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는 안데르센의 동화를 좋아하나?"
그가 진지하게 물었다.
"나는 마르코 보보치카가 번역한 책을 읽었을 때 사실 전혀 이해하지를 못했어. 그런데 십년이 지난 후 그 책을 다시 읽으니까 안데르센이 매우 외로운 사람이었다는 걸 아주 분명히 느낄 수 있었지. 나는 그 사람의 인생이 진짜로 어땠는지 몰라. 내 생각에 그는 방탕하게 생활했고 여행을 좋아했던 것 같아. 하지만 나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혼자였어.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거지. 비록 그것이 잘못된 것일지라도 말이야. 그는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고 생각했던 거야. 그러나 실제로 아이들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을 뿐 아니라 뭘 원해야 하는지도 모르지."

그를 보면 평생 동안 손에 지팡이를 쥐고 수천마일을 걸어 수도원을 찾아 한 성인의 유골을 보고 또 다른 것을 찾아다니는 순례자가 떠오른다. 철저하게 집도 사람도 물건도 소유하지 않는 순례자.
그의 세계는 자신을 위한 것도 하느님을 위한 것도 아니다. 그는 습관적으로 신에게 기도하지만 그 내밀한 영혼은 신을 싫어한다. 왜 신은 그 같은 사람을 이 세상 끝으로 내모는 것일까? 무슨 목적으로?
레프 니꼴라예비치 같은 사람은 길가의 쭉정이, 돌부리, 나무뿌리와 같다. 사람들은 길을 가다 그것에 걸려 넘어진다. 심지어는 그 것에 깊은 상처를 입기도 한다. 사람들은 그같은 사람이 없어도 그럭저럭 잘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는 점, 혹은 전혀 다른 세계를 보고 놀라는 일은 즐겁다.

그가 읽어보라고 건네준 일기에서 기이한 경구를 보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신은 나의 욕망이다"
오늘 그에게 일기를 돌려주면서 나는 그 뜻을 물어보았다. 그는
"완성되지 않은 생각이지"라고 말하면서 눈을 가늘게 뜨고 일기장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의 존재는 그를 알고자 하는 나의 욕망이다...아니, 그게 아니지."
그는 웃으면서 일기장을 돌돌 말아 윗도리의 큰 주머니에 넣었다. 하느님과 그의 관계는 대단히 이상하다. 때때로 '하나의 굴 속에 있는 두 마리의 곰'을 생각나게 한다.

"왜 하느님을 믿지 않나?"
"나는 신앙이 없습니다, 레프 니꼴라예비치."
"그건 사실이 아니야. 천성적으로 자네는 믿는 사람이고 하느님 없이는 잘 버텨낼 수가 없네. 자네도 언젠가는 깨닫게 되겠지. 자네의 불신은 고집에서 오는 걸세. 자네는 상처를 입었거든. 사랑과 마찬가지로 믿음에도 용기와 대담성이 필요해. 자신에게 '나는 믿는다'고 말해야 해. 그러면 모든 것이 잘될 걸세.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나타나 자네에게 설명하고 자네를 끌어당기겠지. 자네는 많이 사랑하고 있지만 신념이 사랑보다 더 클 뿐이네.
여인을 사랑하게 되면 틀림없이 그 여인이 세상에서 최고의 여인이겠지.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 최고의 여인과 사랑하는 거라네. 그게 믿음이야. 믿지 않는 사람은 사랑을 못해. 오늘 사랑에 빠졌다가 내년에 또다른 여인과 사랑에 빠지겠지. 그런 사람의 영혼은 불모의 삶을 사는 떠돌이야. 그건 좋지 않네. 그렇지만 자네는 믿는 자로 태어났으니 자신을 부정하려고 해보았자 소용이 없네. 글세, 자네는 아마 아름다움에 대해 말하겠지. 그런데 무엇이 아름다움인가? 가장 높고 가장 완전한 하느님이지."
그는 이 주제에 대해 나에게 거의 말한 적이 없어서 그 진지함과 갑작스러움으로 나는 압도되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리를 끌어올리고 소파에 앉아 승리의 미소를 지으면서 손가락을 흔들며 말했죠.
"자네는 침묵으로 여길 빠져나가진 않을 걸세. 그렇지 않을 거야."
그리고 하느님을 믿지 않는 나는 그를 무슨 이유인지 매우 조심해서 약간 수줍어하며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그를 바라보면서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하느님 같아'.

