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의 역사
스벤 린드크비스트 지음, 김남섭 옮김 / 한겨레출판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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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폭격의 역사’에서 20세기의 가공할 폭격들 뒤에 숨겨진 인종주의의 얼굴을 보여주며 묵시록과 같은 어두운 미래상을 그려보였던 스벤 린드크비스트가, 이번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과거로의 여행을 치른다. 이 여행은 즐기며 구경하며 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들여다보고 스스로를 상처내며 치러내야하는 그런 여행이다.

 

알제리 내륙에서 남쪽으로 접경한 니제르 북단까지 이어지는 북아프리카 ‘사막의 길’이 린드크비스트의 경로다. 조셉 콘라드의 ‘어둠의 한가운데’를 화두 삼아 린드크비스트는 19세기, 20세기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지 점령이 어떻게 철저한 야만을 생산해냈는지를 재구성해낸다.
아프리카인들을 유럽인들이 얼마나 끔찍하게 초토화시켰는지 더 말해 무엇하랴 만은, 저자의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유대인 학살로 대표되는 20세기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진 야만적인 사건이 허공에서 떨어져내린 것이 아니라는 것, 유럽인들이 인정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부인하고 있는, 오늘날까지도 감추려고 하고 있는 그들 자신의 과거에서 배태된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유럽인들은 나치즘을 다각도로 규명하려 하면서도 나치즘의 논리야말로 자신들이 아프리카에서 펼쳤던 ‘절멸의 논리’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은 끊임없이 부인하고 있다. “야수들을 절멸하라”는 근대 인종주의와 사회진화론의 논리로 영국인, 프랑스인, 스웨덴인, 벨기에인들이 아프리카의 한 부족 한 부족을 절멸시켜가는 동안 독일에서는 그것을 본뜬 ‘레벤스라움(생활공간)’이라는 개념이 싹텄다. 내 살 곳을 만들려면, 내 살 곳을 늘려 남을 이기려면 남의 살 곳을 빼앗아야 하고, 열등한 야수들은 죽이거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는 개념. 그것이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동유럽 점령의 기본 발상이었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저자는 모래바람 날리는 북아프리카의 사막길과 유럽 옛 식민지 점령군의 잔혹하기 짝이 없는 만행들을 교차시키며 유럽 식민주의와 인종 대학살의 고리들을 파헤친다. ‘폭격의 역사’ 만큼이나 우울하고, 끔찍한, 그렇지만 대면해야 할 진실. 정복하기는커녕 남의 식민지가 되었던 나라에서 남들의 악행을 곱씹어봐야 뭐하나 할 수도 있지만, 바로 그런 ‘우리’를 향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온 박노자라는 사람이 질문을 던진다. “과연 과거인가?”
“피해자도 가해자도 ‘영원한 현재가 돼버린 과거’의 외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 식민지 전쟁은 이제 ‘영광스러운 문명화 작업’이나 ‘열등 인종의 제압’이 아닌 ‘더러운 전쟁’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타인종, 타문화를 ‘야수’로 보는 의식이 완전히 없어지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추천의 글) 그리고 박노자는 미국의 이라크 공격 등을 거론하면서 인종주의적 학살의 참극을 경고한다. 그러니 어쩌나. 우리에게도 ‘가해자’라는 꼬리표가 터럭 한끝이라도 붙을 수밖에 없는 것을.
유럽이라면 사족을 못쓰는(이런 표현이 좀 심하다면 ‘유럽을 애호하는’으로 바꿔줄 수도 있다) 사람들이 한둘인가. 유럽에 가서 멋들어진 궁전에 조각상들 보고 좋아라 하는 한국인들이 거의 대부분 아니던가. 올림픽대교 가운데 첨탑위의 흉물스런 조각상을 보면, 그것을 올려놓느라 헬기를 탔다가 추락해 숨진 조종사 2명의 목숨 값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 기본적으로 우리는 유럽 그 나라들 ‘낭만과 문화’를 수십만 수백만 명의 목숨 값으로 환산해 보는 데에 익숙지 않다. 우리 뿐 아니라 누구든 그럴 것이다.

