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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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고 차베스라는 인물, 보수적인 신문들에 나오는 것처럼 정말 '또라이'인가. 그렇게 또라이라면 영국의 '내놓은 좌파' 켄 리빙스턴 런던 시장은 왜 차베스가 런던에 찾아오자 버선발로 환영하면서 차베스의 에너지 공급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던 걸까. 왜 남미에서는 차베스의 말발이 여기저기 먹히는 걸까. 볼리비아, 니카라과 등의 '좌파 대통령'들이 차베스와 나란히 어깨 걸고 있는 것을 보면 분명 그쪽 동네에서 무슨 일인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이는데 말이다.

차베스라는 사람에 대한 반응은, 요즘 들어선, 거의 카스트로 못잖게 갈리는 것 같다. 스스로 "예수와 카스트로가 나의 모델"이라 말하는 차베스, "이제는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라면서 시간의 흐름을 거꾸로 돌리려는 듯 좌충우돌하는 이단아. 차베스를 둘러싼 '진실'은 무엇이며, 베네수엘라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어떤 것이고, 어떤 '역사적인 의미'를 띤 것일까. 아니, 대체 남미 산유국에서 벌어지는 소동들이 '역사적인 의미'를 띤 사건들이 맞기나 한 것일까.


어느 틈에 차베스에 대한 책들이 국내에도 알음알음 나와 있는 걸 보니 차베스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서도 높아지긴 한 모양이다. 한때는 맑스-레닌주의가, 한때는 주체사상이, 한때는 룰라의 노동자운동이, 한때는 리비아의 녹색혁명론이 '대안'이라는 이름을 걸치고 사람들을 혹하게 한 적 있었다. 차베스의 사회주의 혁명론을 비롯해 앞서 언급한 무슨무슨 주의-사상-론(論)들이 모두 같은 등급에 속하는 것들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차베스라는 인물, 생각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베네수엘라가 세계 10위권 안에 드는 산유국이라는 사실을 보태고 뺀다 해도 말이다. 바야흐로 차베스라는 유령이 지구를 휩쓸고 있는 것일까.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책은 앞서 읽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21세기 혁명’을 좀 길게 늘여 쓴 책 같은 느낌이 든다. 우고 차베스라는 논란 많은 인물을 ‘21세기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가’로 칭송하며 처음부터 끝까지 찬양 일변도로 쓰고 있는데, 그 부분은 사실 좀 놀랍다. 한국에서 베네수엘라의 ‘혁명적 상황’에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자료를 분석해 이런 책을 내놓은 것은 훌륭한데, 이렇게 ‘무비판적’으로 마치 예전 1980년대 대학생들이 북한 칭찬했듯 차베스 칭찬해놓은 것은 좀 뜻밖이다. 이러다가 베네수엘라 잘못되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차베스의 ‘실험’은 분명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신사회주의 혁명’이라는 말을 붙일만한 구석도 있다. 석유를 바탕으로 국민들 잘살게 하고 매판자본가들 몰아내고 미국에 맞서고... 아무튼 차베스라는 사람을 어떤 의미에서든 재평가하게 해준 것은 분명하다. 그동안에 외신들 보면서 차베스가 하는 일들, 기간산업 국유화를 비롯한 반자본주의적인 행보들과 사회주의 선언, 반미 발언 같은 것들이 너무 돌출적이고 쇼(show) 같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차베스의 ‘진심’이란 것이 의심스러웠다는 얘기다. 이 책에 나온 차베스의 모습은, 적어도 어떤 진심을 가지고 일관되게 일을 추진해가는 그런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점을 ‘혁명가’라고 부르려면 부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군부 쿠데타 문제나 포퓰리즘적인 측면, 오로지 자원에 기댄 오지랖 넓은 외교와 ‘민주적 독재’ 같은 것들이 마음에 걸린다. 저자들은 차베스가 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던 것과 이후 군부를 끌어들이기 위한 행동들에 대해서도 ‘똑똑한 행동이었다’는 식으로 칭찬하고 심지어 “베네수엘라 군부는 원래 애국적인 전통이 있다”고 얘기를 하는데 이 부분은 좀 섬?하다. 얼마전 차베스는 대통령 권한을 엄청나게 강화하는 법안들을 통과시켰는데 ‘고이면 썩는다’고 하는 이치가 베네수엘라에서만은 비껴가기를 바래야 하는 것인지.