...내 영혼 속에는 개가 울어대고 불행한 예감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문이 막 도착했고 그러한 예감은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최고의 영혼들이 슬픔에 잠겨있어야 할 이 때, 영혼이 텅 빈 혐오스런 사람들이 그를 향해 경배한다면 그 얼마나 큰 해악이겠습니까. 사람들은 집에서 '전설을 창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게으름뱅이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사람들은 성인을 만들어냅니다.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은 오랫동안 영웅을 갈망해 왔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고통이 줄어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욕망하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존재, 즉 경건한 인간과 성인의 삶을 창조합니다. 확실히 니꼴라예비치는 위대하고 경건합니다. 그는 미치게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인류 전체를 위한 사람입니다.
...나는 니꼴라예비치를 성인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죄악의 세계, 우리 각각의 마음에 더 가까운 죄인으로 놔두어야 합니다.
...그가 관에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해봅니다. 그는 시냇물 바닥에 매끄러운 돌처럼 누워있고, 회색 수염 속에는 고즈넉하고 신비스러운 미소가 조용히 숨겨져 있겠지요. 그리고 힘든 일을 다 마친 손은 평화롭게 고이 겹쳐져 있겠지요. 그의 예리한 눈이 떠오릅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눈이지요. 그 손가락이 움직임은 마치 허공에서 무언가 영원한 것을 만들어내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의 말과 농담, 그가 가장 좋아하던 농부의 말투, 교묘히 대답을 회피할 때의 목소리. 그는 얼마나 대단한 생명력을 가졌고, 얼마나 비인간적일 만큼 영리했던가요.
...구름의 그림자가 돌 사이를 물 흐르듯 지나가자 돌과 함께 그 노인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 했습니다. 파도에 마모되어 둥글어진 큰 돌은 해초로 덮여 있었습니다. 니꼴라예비치 역시 살아있는 오래된 돌처럼 보였습니다. 돌, 풀, 바닷물, 조약돌에서부터 태양에 이르기까지 모든 우주만물의 시작과 끝을 아는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바다는 그의 영혼의 일부이고 그 주변의 모든 것은 그로부터 나온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 노인의 꿈꾸는듯한 부동성에서 나는 운명적이고 마술적인 기운을 느꼈습니다. 그 기운은 마치 그의 발 아래에서 서치라이트처럼 바다의 푸른 빈 공간으로 퍼져나가는 것 같았습니다. 니꼴라예비치의 집중력이 파도를 밀려왔다 밀려가게 하고, 구름 그림자의 움직임을 조절하고 돌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갑자기 정신이 멍해진 나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가능해. 그가 일어나서 손으로 주술을 걸면 바다는 투명한 돌이 되고 돌은 파도치며 소리칠거야. 주변의 모든 것들이 생명체가 되어 여러 목소리로 니꼴라예비치에게 말을 걸거야."
당시 내가 생각한 것보다는 내가 느낀 것을 표현하기가 더욱 힘들군요. 내 영혼의 기쁨과 두려움이 하나의 행복한 생각으로 결합되었습니다.
"이 사람이 여기 살고 있는 한 나는 지구의 고아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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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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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도시, 탕헤르. 그곳에 가보고 싶다. 나처럼 탕헤르에 가고파하던 어린 친구가 있었다. 이제는 더이상 어리지 않은, 어쩌면 나보다 훌쩍 커버렸을 그 친구는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다. 친구에게서 온 엽서 한 장에는 고비사막의 낙타들이 있었다. 그 다음 엽서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였다. 무함마드 진나 알리가 파키스탄 건국을 선포했던 라호르를 들러 페샤와르에 도착했다고 했다. 