‘유럽 문명’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 사하라를 종단할 필요는 없지만, 생각도 안 해보고 있다가 남의 통렬한 비판을 들으면 “너무 심하게 말하지 마” 하면서 반사적으로 방어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런 방어벽을 깨야한다는 것을 책은 줄기차게 일깨워준다.

여행을 하다 보면, 특히 내전을 치렀던 지역이나 학살이 자행된 독재국가 같은 곳을 지나가게 되면 공기가 너무 무겁거나 핏빛이어서 얼굴을 돌리고 싶을 때가 있다. 서울 바닥에서 나고 자란 풍요의 세대, 나같은 사람에게 그런 곳으로의 여행은 사실 회피하고 싶은 진실일 뿐이다. 나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역사의 끔찍한 부스러기들과 대면할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두껍지 않은 이 책자에 나오는 잔혹한 사실들을 읽는 것만도 마음 불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직시해야 한다는 것, 마음 불편함 쯤은 과감히 누르고 들여다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메시지다.

 




   
  사하라는 여느 때와 다름없다. 강한 소독약 냄새, 기름칠을 하지 않아 끼익끼익 소리나는 문의 경첩, 반쯤 찢어진 블라인드, 다리 하나가 너무 짧아 흔들거리는 테이블, 그리고 테이블 표면과 베개와 세면기 위에 얇게 덮여 있는 모래가 너무나도 낯이 익다.
...하얀 기둥과 현관, 하얀 뾰족탑과 갓돌은 외벽이 불그스레한 갈색 진흙인 도심의 건물들에 생기를 불어넣고 있다. ‘블레드 에 수단’, 즉 흑인들의 나라라는 말을 따라 수단 양식, 곧 흑인 양식이라 불린다. 사실 이것은 1900년에 열린 파리 대박람회를 위해 프랑스인들이 창조한 상상 속의 양식인데, 그 뒤 이곳 사하라에 이식되었다. 현대식 건물들은 국제적 양식의 회색 콘크리트이다. (34~35쪽)
 
   

 

   
 

1887년 스코틀랜드의 외과의 던롭은 어린 아들의 자전거에 공기 고무 튜브를 장착한다는 착상을 떠올렸다. 이 자전거 타이어는 1888년에 특허 출원되었다. 그후 몇 년 동안 고무 수요가 증가하였다. 바로 이것이 콩고 체제의 야만화가 확대된 이유였다.

벨기에 국왕 레오폴트 2세의 대리인들은 대가를 조금도 지불하지 않고 원주민들로부터 노동력과 고무와 상아를 징발하였다. 거부하면 마을이 불타고 아이들이 살해되었으며 손이 잘렸다.

이런 방식으로 처음에는 이윤이 극적으로 증가되었다. 이윤은 무엇보다도 브뤼셀을 지금도 꼴사납게 만들고 있는 셍캉트네르 아케이드, 라에켄 궁, 아르덴 성 같은 흉측한 몇몇 기념물을 건립하는데 사용되었다. 오늘날 그 누구도 이 기념물들이 얼마나 많은 손의 절단을 초래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60쪽)

 
   

 

   
  사막에는 녹슬게 할 습기가 없으므로 수많은 폐차들이 그곳에 영원히 서 있다. 사자 모래 언덕은 차량의 진정한 공동묘지다. 보통 세단으로 사막을 건너려고 하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종종 여기서 끝난다.
바람과 모래는 곧 모든 페인트를 벗겨내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모래 언덕이 예전에 죽은 낙타의 뼈들을 묻듯이 차의 뼈대를 묻지 않으면, 종국에는 금속이 마모되고 말 것이다. (153쪽)
 
   

 

   
 

