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긴 침묵 - 개정판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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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의 도시, 탕헤르. 그곳에 가보고 싶다. 나처럼 탕헤르에 가고파하던 어린 친구가 있었다. 이제는 더이상 어리지 않은, 어쩌면 나보다 훌쩍 커버렸을 그 친구는 지금 내가 있는 이 곳을 떠나 여행을 하고 있다. 친구에게서 온 엽서 한 장에는 고비사막의 낙타들이 있었다. 그 다음 엽서는 파키스탄의 페샤와르였다. 무함마드 진나 알리가 파키스탄 건국을 선포했던 라호르를 들러 페샤와르에 도착했다고 했다. 

우리들 주위로 백악질의 야산에 층층이 쌓아올려진 도시 탕헤르가 그 수많은 창문에 불을 켰다. 지평선 저쪽에는 지브랄타르 바위 위로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의 오른쪽에는 지중해의 고요한 물 위로 달이 떠올랐다. 왼쪽에는 마지막 석양빛이 잠겨드는 대서양의 거친 물결. 에드몽 샤를로가 알제리아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그가 겪은 그 수많은 지진들, 특히 그 자신은 기억도 할 수 없지만, 그의 부모가 정원에서 져녁식사를 하고 있을 때 집이 무너져 어린 그의 요람을 덮쳤던 첫번째 지진 이야기를 막 들려주었다. 그는 또한 구름 떼처럼 몰려들던 마지막 메뚜기떼들의 재난도 경험했다. 기이하게도 그의 기억에 깊이 아로새겨진 것은 그 두 가지 재난의 무서운 소리였다. 지진은 동굴 속에서 울리는 듯한, 대지 전체를 뒤흔드는 저 근원적인 소리로 노호했고 굵은 메뚜기떼들은 나무를 잎사귀 하나 없이 발가벗기면서 무수히 성난 듯 달려들어 어지럽게 탁탁 튀는 소리를 냈다. 
 
친구의 엽서를 통해 나는 한번도 가보지 못한, 뉴스에서만 접했던 페샤와르의 야산을 보는 것 같았고, 그 곳을 돌아다니고 있을 친구의 얼굴을 떠올리며 어쩐지 묘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엔 안나푸르나에 올라간다는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대체 어떤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일까. 나로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고 듣고 경험하고 있다니.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말하기를, 탕헤르에서는 이상하게도 서쪽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자신의 근원에 고집스레 충실하기 위하여 자꾸만 대서양 쪽으로는 등을 돌리려고 애를 쓴다고 했다. 이미 율리시즈는 6일 동안 사나운 태풍 속에서 표류하며 '세상 끝으로 떠내려가다가' 마침내 칼립소의 동굴에 이르렀었다. 빅토르 베라르는 그 동굴이 바로 여기서 지척인 세우타 근처임을 밝혀낸 바 있다. 세우타의 민물은 '오디세이'에 언급된 네 줄기 샘에서 나오는 것이다. 순수한 지중해 사람들에게 이 서쪽의 머나먼 끝은 불길한 구석이 없지 않은 곳이다. 헤라클레스가 그의 열두가지 영웅적인 사업을 완수한 헤스페리데스 정원 역시 이 곳에서 멀지 않은 릭수스-나중에 라라슈가 된-에 있다고 샤를로는 우리에게 상기시켜준다. 그리고 끝으로 그는 이 땅의 마지막 수수께끼 하나를 소개해주었다. 이번에는 산악지방에서 잇었던 신비로운 일이다. 지금부터 몇년 전 우아르자자트 남쪽 드라아 골짜기에 자리잡고 살던 작은 유태인 공동체가 있었는데 그 마을이 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한 종교서적 필사본들이 가득찬 도서관과 함께 그야말로 고스란히 증발해버린 것이 그것이었다.

친구는 테란과 이스파한을 거쳐 다마스커스로 갔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다마스커스라니. 테란, 이스파한, 다마스커스. 이런 도시들과 탕헤르, 그런 이름들을 둘이 같이 꼽아보며 즐거워했던 적이 있었다. 향료 냄새가 폴폴 풍겨오는 것 같은, 다마스커스.

열에 들떠있고 사향 냄새가 풍기는 광란하는 도시, 여행자의 어깨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시니컬한 도시. 너무나도 유명한 제마 엘 프나 광장은 마치 거대한 상설 곡마단같이 군고기 장수들, 광대, 곡예사, 점쟁이, 이야기꾼, 이 봅는 사람, 대마초장수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나의 시야는 내 옆에 있는 천재적인 미국 사진작가 아더 트레스 덕분에 더욱 밝고 깊어졌다. 그는 가는 곳마다 우리들의 발 아래서 온갖 형상들과 장면들을 불쑥 솟아오르게 만들었다. 그것들은 사진작가의 부름에 응하고 있었으므로 잔혹하고 광적인 양식에 있어 서로 닮은 것이었다.

미셸 투르니에는 모로코의 마라케슈를 이야기한다. 내겐 다마스커스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사향 냄새가 풍기는 도시, 여행자의 어깨를 부여잡고 놓지 않는 시니컬한 도시라니.

이리하여 고객은 그의 은밀한 꿈인 알 카포네와 일치하도록 보르살리노 모자를 눈 밑까지 깊숙이 눌러쓰고 두아니에 루소의 그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것만 같은 시카고의 뒷골목에서 기관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으로 차린다. 그렇지 않으면 인조 표범 가죽으로 기운 원시인 치마를 두르고 칡넝쿨과 고사리가 우거진 무대를 배경으로 박제 사자와 마분지로 만든 표범 사이에서 가슴을 내밀고 으스대는 타잔이 된다. 그것도 아니라면 천일야화의 왕자가 되어 비단과 보석으로 몸을 감싼 채 요염한 여인들 가득한 특석 한가운데서 군림한다. 이런 모든 것이 여간 진지하고 심각하고 엄격한 것이 아니다. 여긴 시장바닥이 아니며 꿈을 가지고 장난치는 법이 아니니까 말이다……

친구의 계속되는 여행기, 이스탄불과 카이로를 거쳐 에티오피아로 향해간다. 하라레를 거쳐 이번에는 수단이다. 수단의 피씨방에서 서울의 친구들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있는 그녀, 어떤 모습일까.

이 성스러운 과업을 완수하도록 운명이 그에게 점지해준 이 은퇴생활은 의미심장하다. 지브랄타르는 균형 잡히고 절도 있고 투명하고 한계를 아는 지중해 세계가 안개에 덮인 채 사납게 일어나는 저 가없는 대양을 바라보는 열쇠 구멍이 아니고 무엇인가?

파울로의 연금술사도 탕헤르에서 머뭇거리더니. 탕헤르는 ‘마법의 도시’인가보다. 낯선 도시들의 이야기를, 투르니에만큼 매력적으로 전해주는 사람을 아직 못 봤다. 나는 투르니에와, 벌써 1년 가까이 만나지 못한 친구의 손을 잡고 함께 여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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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4-13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셸 투르니에는 참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비법을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딸기 2005-04-13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두근거리지요, 저런 글을 읽으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