그래도 아무튼,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지는 새로운 시도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기뻤다. 책 읽으면서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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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와 베네수엘라 그리고 21세기의 혁명
조지프 추나라 지음, 이수현 옮김 / 다함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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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은 책인데... 알라딘에서 주문하면서 정가가 2000원 밖에 안 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받아보니 예상대로 책이라기보다는 팜플렛이다. 내 손바닥 2.5배 작은 크기에 60쪽 분량. 책의 거품이 너무 심하다보니, 이런 팜플렛도 하나의 방식이고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박노해 선생님네 나눔문화에서 요새 ‘팜플렛운동’ 하던데 다시 팜플렛이 유행이런가.

한국 언론들이 앞다퉈가며 차베스라는 인물을 별종으로 만들어 희화화하는데 과연 그렇게 볼 일인가. 이 팜플렛은 너무 예찬 위주여서 오히려 신뢰도가 떨어지는 면이 없지 않지만, 차베스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나름의 확신과 ‘21세기 사회주의 실험’을 간단명료하게 정리해 놓았다는 장점이 있다. 신문에 많이 나오는 차베스가 어떤 인물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미국놈들이 욕하듯이 진짜 형편없는 인간인지 궁금하긴 한데 그렇다고 아주 자세히 알 필요는 없겠다 싶은, 그저 신문기사보다 조금 더 알고싶은 정도인 사람들에게는 딱 알맞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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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엔탈리즘 - 개정증보판 현대사상신서 6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박홍규 옮김 / 교보문고(교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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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유명하고 중요하고 의미 있는 책이라, 뭐라뭐라 끄적일 만한 의견 따위 있을리 없고.
다만 생각보다 재미없었다는 점, 그래도 늦게나마 읽기는 잘했다는 점. 18세기 이래 유럽의 오리엔탈리즘을 주로 중근동에 대한 유럽의 문헌들을 바탕으로 다루고 있는데, 저자 자신은 ‘중근동 이외의 지역으로 범위를 넓혀봐도 마찬가지다’라면서 오리엔탈리즘을 굉장히 폭넓게 정의하고 있다.

 

읽는 동안 지겨우면서도 감동을 좀 하면서 책장을 넘겼는데 머리 속에 이 생각 저 생각 많이 떠올랐지만 정리를 못했다. 첫째 유럽이 중동/아시아 말고 라틴아메리카나 아프리카를 대해온 태도도 ‘오리엔탈리즘’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 있는지(아니면 다른 틀이 필요한 것인지), 둘째 ‘서발턴은 대신 남의 입을 빌려서는 제대로 말할 수 없다’ 식의 비판에서 사이드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점(나는 서발턴이 대리인들의 입을 통해서라도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셋째 오리엔탈 세계의 일원인 한국 사람으로서 서양에서 베껴온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치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점 등등의 문제가 머리 속에 좀 남는다. 책에선 셈족과 관련된 서양인들의 인식을 주로 추궁하는데 안티세미티즘이 오히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관계에서 이스라엘의 무기로 악용(?)되고 있는 현실도 의미심장하다는 생각.

첫 번째 문제는 아무래도 요즘 내 관심사가 중동보다 아프리카 같은 곳으로 많이 가 있다 보니 “아시아 특히 중동에 대해선 이런 얘기라도 나오지만 아프리카는 완전 죽은 땅 취급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유럽이 유사 이래 끊임없이 상호작용을 해야 했던 중근동 말고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같은 경우는 아예 짐승 취급하며 노예로 삼고 더 몹쓸 짓을 많이 했는데, 유럽이 아프리카, 아메리카에 대해서는 사이드가 말하는 것 같은 ‘타자화’ 하는 과정조차도 불필요하게 여겼던 것이 아니었을까.

두 번째는 사이드가 중동의 이야기를 하는데 워낙 출신 성분이 엘리트이다보니깐... 늘 나오는 비판의 일종인 것이고. 세 번째는,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해서 역시 우린 고민이 너무 적다는 것, 그리고 어쩌면 뜬금없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유전자 결정론 내지 ‘종족/민족/인종 환원론’이 워낙 많다는 것. 그런 것들 어떻게 해야 고칠수 있나 우리나라 학자들도 고민을 많이 해야 하지 않을까...