1904년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인들은 미국인 영국인 및 기타 유럽인들이 19세기 내내 발휘해왔던 기술, ‘열등문화’ 인종의 절멸을 재촉하는 기술을 습득했음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의 사례를 쫓아 헤레로인(남서 아프리카인)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냈고, 그들의 목초지는 독일인 이주민들과 식민회사가 접수했다. 헤레로족이 저항하자 아돌프 레브레흐트 폰 트로타 장군은 1904년10월에 헤레로인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경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장 여부에 관계없이 사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헤레로족은 폭력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그들을 사막으로 몰아내고 국경을 봉쇄했을 뿐이었다.
...우기가 시작되자 독일 경비병들은 마른 웅덩이 주위에 쓰러져 있는 해골들을 발견했다. 이 웅덩이는 깊이가 7~15미터에 이르렀고, 헤레로족이 부질없이 물을 찾으려고 판 것이었다. 인종 전체, 약 8만명의 인간들이 사막에서 죽었다. 겨우 몇천 명만 남아서 독일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1896년 쿠바의 스페인 사람들이 고안하고, 미국인들이 영어화하고, 보어 전쟁 동안 영국인들이 다시 사용한 ‘강제 노동수용소’라는 말이 독일 언어와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230~2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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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자크 루소와 국제정치 - 개정판
김용구 지음 / 원(이보란)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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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모든 것이 평화스럽게 그리고 아무런 저항도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것은 외눈거인 Cyelope 의 지하실에 감금된 채 삼켜지기만을 기다리는 율리시즈 친우들의 평온함이다. 신음을 하면서도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이 공포의 대상 위에 씌워진 영원한 베일을 벗겨 보자. 눈을 들어 먼 곳을 응시한다. 화염에 쌓인 불길, 황폐한 촌락, 노략질 당한 도시들을 본다. 이 잔인한 인간들아! 이 불행한 군중들을 어디로 이끌고 가는 것이냐? (95쪽)
 
   

 

   
  결국 국민 전체에 의한 약속은 최후의 구성원 보존에 대해서도 그 밖의 모든 구성원 보존을 위한 것과 같은 배려를 제공해야 되는 것이 아닌가? 또한 단 한 시민의 행복이라도 그것이 국가의 그것에 비하면 공동관심이 아니란 말인가? 한 사람의 개인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 좋은 일이라고 할 때 그것이 자기 나라의 번영을 위해 자원해 의무로서 죽어 자기를 희생한 훌륭하고 덕성 있는 애국자의 입에서 나오는 선언이라면 나는 경탄한다. 그러나 다수의 번영을 위해 정부가 한 무고한 자를 희생시킬 것이 허용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나는 이 원칙이야말로 기왕의 폭정이 창안한 가장 가증스러운 것 중의 하나이며, 내걸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위선적인 것이고 인정할 수 있는 것 중에 가장 위험스러운 것이며, 사회의 기본 법률에 가장 정면으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바다. (144쪽)  
   

 

   
  소유자의 재산을 탈취하는 것이 아니라 축재할 수단을 모든 사람으로부터 배제함으로써, 그리고 빈자를 위한 양육원을 건립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빈곤하게 되지 못하도록 함으로써, 재산의 극심한 불평등을 예방하는 것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사업 중의 하나다. (146쪽)  
   

 

장자크 루소라니. 정치의 정 자에도 관심 없는 내가 이런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습게 느껴져서, 읽는 동안 ‘왜 읽고 있나’를 여러번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굴러다니던 책을 말 그대로 ‘주웠다’. 하드커버 책자를 그냥 버리긴 좀 아까워서 집에 가져다놓았다가, 홈플러스 문화센터에 아이 데려다놓고 기다리는 동안 꺼내 읽었다. 어지간히 우스운 일이다. 홈플러스 문화센터 소파에 앉아 장자크 루소를 떡하니 꺼내놓고 읽는다는 건. 조그맣게 쓰여있는 책의 부제는 ‘영구평화를 위한 외로운 산책자의 꿈’. 미용실에서 슈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 트리니티 강연 50주년 기념 논문집을 읽었던 것에 비견되는, 분위기 파악 안 하고/못 하는 나같은 자들만이 할수 있는 짓 같기도 하고.