우리들 주위로 백악질의 야산에 층층이 쌓아올려진 도시 탕헤르가 그 수많은 창문에 불을 켰다. 지평선 저쪽에는 지브랄타르 바위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의 오른쪽에는 지중해의 고요한 물 위로 달이 떠올랐다. 왼쪽에는 마지막 석양빛이 잠겨드는 대서양의 거친 물결. 에드몽 샤를로가 알제리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그가 겪은 그 수많은 지진들, 특히 그 자신은 기억도 할 수 없지만, 그의 부모가 정원에서 져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집이 무너져 어린 그의 요람을 덮쳤던 첫번째 지진 이야기를 막 들려주었다. 그는 또한 구름 떼처럼 몰려들던 마지막 메뚜기떼들의 재난도 경험했다. 기이하게도 그의 기억에 깊이 아로새겨진 것은 그 두 가지 재난의 무서운 소리였다. 지진은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한, 대지 전체를 뒤흔드는 저 근원적인 소리로 노호했고 굵은 메뚜기떼들은 나무를 잎사귀 하나 없이 발가벗기면서 무수히 성난 듯 달려들어 어지럽게 탁탁 튀는 소리를 냈다. 
 
친구의 엽서를 통해 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뉴스에서만 접했던 페샤와르의 야산을 보는 것 같았고, 그 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안나푸르나에 올라간다는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대체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로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탕헤르에서는 이상하게도 서쪽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자신의 근원에 고집스레 충실하기 위하여 자꾸만 대서양 쪽으로는 등을 돌리려고 애를 쓴다고 했다. 이미 율리시즈는 6일 동안 사나운 태풍 속에서 표류하며 '세상 끝으로 떠내려가다가' 마침내 칼립소의 동굴에 이르렀었다. 빅토르 베라르는 그 동굴이 바로 여기서 지척인 세우타 근처임을 밝혀낸 바 있다. 세우타의 민물은 '오디세이'에 언급된 네 줄기 샘에서 나오는 것이다. 순수한 지중해 사람들에게 이 서쪽의 머나먼 끝은 불길한 구석이 없지 않은 곳이다. 헤라클레스가 그의 열두가지 영웅적인 사업을 완수한 헤스페리데스 정원 역시 이 곳에서 멀지 않은 릭수스-나중에 라라슈가 된-에 있다고 샤를로는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끝으로 그는 이 땅의 마지막 수수께끼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이번에는 산악지방에서 잇었던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부터 몇년 전 우아르자자트 남쪽 드라아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던 작은 유태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그 마을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종교서적 필사본들이 가득찬 도서관과 함께 그야말로 고스란히 증발해버린 것이 그것이었다.

친구는 테란과 이스파한을 거쳐 다마스커스로 갔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다마스커스라니. 테란, 이스파한, 다마스커스. 이런 도시들과 탕헤르, 그런 이름들을 둘이 같이 꼽아보며 즐거워했던 적이 있었다. 향료 냄새가 폴폴 풍겨오는 것 같은, 다마스커스.

열에 들떠있고 사향 냄새가 풍기는 광란하는 도시, 여행자의 어깨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시니컬한 도시. 너무나도 유명한 제마 엘 프나 광장은 마치 거대한 상설 곡마단같이 군고기 장수들, 광대, 곡예사, 점쟁이, 이야기꾼, 이 봅는 사람, 대마초장수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나의 시야는 내 옆에 있는 천재적인 미국 사진작가 아더 트레스 덕분에 더욱 밝고 깊어졌다. 그는 가는 곳마다 우리들의 발 아래서 온갖 형상들과 장면들을 불쑥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사진작가의 부름에 응하고 있었으므로 잔혹하고 광적인 양식에 있어 서로 닮은 것이었다.

미셸 투르니에는 모로코의 마라케슈를 이야기한다. 내겐 다마스커스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사향 냄새가 풍기는 도시, 여행자의 어깨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시니컬한 도시라니.

이리하여 고객은 그의 은밀한 꿈인 알 카포네와 일치하도록 보르살리노 모자를 눈 밑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두아니에 루소의 그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만 같은 시카고의 뒷골목에서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으로 차린다. 그렇지 않으면 인조 표범 가죽으로 기운 원시인 치마를 두르고 칡넝쿨과 고사리가 우거진 무대를 배경으로 박제 사자와 마분지로 만든 표범 사이에서 가슴을 내밀고 으스대는 타잔이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천일야화의 왕자가 되어 비단과 보석으로 몸을 감싼 채 요염한 여인들 가득한 특석 한가운데서 군림한다. 이런 모든 것이 여간 진지하고 심각하고 엄격한 것이 아니다. 여긴 시장바닥이 아니며 꿈을 가지고 장난치는 법이 아니니까 말이다……

친구의 계속되는 여행기, 이스탄불과 카이로를 거쳐 에티오피아로 향해간다. 하라레를 거쳐 이번에는 수단이다. 수단의 피씨방에서 서울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그녀, 어떤 모습일까.