 

번역과 관련해서 할말이 좀 있다.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는 책이고, 번역자도 열변을 토해가며 오리엔탈리즘 내지는 한국인들의 서구지향성을 비판하는데... 고유명사 표기 자체가 오리엔탈리즘적이다. 마호메트, 아라비아어, 우마이어, 가자 서해안, 아브델 마레크, 우르만, 만수어, 플로벨... 인내심을 요하는 이런 표기들이 거듭된다는 점. 역자가 열성을 다했긴 했는데 아무래도 아랍 중동 이쪽에 대해선 잘 모르는 분인 탓인 듯. 이 분이 번역한 책을 전에도 읽은 적 있지만 의지와 문제의식은 칭찬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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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3-26 1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것도 언젠간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던 책인데.. 페이지의 압박때문에 계속 미루고 있습니다. 후-

마늘빵 2007-03-26 13: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좋은거 자꾸 올려주시면 보관함 무게가 ...
 
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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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서 ‘국가의 개입’ 혹은 ‘개발(독재)’라는 문제를 박정희라는 인간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긴 참 어렵다. ‘따로 떼어놓고 생각하자’ 라는 말 자체가 어떤 정치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정치와 경제를 따로 떼어놓고’ ‘개발독재의 성공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장하준의 노선이다. 나는 1970년대에 태어나서 19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사람인데, 대학 입학 당시 ‘X 세대’라 불렸던 나 같은 사람에게 개발독재 시절의 정치학 같은 것은 그다지 큰 의미는 없다. 말하자면 나는 ‘정치와 경제를 따로 떼어놓고 보자’ ‘박정희의 공과를 구분해 말해보자’ 이런 사고방식이 은연중에 머리 속에 있는데,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께는 이런 식의 구분을 하자는 것 자체가 핏덩이들의 철모르는 소리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도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기 힘든, 그런 처지인 것 같기도 하다.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던 시절, 그러니까 IMF 경제위기 이전 시기까지는 박정희 시대를 평가하는데에 정치적 자유화 수준이라든가 민주주의 이런 것들이 주요 기준이 됐었지만 지금은 누구 말마따나 패러다임이 변했다. 어떤 시스템 혹은 시대를 평가하는 기준이 경제, 즉 ‘돈’이 되고 보니 박정희 시절의 경제정책을 칭찬해주고 이런 것들이 힘을 얻는 것 같다. 만일 10년 20년 지나서 예를 들면 ‘환경’이 모든 가치기준을 압도하는 시기가 되면 아마도 또 바뀌겠지만 말이다.

장하준은 한국에서 보면 오른쪽 왼쪽 어느 쪽으로 딱히 판가름하긴 힘들다. 자기 스스로도 ‘사다리 걷어차기’에서 “우파는 나를 좌파라 부르고 좌파는 나를 우파라 부르는데 나는 아무 쪽도 아니다”라고 썼었다. 왜 여기에 굳이 ‘한국에서 보면’을 덧붙였냐면, 요즘 우리 사회에선 좌인지 우인지 참 헷갈리기 때문이다. 옛날 박정희 예찬론자들은 김대중과 노무현을 욕하면서 경제적으로는 김대중 노선, 노무현 노선을 지지하고, 좌파의 후예들은 장하준처럼 박정희식 닫아걸고 키우기 노선을 오히려 더 지지하는 것 같다.

여하튼 “뭐든 다 팔아버려 남 좋은 일 시키지 말고 국가가 나서서 지킬 것은 지켜서 우리 국민경제 살려야 한다” 하는 장하준의 주장은 먹히는 구석이 많다. 좌파 출신이라는 대통령이 나서서 FTA 지금 안 하면 죽는다고, 세금 펑펑 써가며 캠페인 하는 통에 명문가의 자제라는 똑똑한 한국 학자가 (무려 캠브리지 교수를 하면서) 입바른 소리를 하니깐 듣기에 좋다.