어쨌든 책은 재미있었다. 정치학에 대해 뭘 통 모르니 이렇게 유명한 책에다가 토를 다는 짓은 하지 않는다. 난 권위 앞에 한없이 비겁해질 수 있는 독자이니까. 그런데 읽다보니 의외로 재미가 있었다!

고등학교 때 사회 시간에 배웠던 홉스-로크-루소가 생각났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만인대 만인의 투쟁. 로크는 반대, 루소는 종합.

인터넷에서 찾아보니까 이렇게 정리돼 있다. “홉스는 자연상태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 생각하고 사람들이 자연권을 지배자에게 위양함으로써 평화적인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고 주장하여, 17세기 절대왕정제 이론을 성립시켰다. 로크는 계약에 의해서도 생명·자유·재산 등의 자연권은 지배자에게 위양할 수 없다고 주장하여, 입헌군주제의 이론을 선도하였다. 그리고 루소는 인간의 불평등 원인을 사유재산에 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사회계약에 입각하여 각인이 자유 평등을 누릴 수 있는 자연상태를 구상하였다. 즉 인민의 일반의지로서의 국가가 자유 평등을 보장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여 프랑스혁명의 이론적인 근거를 세웠다.”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 출신, 학술원 회원-- 전형적인 서울대의 ‘늙은 교수’가 떠오른다고 한다면, 편역자에게 죄송스런 얘기가 되겠다. 책은 루소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지극히 전문적이고 재미없는 해설, 그리고 루소의 몇몇 글들로 구성돼 있다. 편역자가 일본책들로 공부하신 분인지 일본 한자 표현이 좀 눈에 띄었지만 가끔씩은 오히려 예스러워서 정답기도 했다.

뒷부분 ‘전쟁상태론’과 ‘정치경제론’에 유명한 루소의 ‘홉스 비판’이 나온다. 루소라는 사람의 통찰력이 번쩍번쩍 하는 듯한 부분도 있었고, 어쩌면 오늘날의 유럽연합에서 벌어지는 논란들을 예고하는 듯해서 눈길 끄는 부분들도 있었다. 전반적으로 즐거운 독서였는데 읽고 좀 지나니 머리 속은 금세 백지가 됐다. 정치이론은 어째 기억에서 오래 머물지를 못한다. 내 단백질과 안 맞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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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7-06-24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교에서 국제정치 가르치시는 교수님 은사셔서 학교에 막 입학했던 2004년 2학기에 한시간 정도 특강을 해주셨었는데, 참 멋진 분이라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래도 저런 분이 어딘가에 계시는 덕분에 아직 서울대가 살아남아서 그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죠. 전형적인 '꼰대' 교수라기보다는 서양에서 이론과 시각을 수입하여 공부했던 세대로서 그 한계를 절감하고 새로운 우리의 시각을 형성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시더라구요. 물론 그런 생각을 하는 분이 본인 세대에서 너무도 적다는 것도, 그로 인한 한계도 말씀하셨지만요. 다른 학교에서 하시는 75분짜리 특강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했었죠. 그리고 풍기는 분위기도 정말 멋졌구요~~ㅎㅎ

딸기 2007-06-25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옷 그렇군요. 좋으네요, 그런 노교수님들. :)
 
이라크의 역사 - 수니파 시아파 쿠르드족의 각축 살림지식총서 269
공일주 지음 / 살림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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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지식총서’를 읽은 것은 처음인데, 이것만 그런지 다른 것들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엉성하다. 고유명사가 전혀 통일돼있지 않고 표기법도 제각각인데다가 문법상 맞지 않는 구절들도 그대로 들어가 있어서 편집자가 대체 존재하기나 했었는지 의심스럽다.