이 성스러운 과업을 완수하도록 운명이 그에게 점지해준 이 은퇴생활은 의미심장하다. 지브랄타르는 균형 잡히고 절도 있고 투명하고 한계를 아는 지중해 세계가 안개에 덮인 채 사납게 일어나는 저 가없는 대양을 바라보는 열쇠 구멍이 아니고 무엇인가?

파울로의 연금술사도 탕헤르에서 머뭇거리더니. 탕헤르는 ‘마법의 도시’인가보다. 낯선 도시들의 이야기를, 투르니에만큼 매력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나는 투르니에와, 벌써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친구의 손을 잡고 함께 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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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니에는 참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비법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딸기 2005-04-1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두근거리지요, 저런 글을 읽으면. :)
 

시는 실제적인 진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말이 많은 내 친구들에게

숲속에 태양이 침대 속에서 몸을 맡긴 여자의 아랫배와 같다고 말한다면 당신들은 내 말을 믿고 내 모든 욕망을 이해합니다. 비오는 날 수정이 언제나 사랑의 무료함 속에서 소리를 울린다고 말한다면 당신들은 내 말을 믿고 사랑의 시간을 지연합니다. 내 침대의 많은 가지 위에서 결코 동의를 표시하지 않는 새 한 마리가 집을 짓는다고 말한다면 당신들은 내 말을 믿고 나의 불안을 함께 나눕니다. 움푹 파인 샘물의 밑바닥에서 푸른 풀잎을 살포시 열며 강물의 열쇠가 돌아간다고 말한다면 당신들은 여전히 내 말을 믿고 더욱 잘 이해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 모든 나의 거리와 끝없는 거리와 같은 나의 이 조국을 솔직히 노래한다면 당신들은 이제 내 말을 믿지 않고 인간이 부재한 곳으로 떠나 갑니다. 당신들은 목적도 없이 걷기 때문에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세계를 변혁하기 위해서 인간은 뭉쳐야 하고 희망하고 투쟁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내 애정의 발길로 당신들을 인도하리라 나는 힘이 없지만 나는 살았고 나는 아직도 살고 있으니 나의 말은 아연히 당신들의 영혼을 사로 잡으리라 빛을 쌓아가는 우리의 형제들과 새벽녘 이슬이 맺힌 해초와 등심초와 당신들을 만나게 하기 위해, 당신들을 해방하기 위해.

/폴 엘뤼아르


한 친구 덕에 엘뤼아르를 기억의 박물관에 소장하게 된 것을 기념해서, 그리고 오랜만에 들어보는 <형제>니 <세계>니 <해방>이나 하는 책 속의 그 단어들이 전해주는 울림을 세포의 말단에서나마 다시 느낄 수 있었던 것을 기념해서. <시>라는 것, 언어라는 것을 우습게 여기면서 아무 말이나 쏟아뱉었던 것을 반성하면서, 글쓰는 것의 무게를 제대로 깨닫지도 못한 채 글 쓰는 행위와 그외 부수적인 것들을 숭상해온 것을 반성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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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5-03-27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엘뤼아르... 랭보와 더불어 제가 가장 사랑한 외국 시인들 가운데 한 명이군요.

하루(春) 2005-03-28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흐흐. 랭보는 들어봤는데, 엘뤼아르는 뭐하는 사람인지도 몰랐군요.
 