그런데 장하준의 책을 보면서 마음이 찝찝한 것은, 민족주의 넘어서 분배 정의에 대한 문제에서는 역시 언급이 없거나 적기 때문인 듯. 여기서 이제 좌냐 우냐 하는 것이 갈라질 것 같은데, 파이를 키워서 똑같이 나눠먹자! 하지 않고 장하준은 ‘국가는 파이를 키워라!’ 딱 그 얘기만 한다. 그나마 파이를 키우지도 못하는 것보단 낫겠고, 개발독재 기간 파이 많이 키워서(이러니깐 파이가 무슨 애완동물 같다) 그동안 맛나게 잘 먹은 것도 맞긴 하다. 그런데 민족경제 어쩌구 하는 것이 허위가 많다는 걸 이젠 좀 알기 때문에 장하준의 말이 일면 속시원하긴 한데 역시나 모자란다.

이 학자를 도마에 올려놓고 보자면, ‘국가의 역할’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나온 이 책의 내용이 ‘사다리 걷어차기’보다 크게 나아진 것이 없다. 장하준이라는 학자에 대해서는 좀 실망. ‘시각’은 의미가 있는데 좀더 정교하고 치밀한 무언가를 제시해줬으면 좋았을 것을. 또 서양 학자들 상대로 개도국의 입장을 전하려는 것이라면 동아시아 말고 다른 쪽으로도 폭을 넓히던가 아니면 한국의 경우를 케이스스터디로 정말 충실하게 연구하던가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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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험실 지구 - 스티븐 슈나이더가 들려주는 기후 변화의 과학 사이언스 마스터스 10
스티븐 H.슈나이더 지음, 임태훈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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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언스북스의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 10번째권이다. 이 시리즈 목록을 보면 1권 제러드 다이아몬드의 ‘섹스의 진화’, 3권 폴 데이비스의 ‘마지막 3분’, 4권 리처드 리키의 ‘인류의 기원’, 6권 수전 그린필드의 ‘휴먼 브레인’, 7권 리처드 도킨스의 ‘에덴의 강’ 이런 식으로 돼 있다. 과학책 몇권이라도 들춰본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명사급 필진들의 책들이다. 그런데 ‘마스터스’라고 하기엔 좀 뭣하고, ‘유명한 과학자 누구누구의 짧지만 중요한 글’ 거의 이런 식인 것 같다. ‘실험실 지구’를 보면 조그만 판형에 듬성듬성 큰 글씨, 줄간격 늘리고 뒤아래 양옆 공간 넓게 쓰는 플레이 하면서 300쪽에 1만3000원... 하드커버가 아깝다는게 바로 이런 경우다.

스티븐 슈나이더는 여러 종류 책에 언급되는 나름 유명한 인물이니까 교양;; 삼아 기후학 공부하는데 밟아야할 다리를 밟는다 생각하고 읽었다. 사실 기후 문제, 지구온난화 문제 알아보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기본’은 항상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거니까 읽고 나서 시간 아깝지는 않았다.


사실 책은 훌륭하다. 그런데 책이 나온 시점이 1997년이니 10년 지났고, 이 분야 연구들이 어제오늘 다르게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감안하면 좀 뒤떨어진 감이 없지 않다. 그런 점에서는 고전이라 부를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기후변화의 그것이 가지는 생태학적 의미를 살피되, “환경과 경제 사이의 균형잡기라는 ‘현실적인 맥락’에서 지침을 얻어낼 것”이라고 머리말에서부터 못을 박고 들어간다. “선한 과학이라면 어떻게 해야 생물보존작업을 경제적, 정치적으로 가장 실천적인 방식으로 진행할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는데 도움이 돼야 한다.” 껄끄러운 번역 때문에 문장이 꼬였는데, 암튼 과학자치고는 참으로 ‘현실적인 자세’라 아니할 수 없겠다.

슈나이더는 가이아이론의 유기체 관점을 이어받아 지구가 살아있다는 전제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유기체와 무기체는 서로 연결돼 있고, 기후학자들이 흔히 얘기하듯 이 연결은 양-음의 되먹임 고리를 통해 상호작용을 이끌어낸다(이 책에선 ‘정의 되먹임’ ‘부의 되먹임’ 해놓아서 좀 어색해보임). 이 상호작용에 대해 시생대 고온과 그후 기온(즉 이산화탄소의 농도)의 안정화 과정을 설명하는 여러 이론들을 설명하고 질소, 황, 탄소의 순환과정 등등 기후변화의 메커니즘을 소개한다. 기후학자들이 모형 만드는 방법에 대한 간략한 설명도 있다. 생물 군집(생태계) 내에서 특정 종의 역할을 다른 종이 대신할 수 있는지, 즉 ‘생태계 서비스’가 대체 가능한지 하는 부분에 대한 설명 같은 것들도 재미있었다.

