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냐님의 '아토피' 얘기를 읽다가.

요새 친하게 지내는 집 아이가 극심한 알러지가 있다. 우유, 쇠고기, 밀가루, 보리, 콩, 오렌지 등등... 그 애랑, 그 애 엄마랑 같이 놀러다니다 보니깐 '알러지 아이와 그 엄마'의 고통이 눈에 속속 들어온다.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 그 애 이름이 소라인데, 소라는 알러지 정도가 너무 심하고 종류도 다양해서-- 과자나 빵 같은 밀가루 음식을 먹은 사람이, 손으로 소라를 만지기만 해도 두드러기에 가려움증이 생긴다. 지난번에 소라네 집에 갔는데, 소라 엄마가 내게 커피를 타줬다. 원두 커피 한잔이랑 설탕을 주면서 찬장을 뒤진다. "크림이 없네... 어디다 뒀더라"
그때까지만 해도 소라의 알러지가 그 정도로 심한 줄은 몰랐기 때문에 난 그냥 "괜찮다"고 하고 원두커피를 마셨다. 그 다음에는 소라네가 우리집에 놀러왔다. 우연히 우리집에도 우유가 떨어졌다. 미안하다고 했더니 소라엄마는 커피에 우유 안 넣는단다.
생각해보니, 소라네 집에는 우유가 없는게 당연했는데. 소라엄마가 소라 먹일 과자(알러지 없는)를 따로 사왔길래, 멍청하게도 나는 우리집에 있던 '보통 과자'를 꺼내서 내 딸과 함께 먹었다. 소라 엄마가 어렵사리 내게 말을 꺼냈다. '미안하지만 다 먹고 나서 손을 좀 씻고 와주지 않겠느냐'고. 그때서야 알았다. 어제 겨우 두 돌이 된 소라의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소라는 우리집에 왔던 날 가려움증이 도져서 결국 울며 집에 돌아갔다. 그 뒤로는 소라가 우리집에 놀러오는 일은 없고, 우리가 소라네 집으로 놀러간다. 소라엄마가 밀가루가 아니라 남미산 무슨무슨 곡식가루로 직접 만들었다는 빵을 내올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두 아이가 몇시간 동안 군것질 간식 한번 먹지 않고서 놀아야 한다.

소라엄마의 걱정은 유치원. 유치원에 보내면 대부분 급식을 하는데, 소라만 도시락 싸서 보내면 어린아이가 주눅들까봐 '급식 없는' 유치원을 찾아보겠단다. 문제는 그것 뿐이 아니다. 급식 아니고 도시락 싸가는 곳이라 해도, 다른 친구들이 빵이나 밀가루 음식, 소라가 못먹는 것들을 분명 가지고올 것인데, 소라는 매일매일 알러지에 시달릴 수 밖에 없을테니. 마룻바닥에 떨어진 과자 부스러기에 닿기만 해도 벌겋게 부어오르니 참 큰일이다.
어제 소라와 함께 수족관에 갔었다. "수족관 안에선 음식을 못 먹게 되어있으니깐 안심이야". 소라엄마가 이렇게 말해서 나도 안심했는데, 수족관 나오면서 또 가려움증이 도졌다. 소라엄마 말로는 휴게코너에서 (금지됐음에도 불구하고) 아줌마 몇명이 만두를 먹는 걸 봤단다. 어딘가, 휴게실 의자라든가 바닥에, 만두 부스러기가 떨어져있었나보다.

이 정도로 알러지가 심하니 엄마아빠 고생이 말이 아니다. 술 좋아하는 소라 아빠는 집에서도 반주 한 잔씩 꼭꼭 하는데, 어느날 맥주잔에 소라가 입을 댔단다. 보리에도 알러지가 있어서, 바로 부어올랐다고. 그 뒤로 소라네 집에선 맥주는 사라졌다고 했다.
우유를 못먹으니 당연히 분유도 못 먹는다. 한 통에 4만원 가까이 하는, 유단백 특수처리를 한 특별한 분유를 먹어야 한다. 아기 때엔 모유를 먹었지만 분유가 필요할 때도 있어서 그걸 사다놓고 먹였단다. 밀가루 못 먹는 소라 때문에 요리책 보고 빵과자 만드는 법을 익혔다고 했다.

오늘 소라엄마가 하는 말. 자기네는 공원을 가건 동물원을 가건, 사람들이 모여서 밥먹는 곳에는 가질 못한단다. "화장실 앞이라든가, 다른 사람들이 도시락 먹으러 안 오는 곳에 가서 먹어."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점심을 못 먹고, 도로변 풀섶에 앉아 먹든가 차 안에서 먹어야한다니 그런 고생이 없다. 소라엄마는 법학을 전공했고 회계사 자격증도 있다. "대학원을 두 개를 나왔는데도 아무 일도 못하고 있고, 앞으로도 못 할 것 같아."

