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바람님 서재에 갔더니, 내가 태어난 해의 연표는 아예 없다. 난 늙은 것인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아직도 얼마나 젊고 귀여운데 -_-;;
생각난 김에- 3년 전에 내 홈에 올렸던 글에 뒷부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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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히친스에 따르면 내가 태어난 1971년은 "'대량 학살'이라는 단어가 너무 쉽게 받아들여진" 해였다. 지금은 방글라데시라는 이름으로 되어 있는, 동파키스탄이라는 곳에 주재했던 미국 영사관은 이른바 '피의 전문'으로 알려진 항의문에서 그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는데, 내가 서른 두살이 된 지금도 대량학살이라는 말은 뉴스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당시 그 항의문을 만든 아처 블러드 다카 주재 미국 총영사는 미국 정부가 동파키스탄의 대량학살에 관여했다고 자기네 정부를 비판했는데, 각종 학살에 미국이 관여하고 있다는 비판은 아직도 유효하다.
나는 대량학살이 하나의 용어가 됐던 그 해, 선글라스를 낀 군인이 탱크를 앞세워 한국에서 '혁명'을 일으킨지 딱 10년되던 날에 세상에 나왔다. 그때 우리 집은 아주 돈이 없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두고두고 내게 먹일 분유값이 없어서 감자가루를 물에 타서 먹였다는 얘기를 하셨다. 왜 그랬을까. 오빠는 일제 모리나가 우유만 먹고 자랐다고 했는데, 왜 내가 태어났을 때는 그렇게 돈이 없었을까^^

아장아장 걸을 무렵에는 미국과 중국의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있었고, 그 다음해에는 동독과 서독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 동쪽과 서쪽으로 나뉘어진 독일 이야기는 한반도의 상황과 빗대어,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고두고 교과서에서 밑줄쳐가며 외워야 했던 사안이었다.
1973년에는 이른바 제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고 전세계가 석유파동을 겪었다. 석유 이야기 또한 얼마나 싫도록 들었는지. 지금 하고 있는 일 때문에 유가 움직임에 관심을 쏟을 수 밖에 없는데, 수억년전 동물들의 시체가 썩어 생긴 검은 물, 이것에 목매달고 사는 일은 내 생애의 언제쯤에나 청산될 것인지 궁금하다.

1978년은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해였다. 처음으로 사회생활 시작. 내가 다녔던 국민학교(초등학교)는 화장터 자리에 지어진 것이었는데 아주 큰 은행나무 부부가 있었다. 내가 국민학교 4학년 때에야 수세식 화장실이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입학식 다음날,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손잡고 학교에 오는데 나는 혼자서 등교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의 그 당혹감과 헤매던 기억은 나에겐 일종의 '뇌의 상처'와 같은 것이다.

국민학교 2학년 때에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너무너무 가난한 나라' 정도로 인식됐던 아프간이 조금은 다른 (긍정적인) 이미지로 내 머리 속에 들어온 것은 중학교 무렵이었던 것 같다. '모던 실크로드 따라 2만리'라는 역사기행 류의 전집이 집에 있었다.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 책 중 한권에 바미얀 석불과 난(nun) 빵을 구워먹는 아프간 사람들의 사진이 실려있었다. 몇해전 월러스틴의 책(제목이 생각 안 나네)과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에서 소련의 아프간 침공이 세계 체제에 미친(정확히 말하면 양키들에게 준) 충격에 대한 것을 읽었는데, 이 불쌍한 민중들은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출구를 찾기 힘든 미로에서 죽어가고 있다.

이란과 이라크는 '이란-이라크전쟁'이라는 식으로, 언제나 함께 붙어다니는 말이었다. 1980년에 두 나라는 전쟁을 치르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 대통령이 피살됐다. 국민학교 6학년 때였나, 사다트의 전기를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 때에는 발칙하게도 사다트의 뒤를 이은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1985년에는 머리에 지도가 그려진 사람(나와 내 친구들 사이에서 왠일인지 인기가 있었던)이 소련의 집권자가 됐다. 이듬해에는 체르노빌에서 원전 사고가 일어났다(고등학교 시절의 지리선생님은 환경재앙이라는 몹시도 생소한 개념에 대해 강한 어조로 말을 했었다). 85년에 나는 <데미안>을 읽었고, 옆자리 아이에게서 재미난 소설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연희3동 B지구 아파트에 살던 소녀와 아주 친해졌다.

중학교 3학년 때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임춘애 서선앵 이런 선수들이 '가난을 이겨내고' 눈물겨운 승리를 일궈냈다는 휴먼스토리가 세상을 채웠다. 중학시절 내내 이선희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고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조숙하게도(난 그렇게 생각한다) 김기덕과 김광한의 코멘트에 귀를 세우고 있었다. 그 사이에 건국대에서는 대학생들이 농성을 하다 잡혀갔고 TV는 연일 헬리콥터가 삐라를 뿌려대는 모습과 대학교 건물에 매달린 학생들의 모습을 비췄다.
중학교 3학년 때였던 것 같다. 그때의 모든 순진한 애들이 그랬듯이 나 역시 성(性)이라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도, 관심도 없었다. 난 항상 읽을거리가 부족했고, 책이 고팠기 때문에 닥치는대로 무엇이든, 활자로 된 것은 정말 '무엇이든' 읽어댔다. 그 중의 하나가 '권인숙양 성고문 사건'에 대한 글이었는데 그 내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주황색 겉표지에 아마도 까만 별 하나가 그려져 있었을(<실천문학>이 그렇게 생겼었다) 문학잡지에서 손가락 잘린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경악했다.