조그만 도시인 타리파의 경사지에는 예전에 무어인들이 건설한 오래된 요새가 있었다. 그 요새의 성벽 위에 앉으면 도시 전체가 내려다보였고, 바다 건너 아프리카 땅도 시야에 들어왔다.
살렘의 왕 멜키세덱은 그날 오후 요새의 성벽 위에 앉아 불어오는 레반터(동풍)를 맞고 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양 여섯 마리가 주인이 바뀐 갑작스러운 변화에 놀라 끊임없이 불안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먹이와 물 뿐이었다.
멜키세덱은 부두를 떠나는 작은 배 한 척을 보았다. 그 젊은 양치기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브라함에게서 십일조를 받은 후에도 그를 다시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의 일이었다.
신들은 욕망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신들에게는 자아의 신화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살렘의 왕은 마음속 깊이 청년의 행운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 젊은이는 곧 내 이름을 잊어버리겠지. 여러번 더 반복해주었어야 했는데. 저 젊은이가 언젠가 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살렘의 왕 멜키세덱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말이야...'
그러나 다음 순간 고개를 젓고는 뉘우치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내 주여, 아옵니다. 말씀대로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다는 것을. 하지만 늙은 왕이란 때로는 혼자서 우쭐해보기도 해야 하지 않겠사옵니까."


- 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 중에서


양치기는 가진 양의 십분의 일, 여섯 마리의 양을 멜키세덱에게 주고서 보물을 찾으러 떠난다. 피라미드 주변에 숨겨져 있다는 그 보물을 찾기 위해.
자아의 신화. 신의 이름으로 주어진 명령. 그렇지만 신은 결국 마음 속에 있다. 명령을 전해주는 자의 이름, <살렘의 왕 멜키세덱>. 성경에 나오는 멜키세덱은 단순한 메신저가 아니라, 훗날의 그리스도의 탄생을 암시하는 대사제다. 빵과 포도주로 축복해주는 사람, 그리고 신의 뜻을 전해주는 대가로 아브라함의 재물(십일조)을 받는 사람. 나는 어딘가에서 멜키세덱을 만났는데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인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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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 한 조각 내 인생과 아이 문제
엘리자베트 벡-게른스하임 지음, 이재원 옮김 / 새물결 / 2000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한 조각’ 내 인생. 이런 말들이 아주 무겁게 내 귀에 들어오고, 아주 가볍게 내 입에서 흘러나간다. 과연 어떤 걸까, 21세기 초입, 한국 사회에서, 한 아이를 기르고 있다는 것은.
책은 독일 여성학자가 독일(주로 동독) 사회의 변화와 독일 여성들의 출산/육아문제를 검토해 쓴 것이지만 전혀 남의 일 같지가 않다.

나는 20세기 한국의 여성이었다. 큰 고민 없이 결혼제도에 뛰어들었고 21세기 초에 아이를 낳았다. 좀 일찍 결혼했고, 좀 늦게 아이를 가졌다. 책을 읽으면서 뒤늦게 어머니가 된다는 것/아이를 키운다는 것에 대해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내 ‘모든’ 사랑을 아이에게 준다는 것이 ‘한 조각 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과연 내 인생은 내게 있어 ‘한 조각’ 뿐이며 아이가 내 ‘모든’ 사랑을 퍼부을만한 존재인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예스’라면 그건 어떤 이유에서이며 ‘노’라면 또 어떤 까닭에서인지, 나를 둘러싼 현실과 내 안의 고민들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으며 어떤 쪽으로 향해야 하는지.
질문의 목록은 길고 대답 또한 쉽게 나올만한 것들이 아니지만, 실은 이 책을 읽지 않아도 대한민국의, 아니 이 세상의 엄마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책에 던져진 분석들, 사례들, 문제의식,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면 누구나 몸과 마음으로 알고 느끼는 내용들이다. 책은 분량이 많지 않다. 논리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얼마든지 이해가 가능하게, 요점만 딱딱 짚었다. 책 두께에 비해 사례를 풍부하게 넣고 있다. 독일에서 언론에 보도된 사례라든가 생활사(生活史) 측면의 사료, 여성들 인터뷰를 다양하게 집어넣었다. 별로 편치 않은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면서 여성들 인터뷰나 사례들은 대충 건너뛰었다. 처음 몇 개의 케이스는 찬찬히 훑어봤지만 읽을 필요가 별로 없는 것들이었다. 인용된 글들이 무가치해서가 아니라, 남의 사례를 읽을 것도 없이 내 케이스를 생각하기만 하면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이 문제’라는 것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출산율 저하, 일하는 여성과 보육 문제, 양육과 여성의 자아실현, 교육문제 등등. 책에 나타난 ‘아이 문제’는 이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이지만 특히 저자가 역점을 두고 들여다본 것은 ‘아이와 사랑’이다. 육아지침서가 아니라 여성학 책이다. 엄마의 사랑이 아이에게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이 엄마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고 있다.
저자는 통일 독일에서 ‘출산율 저하’로 드러나는 ‘아이 문제’는 결국 사회적인 문제임을 언급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유럽 부르주아의 등장 이후 가족관계와 ‘모성’ 개념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살펴봄으로써 ‘근대적 모성’의 출현 과정을 추적한다(모성의 사회사). 간략한 역사적 고찰을 통해 독자는 ▲모성과 육아 개념은 상대적, 역사적인 것이며 ▲동시에 ‘사회적’인 것임을 확인하고 ▲“일하는 여자들은 아이를 안 낳으려고 한다”는 흔해빠진 어구가 어째서 ‘절반의 진실’일 뿐인지를 배우게 된다.