책 내용은, 작은 책 안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한 까닭에 어지간히 이라크 문제에 관심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면 이해하기가 좀 힘들 것 같다. 고유명사가 이렇게 줄줄이 나오는데 한국 독자들 귀에 익은 이름도 아니고, 그나마도 표기가 한 페이지 안에서조차 다르니. 너무 개괄적이어서 오히려 이해하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것 아닐까.

저자인 요르단의 공일주 박사는 만나본 적이 있는데, 짧은 만남에서 내 나름으로는 제법 소중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짧은 책에 ‘기대’를 했다 하긴 뭣하지만 책은 너무 담담하고 너무 간략하다. 시공디스커버리처럼 화보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이 시리즈의 다른 테마들은 대개 한정적인데 이라크, 이란 같은 낯선 곳들은 출판사 쪽에서 너무 우습게 생각한 것 아니었을까? ‘이라크의 역사’ ‘페르시아 문화’ 같은 것들이 들어있는 걸 보면 말이다. 축구, 월드컵과 관련해서만 해도 몇권씩 시리즈에 넣으면서 메소포타미아 7000년 역사를 95쪽 안에 우겨넣은 것은 좀 심했다.

편집자의 ‘가치관’에 굳이 시비를 걸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책의 ‘가치’가 어째 좀 의심스럽단 얘기다. 그나마 이라크 역사에 대한 책이 우리나라에서 출간된 것도 이라크전 이후의 일이니 이 정도면 그래도 기특하다고 해야 하나. 중동 관련 책들을 볼땐 항상 이게 딜레마다. 평가 대상이 너무 적어 평가를 하기조차 미안하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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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2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값이 싸다고 내용까지 싸서야 ㅋㅋ 얼마전에 살림지식총서 읽은적이 있는데(안토니 가우디) 그건 괜찮았어요 딸기님 ^^

딸기 2007-06-22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래요? 이런 시리즈를 만드는 건 참 좋은 시도 같은데...
그럼 이 책이 유독 좀 떨어지는 모양이군요. 정확히 말하면 내용이 맘에 안 들거나 하는 것은 아닌데, 표기 문제는 너무 심해요.

Solpu 2008-08-31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류(교정상의 실수)도 상당히 많아보여요. 필자도 문제지만 이런 건 정말 편집자의 문제....
 
전지구적 변환
데이비드 헬드 외 지음, 조효제 옮김 / 창비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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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몇 달 걸렸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익숙하지 않은 경제 용어들이 나오긴 하지만 책 내용이 난해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읽는 데에 그렇게 오래 걸린 것은, 책이 두껍기 때문이다. 무려 170쪽에 이르는 기나긴 부록과 주석, 찾아보기를 제외하더라도 710여 쪽 분량. 각종 표에 그래프에, 눈 아프게 만드는 장치들도 많다.

온갖 사료를 동원한 알찬 글 내용과 훌륭한 번역 덕에 머리 아프진 않았다. 지구화(글로벌라이제이션을 ‘지구화’로 번역했는데 통상 쓰이는 ‘세계화’와 개념상 큰 차이가 느껴지지는 않는다)라는 것을 다룬 수많은 책들 중에서 손꼽을만한 ‘역작’에 해당되는, 충실한 연구서다. 저자들은 영국 학자들인데 근대 이후 폭넓은 기간을 놓고 ‘지구화’라는 현상을 영토국가/폭력과 분쟁/지구적 시장과 무역/지구적 금융과 기업/인간의 이동/환경 문제 등 분야 별로 여러 측면에서 조목조목 분석한다.
집중적으로 다루는 것은 20세기이지만 분석 대상이 되는 기간은 그 전부터 대략 200년에 걸쳐 있기 때문에 꽤 폭이 넓다. 이 책은 1990년대에 쓰여진 것이어서 수치 자료 같은 것들은 지금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몇 년 새에 쉽사리 변하는 수치들에 영향 받지 않을 만큼 포괄적으로 지구화를 다루기 때문에 그다지 시기적으로 뒤쳐진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저자들은 토머스 프린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물론 이 책은 한참 뒤에 나온 것이지만)처럼 낙관론만 쏟아부어대는 ‘과도한 지구화론자’들과, ‘세계화 따위는 없어!’라고 외치는 회의론자들의 중간에서 지구화를 바라본다. 지구화는 실재하는 현상이지만 지구상 모든 지점이 글로벌라이제이션에 평정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당연한 것 같지만 과도한 지구화론자들과, ‘평평하지 않다’는 것에 지나치게 목숨거는 회의론자들은 의외로 많다. 나 자신도 그 두 갈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반대편을 놓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곤 한다.