내가 옆에서 보기에도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다. 하지만 소라엄마는 이렇게 말한다. "알러지는 몸에 달린 센서같은 거니까, 소라는 그냥 센서가 민감한 아이인 거야. 몸에 좋은 자연식만 먹으니 더 건강하겠지." 바라보는 나는 소라엄마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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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1 10: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바람구두 2004-12-1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환경오염..........

딸기 2004-12-11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런저런 알러지 증상을 겪고 있긴 하지만, 어린아이가 알러지 때문에 고생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환경오염 탓이 아닐까, 막연하게 생각만 해보는데, 요샌 아토피라든가, 각종 알러지 없는 애들이 없는 것 같아요.

2004-12-12 17: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4-12-13 00: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고마워요 *^^*
 

"책, 책! 언제나 책이네요, 할아버지! 언제나 아시게 될까? 우리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라는 것을 말이에요. 이 세상은 우리도 그 일부이고, 우리가 아무리 그것을 사랑한다 해도 그 사랑이 지나치지 않은 세상이란 것을? 자, 보세요!" 그녀는 창을 크게 열어젖히고 달빛이 비치는 정원의 검은 그림자 사이로 반짝이는 흰 빛을 우리에게 보도록 했다. 정원에는 약간 찬 여름밤의 바람이 불었다. "보세요! 저것이 이 시대 우리의 책이예요. 두 분!"


윌리엄 모리스, <에코토피아 뉴스>에서.


News from nowhere,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 미래의 낙원에서 책을 평가절하해버린 모리스의 통찰력. 저것은 책 속의 엘렌이 내게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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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다가. 문득 마주친 문장에서, 머리 속에 잠시 어떤 생각들이 뒤섞여버렸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너의 피부색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 피부색"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이 원래의 문장이다. 파농은 흑인이었고, 저것은 그가 맞부딪쳐야 했던 현실이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이런 현실에 맞부딪쳐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마음에 들 때 "네가 여자임에도 불구하고"라고 말한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네가 여자이기" 때문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 어느 쪽이든 나는 이 끔찍한 순환론을 벗어날 수가 없다.

이건 어떤가. 다시 파농의 글.

항상 흑인 선생이고 흑인 의사고 그렇다. 점점 더 상처를 받으면서 나는 사소한 구실에도 치를 떨었다. 예컨대 한 (흑인) 의사가 단순한 의료사고라도 내면, 그것은 그 의사 한 개인의 종말 뿐만 아니라 그 이후의 모든 (흑인) 의사 지망생들의 종말을 의미한다. 그래, 흑인 의사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니?

저 문장에서도 '흑인'을 '여성(여자)'로 바꾸면 그것은 그대로 나의 이야기이다. 파농을 여성의 관점에서 읽으려고 애당초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파농의 책은 제국주의와 탈식민주의에 대한 이야기이고, 파농은 흑인의 관점에서 제국주의라는 적과 탈식민주의(해방)라는 과제를 바라본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파농 또한 남자이기 때문에 파농의 분석에서 예시되는 사례들은 극히 남성적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나 여자이기 때문에 여성의 관점에서 성차별/가부장적 차별이라는 적과 양성평등(인류해방)의 과제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잉해석 내지는 지나친 상상이라고 비웃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같은 책에 나오는 파농의 말을 되돌려주고 싶다. "한 가지 형태의 비인간적인 행위와 다른 한 가지 형태의 비인간적인 행위 사이에서 우열을 가려내려는 것은 매우 유토피아적인 망상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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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2-01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별님, 선생님이시군요. 그런 일이 어디 한두번이라야 말이지요. 그쵸? ^^

바람구두 2004-12-01 2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가끔 남성인데도 불구하고 아줌마스럽다는 이야기를 듣는데...

딸기 2004-12-01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게 좋은 것 같아요. 우리 사회에서는(남의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남성성이 좀 있는 여성이랑, 여성성이 좀 있는 남성이 매력적인 것 같아요.
 

"2점... 뒤지고 있구나"
"연장전도 생각하고 있어야겠네"
"패배는?"
"그게 뭔데?"


지나가던 수영부원, 너무 좋다...


덕택에, 당분간 다른 책은 거의 못 읽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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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리뷰의달인이 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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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2004-11-29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헤헤 ^^

마냐 2004-11-3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큭...아직 아니었어?ㅋㅋ

딸기 2004-11-3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엣, 뭐야! 달인의 길이 얼마나 멀고도 험했는데!

숨은아이 2004-11-30 17: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축하축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