엄마들의 고민이야 더 말할 필요 없는 것이고. 책은 고민 많은 엄마들이, 자기들 고민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를 냉정하게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읽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래서? 언제나 질문은 여기로 향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낡은 처방’이라는 제목으로 말미에 짤막하게 몇 가지를 제안하는데, 정확히 말하면 ‘해결책’이 아니라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제안’ 정도가 될 것이다.
첫째, 여자들이 아이를 많이 낳게 하기 위한 ‘인구학적 차원의 출산장려 정책’은 자칫 여성들을 다시 집안 속으로 밀어 넣으려는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처방은 한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즉 여성의 삶의 변화들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의 대변혁과 함께 시작된 기나긴 역사적 발전의 최종 산물이라는 점이다.”
당연한 말씀. 근대, 그리고 산업사회는 당.연.히. 남자들 뿐 아니라 여자들도 변화시켰다. 사회 속에서 여성의 위치는 이 산업사회와 상호작용하며 유기적으로 변해온 것이다. ‘아이를 안 낳으니 노동력이 부족하다, 그러니 여자들이여, 노동을 그만두고 아이를 낳아라!’ 당연히 말이 안 된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식의 사고방식은 적어도 ‘공식 석상’에선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지만 택시 기사 아저씨들까지 동반 각성한 것은 아니다. “나아가 이러한 역사적 발전과 결부된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상적 가치는 여성 운동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가 부상한 것에 근거하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면 침 튀기며(간염 옮을라) 욕하는 남자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중요한 것은 아이는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엄마와 아이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해왔건, 지금 나는 내 아이를 사랑한다. 내 인생의 100%는 아니지만, 퍼센티지를 놓고 보면 내 사랑의 압도적인 부분이 아이를 향해 있을 것이다. 다만 아이를 향한 내 사랑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사랑 용량의 100%가 아니라는 점이고, 나는 그것이 100%가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 사랑 95% 나 자신에 대한 사랑 5%일지라도, 그 5%가 없다면 사람이 아닌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5%에 ‘이기심’이란 딱지를 붙일 수도 있겠고, 실제로도 그렇다. 이기심을 욕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가지 않았나?
내 ‘모든’ 사랑이 아이에게 가는 것은 아니지만 ‘한 조각’ 내 인생에 아이는 너무나 중요하다. 저자가 책에서 거듭 지적하듯 오늘날의 문제는 여성들이 출산을 기피하게 만드는 현실, 아이와의 아름다운 상호관계를 처음부터 포기하게 만드는 현실이다. 정작 낳아놓고 나면 엄마와 아이를 동시에 내리 눌러서 그 아름다운 관계가 성공을 향한 힘겨운 사다리타기로 변하게 만드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의 위력! “인간적인 원리에 따라 조직된 사회, 육아가 여성의 개인적인 문제라고 밀쳐내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와 아이의 성장을 돌보는 일이 일반적인 공적 우선권이 되는 사회- 이것이 페미니즘 속에 들어있는 비전이다.” 정말 ‘낡은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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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5-03-27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세기 말에 이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우리도 진화한 모양이네. 추천.

딸기 2005-03-27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도 그렇네요.
참... 저런 책 읽으면서 드는 생각이 뭐냐면, 사실 뭐가 문제인지, 뭐가 엄마들을 힘들게 하는지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거지. '낡은 처방'이 결국 가장 올바른 처방인데, 그것 또한 이미 알고는 있다는 거지. 그래서 답답한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