사실 기후변화 시나리오라는 것들은 ‘경향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긴 하지만 모델마다 다른 수치를 보여주기 때문에 믿거나 말거나 혹은 ‘과장됐다’ 식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 슈나이더는 “종합평가의 목적은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정확히 예측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런저런 변수가 생겼을때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리했다.


사실 이 책에서 ‘과학적인’ 부분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현실적인’ 부분들이다. 환경문제는 개개인의 사소한 행동이 겹쳐 ‘정말 우연히’ 일어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책임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우리의 행동이 낳을 수 있는 의도되지 않은 결과를 의식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책무”라는 것.

당연한 얘기 같지만, 실제로 주변 사람들과 환경 이야기를 해보면 많은 이들이 기후변화의 영향력을 부인 혹은 평가절하하거나, 겉으로는 알고 있다 하면서 실제로는 모르고 있거나(구체적이지 않은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내가 뭘 하리” “경제가 개판인데 기후변화가 웬말이냐” “넌 얼마나 환경 생각한다고 나한테 머라 해” 이런 식이다. 뭐, 나도 속으로는 그런 생각 아예 안 한다고 말할 수 없으니.
이 책에 예일대 경제학자인 윌리엄 노드하우스라는 사람이 고전파 경제학자와 환경 경제학자, 대기과학자, 생태학자들을 대상으로 실시했다는 조사의 내용이 나온다. 21세기 말에 지구평균기온이 섭씨 6도가 일어난다고 가정하더라도(실제로 이건 매우매우 과격한 파국적인 시나리오이며 가능성이 높지는 않은데) 전통적인 경제학자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혹시 지난 10년간 좀 달라지긴 했을까).


저자는 생태학자와 경제학자의 차이를 두 가지에서 찾는다. 첫째 이 거대한 인구, 고도의 과학기술, 거대한 경제규모가 유지될 수 있을까(지속가능성) 하는 점. 생태학자들은 현상태로는 안된다고 말하고, 경제학자들은 아예 ‘안된다’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 같다. 두 번째 생태계 서비스(다양한 생물종들이 유기체처럼 얽힌 지구 생태계의 기능)이 뭔가로 대체될 수 있다고 보는가.
생태학자들은 순식간에 파바박 생태계가 적응해서 기온 상승에 맞춘 적자생존이 이뤄지고 종 다양성이 그대로 유지되는 건 불가능하다고 본다. 반면 경제학자들은 과학기술낙관론에 의존해서 앞날에 뭐가 나올지도 모르면서 ‘해결책이 나온다’고 말하고, 그게 합리적인 ‘시장의 법칙’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과학기술이 발전하면 뭐든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자신한다. 정작 과학자들은 회의를 표시하는데도 말이다!
생태학자 경제학자들 얘기일 뿐 아니라 그냥 우리들 사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각차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리고 아직은 (적어도 한국에선) 대부분 국민이 경제학자들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과학에 관한 ‘정책’을 결정하는 단계에 들어가면 그때부터 과학은 ‘사회적 과정’이 된다. 여기서 저자는 당연한 결론 즉 ‘작은 실천’을 강조한다. 딱 한 표 차이로 선거결과가 판가름 나는 일은 실제 세상에선 거의 없지만 언제나 정치인들은 ‘당신의 한 표가 중요하다’고 하지요? 그런데 사실입니다. 왜냐면 효과는 누적되는 거니깐... 이렇게 슈나이더는 평범한 원칙을 다시 얘기한다. 요새는 미국도 재생가능에너지 한다 하고 유럽은 아주 앞서나가고 있다. 우리는? 에너지 기후 이런 얘기하면 뜬구름 잡는 웃기는 인간 되고, 잘난척 한다는 소리 듣기 십상이다. 그래도 지구는 살려야 한단 말이지... 슈나이더가 말하는 '평범한 원칙'은 그래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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