 관찰한 내용을 담은 에세이들로 구성돼 있다. 로렌츠는 친절한 동물가게 아저씨처럼 이 동물은 어떻고 저 동물은 어떻고, '집에서 기르려면 이런 애완동물을 골라라'는 충고까지 해주면서 다양한 동물친구들을 소개한다. 이런 로렌츠의 모습은 마법의 반지를 가지고 동물들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는 솔로몬 왕보다는 수의사 두리틀 선생을 더 닮았다.

로렌츠의 명성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실상 책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다. 책을 읽기전 내 눈에는 뭐랄까, 색안경 같은 것이 한꺼풀 씌워져 있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로렌츠의 '나치 부역' 경력이다. 이 책은 로렌츠가 알텐베르크라는 곳에 살 적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1937년 로렌츠는 실업자였다. 가톨릭성향의 빈 대학은 종교적인 이유로 동물본능에 대한 연구를 금지했다. 그는 자비로 새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알텐베르크로 내려갔다. 그리고 독일 정부에 연구비를 신청했다." 매트 리들리는 <본성과 양육>에서 '나치토피아'라는 제목으로 로렌츠의 나치 경력을 들춰내고 있다. "1938년 6월 오스트리아 합병 직후 로렌츠는 나치당에 가입해 인종차별 정책에 일조했다. 그는 즉시 동물행동에 관한 자신의 연구가 나치 이데올로기와 어떻게 일치하는지를 연설하고 글로 쓰기 시작했다. 1940년 그는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후부터 1944년 러시아 전선에서 체포되기까지 몇년동안 그는 일관성 있게 과학적으로 입증된 인종정책', '국민과 민족에 대한 인종 개량', '도덕적으로 열등한 자들의 제거' 등의 유토피아적 이상을 주장했다."(<본성과 양육>에서 인용)

<솔로몬의 반지>에는 나치는 커녕, 정치적인 어떤 것을 암시하는 이야기도 나와 있지 않다. 주위 사람들에게 미친사람 소리를 들을 정도로 동물에 몰두한 어떤 학자와, 그의 동물친구들 얘기만 나와 있을 뿐이다. '학문은 학문이고 정치는 정치'라고 말하기엔 좀 그렇잖아? 책을 덮으면서 기분이 찝찝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이 재미난 에세이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믿어야할지 의심이 들기 때문이다. 로렌츠가 밝혀낸 개념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동물의 '각인'이라는 것이다. 동물원의 공작이 하필 바다거북한테 필이 꽂혀 어긋난 애정행각을 벌였다는 유명한 이야기도 실은 이 책에 나와 있는 것이다. 한데 리들리의 설명을 빌자면, 로렌츠는 자신을 엄마처럼 쫓아다닌(잘못된 '각인'의 실제 사례) 러시아 오리를 몹시 끔찍스러워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이 책에는 등장하는 '모든' 동물에 대한 로렌츠의 애정이 철철 넘쳐나고 있어서 진위를 확인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어찌됐든 책은 굉장히 재미있다. 로렌츠가 직접 그렸다는 삽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번역이 형편없지만, 전문과학자 겸 에세이스트로 활약했었다는 로렌츠의 이야기 솜씨는 대단하다. '닐스의 이상한 여행' 저리가라다(재밌게도 로렌츠는 이 동화를 책에서 인용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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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아이 2004-12-01 2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굉장히 좋아하는데, 로렌츠가 나치에 부역했다고요? 충격... 그럼 전후에 사과라도 했나요?

바람구두 2004-12-01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콘라트 로렌츠의 책이네요. 헐헐...

딸기 2004-12-01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님 혹시 로렌츠 책 보신 것 중에 재미난 거 있으면 추천 좀 해주세요.

근데 ... 웃음소리가 바뀌었네요?

숨은아이님, 로렌츠는요 전후에 '사과'는 아니고요, 자기가 진짜로 나치즘을 신봉한 것은 아니고, 과학적 원칙을 굽히긴 했다, 이렇게 얘기했대요. 근데 로렌츠 사후에, 로렌츠가 훨씬 적극적으로 나치즘에 가담했던 것이 드러났다나요. 재미난 것은, 나치즘의 우생학은 로렌츠와 상관없이 만들어진 거였고, 실제로 로렌츠의 영향력은 거의 없었답니다.