워낙 꼼꼼하게 방대한 자료를 담은 책인지라, 재미있다 혹은 재미없다로 얘기하기는 힘들지만 다 읽고나니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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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 실패한 국가, 미국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 지음, 강주헌 옮김 / 황금나침반 / 2007년 2월
절판


베트남과 이라크를 비교하는 것도 잘못이다. 베트남에서 워싱턴은 바이러스를 박멸하고 주변 지역을 예방접종하면서 전쟁의 주된 목적을 성취했다. 그리고 황폐한 땅으로 변한 베트남이 주권을 마음껏 누리도록 철수했다. 이라크의 상황은 아주 다르다. 이라크는 완전히 파괴시킬 수도 없고 포기할 수도 없는 당이다. 너무나 가치가 큰 땅이다. 따라서 진정한 주권이나 제한적 민주주의도 너무 위험해서 쉽게 허락할 수 없다. 가능하면 이라크는 완전한 통제 하에 있어야 한다. -258쪽

"2005년1월의 선거가 실행되었던 이유가 미국 주도의 점령 당국이 제시한 세 안을 거부한 아야톨라 알리 시스타니의 강경한 입장 덕분이었다"고 보도한 파이낸셜타임스의 결론에 반박할 평론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중동 전문가 앨런 리처즈도 "미국은 애초에 조기 선거를 반대했지만 아야톨라 시스타니가 추종자들에게 길거리로 뛰쳐나가 조기 선거를 요구하라고 지시하자 워싱턴은 그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확인해주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야톨라 시스타니는 돌격 명령을 내렸다. 새 정부는 미국의 지도자나 미국이 지명한 지도자가 아니라 직접 선거로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야톨라 시스타니의 뜻이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고 보도했다. 종군기자 패트릭 코크번은 "미국이 시아파 폭동을 진압할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면서 조기 선거는 미국의 일관된 입장인 것처럼 즉시 돌변했다"고 덧붙였다.
... 이라크에서 점령군은 어쩔 수 없이 선거를 허락했지만 그 선거를 뒤엎어 버릴 방법을 궁리했다. 미국 측 후보자 이야드 알라위에게 온갖 이점이 주어졌다. 그러나 알라위는 12퍼센트의 득표로 3위 밖에 하지 못했다.
...선거는 ‘민족별 인구조사’를 방불케 했다. 시아파는 대부분 시스타니의 시아파 후보에게 투표했고, 쿠르드족은 쿠르드족 후보에게 투표했다. 수니파는 선거 참여를 거부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미 점령군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의 승리였다. 투표가 있던 날, 시아파와 쿠르드족은 뜨거운 열정과 용기를 가슴에 품고 "이 땅에서 자신들의 정당한 힘을 요구하기 위해서" 투표장으로 달려갔다.
... 미국의 목표를 지지하는 엘리트 계급이 권력층을 차지하는 상의하달식 구조를 띄는 ‘민주주의’가 미국의 바람이었다. 월스트리트저널의 요쉬 드레젠은 "이라크의 차기 정부를 끌어갈 듯한 사람들은 일요일의 선거가 끝나고 권력을 공식적으로 쟁취하자마자 철군을 요구하기로 약속했다"는 보도로 워싱턴의 고민을 요약해 주었다.-28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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