바람구두 2004-12-02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딸기님 제가 과학책인데, 읽었을리 없잖아요. 그 방면에 대해서만큼은 제가 딸기님에게 묻고 싶다고요. 콘라트 로렌츠에 대해서 알게 된 건 라이프에서 예전에 나왔던 자연사 시리즈 중에서 "동물의 행동"이던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그 책에서 그에 대해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어서 그 책에서 읽은 것이 전부입니다. 다만, 나치즘의 우생학이 로렌츠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는 건 딸기님 말씀이 맞을 겁니다. 그때만해도 로렌츠는 애송이 과학자였을 테니까요. 게다가 가는 길도 많이 다르고.... 하여간 덕분에 좋은 책 알게 되었군요. 나한데 이런 책 좀 많이 소개해주지? 흐흐.

딸기 2004-12-0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시 '흐흐'로 돌아왔군요 ^^

제가 보기엔 구두님도 인문사회과학, 음... 그러니까 '문과' 쪽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머리 회전방향을 잠시 돌리기 위해, 존 홀런드의 '숨겨진 질서'를 재미삼아 읽어보세요. 다른 과학책들하고도 사뭇 다르고, 문과쪽 책들하고는 전혀 다른 재미가 있거든요.

바람구두 2004-12-02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존 홀런드? 일단 콘라드 로렌츠도 읽고.... 그 책도 읽어보도록 할께요.

저보다는 딸기사마가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과학 분야에도 그렇게 관심을 가질 줄이야.... 김동춘 선생 책은 가능하다면 한 번 읽어보시고, 서평 올려주시길... 나야 김동춘 선생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는 인간인지라...(그렇다고 딸기사마가 다르다는 건 아니지만) 궁금해요. 이 사람은 어떤 생각을 할까 하고... 흐흐, 오늘은 학술세미나에 가서 꾸벅꾸벅 졸다가 이제 막 사무실로 돌아왔답니다. 오늘은 딸기사마 서재에서 농탕질치고 있군요, 흐흐.

딸기 2004-12-02 1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 학술세미나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학술세미나, 하면 생각나는 기억.

회사 들어간 첫해. 그 다음해가 '쥐의 해'였거든요. 쥐...에 대해 쓰라는 지시를 받고, 쥐에 관한 학술회의에 갔지요. 어찌나 재미가 없던지...쯧쯧. 쥐에 대해 한바닥(지면 한 면을 몽땅) 쓰는데, 쥐와 관련된 민담, 쥐 토템(실제로 있어요), 쥐가 나오는 꿈, 쥐를 묘사한 그림과 조각 기타등등... 그런걸 다 긁어모아야 했답니다. ^^

김동춘선생 책을 전에 한권 읽어봤는데, 글의 논지가 명확하고 내용이 아주 좋았어요. 근데 ... '글'을 조금만 더 잘 쓰시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글재주는 타고나는 거니깐 너무 과한 요구인지 모르겠지만요. 그나저나 지금은 사놓고 안 읽은 책들이 많아서, 아마도 귀국한 뒤에나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바람구두 2004-12-04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 김동춘 선생은 사회학자 중에서 글을 가장 잘 쓰는 축에 속하는데... 무슨 글을 읽고 그런 얘기를 하는 건지... 나로서는 잘 이해가 안가요. 글구, 소위 주제(야마)가 명확한 걸 좋아하는 경향은 저에게도 있지만, 기자들이 지닌 직업병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시압. 흐흐, 귀국 얼마 안 남았구랴. 내 선물도 하나 사다 주려나....?

딸기 2004-12-04 1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음... 김동춘선생 글 중에서 뭘 읽었더라... 아마도 '근대의 그늘'이 아니었던가 싶어요(제목은 정확하게 기억 안 나지만). 그분 글을 다시한번 꼭 읽어봐야겠네요.

근데 다 좋은데, 선물...은 대체 뭡니까. ^^ 지인들 선물로는 몽땅 가네보 클렌징 폼(뭔지 아우?)을 사갈 생각인데 그거라도 좋다면 하나 준비해 가지요. ㅋㅋ

바람구두 2004-12-04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건 싫어요. 흐흐. 그보다는 좀더 기념이 될만한 선물을 주시길...

욕심이 과한 건 알지만, 주려거든 좋은 걸 주고, 싫은 아예 주지 말아요.

그런다고 서운해할 사람도 아닌데...

딸기 2004-12-04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하하 아무려면 제가 구두님한테 클렌징 폼 같은거 줄까봐요 ^^

(상상만 해도 웃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