고등학교 1학년, 학교 밖 세상은 극악스럽고 폭발하는 것 같았던 그 해에 난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공부를 열심히 하겠다고 마음먹은 아이처럼.
1학년 때에는 좀 어리버리했었지만, 2학년 때 나는 공부를 잘 했다. 집에는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들이 있었는데, 모의고사 성적표가 나온 날이면 밖에 나가계신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승전보를 전하는 것이 생활의 기쁨이었다. 난 참고서도 많이 사지 않았고, 팬시용품 같은 것에 돈을 쓰지도 않았다. 과외는 금지돼 있었다. 얼굴이 잘 생기고 노래 잘 하고 몹시 감상적이었던 남자친구와 서울시내 곳곳을 놀러다녔다. 모든 것이 재미있었다. 담임선생님이 공부 잘하고 착한 나를 1년 내내 야단쳤던 것만 빼면.

그 때 친구들과 동인지를 만들었는데 우린 그냥 친구끼리 백일장 하듯 혹은 놀이를 하듯 자작시를 써보고 연작소설을 만들었을 뿐이었다. 친구들 중 생각 깊었던 아이가 통일에 대해서도 글을 써보자고 했는데 우리의 수준은 아주 낮았다. "통일 되면 좋겠다" "그렇지만 걱정되는 것도 많다" 수준으로 공책 두어장 분량의 글들을 써서 묶었는데, 그걸 아셨던 국어선생님은 복도에서 나를 불렀다. 강남에 있는 S고등학교에서 그런 문집을 만들었던 아이들이 모두 정학처분을 받았다는 것이다. 선생님은 그러면서도, 호암아트홀에서 내게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를 보여주었고 나와 내 친구들을 노찾사 공연에 데리고 가주었다.
베이징의 천안문 광장에서 숱한 젊은이들이 탱크와 군화발에 짓밟혔던 그 해에 나는 인생 처음으로 수험생이 됐다. 대단한 해였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많은 사람들이 벽 위에서, 혹은 벽에 손을 대고 환호성을 지르는 장면이 브라운관에 비춰졌다. 어머니는 "세상에 베를린 장벽이 결국은 무너지는구나"라고 말을 하셨다.

대학 1학년 때에는 보통의, 많이 헤매고 발랄한 새내기였다. 이듬해 걸프전 발발. 4월26일에는 김세진 이재호열사 추모집회가 있었고, 집회 말미에 사회자가 "강경대라는 학생이 죽었다"고 했었다. 그해 5월은 끔찍했다. 여러 사람이 죽었고 난 친구들과 하루 걸러 한번씩 가두집회에 나갔다. 대학 3학년 때, 드디어 소비에트 연방은 완전히 해체되고 잠시 보수파의 '3일 쿠데타'가 있었다. 소개팅으로 만났던 아주 귀엽게 생긴 남자아이와 소련 사태에 대해 얕지만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우루과이라운드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종로에서 열렸다. 그리고 연말에는 대통령 선거. 당시의 남자친구는 이른바 '맹' 계열(무슨 말인지는 아는 사람만 알 것이다)이었다. 만나기만 하면 정치 얘기를 했고, 주로 '싸웠다'. 결국 내가 손꼽을 수 있는 '단 한번의 연애'였던 그 남자친구와의 만남은 아주 처참하게 끝나버렸다^^

자유주의자로 알려진 빌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됐지만 우리나라의 대통령 자리는 발음 불분명하고 맹꽁이같은 인물에게 돌아갔다. 이듬해에는 세계무역기구가 출범했다. 대학교 4학년. 앞날이 불투명한 그 시기. 난 기숙사-하숙-자취를 전전하며 백수 비슷한 생활을 했다. 친구와 함께 쓰던 방은 늘 여인숙같았고 여러 선후배들이 들락거렸다.
1994년, 코스모스 졸업을 하고 몇곳에 입사원서를 냈다. 지금의 회사에 '당첨'돼 이듬해 1월초부터 직장생활 시작. 신생언론사였던 회사는 1년 내내 시끄러웠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파업이 있었다. 이듬해에 클린턴이 미국 대통령에 재선됐다. 가을에 나는 결혼을 했다.

1997년 홍콩이 중국의 품으로 돌아갔다. 불꽃놀이 사진들이 신문 국제면을 장식했다. 다이애나비가 죽었고 마더 테레사가 숨을 거뒀다. 그 다음해는, IMF라는 단어로 기록됐다. 아주 불안했고 나라가 망할 것만 같았다. 우리 회사는 일종의 종업원지주회사로 바뀌었고 난 휴지조각같은 주식 몇만주를 갖게 됐다.
남편과 허구헌날 싸우던 지겨운 시기가 지나고 2001년 꼼꼼이가 생겨났다. 꼼꼼이가 엄마 뱃속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아마도 '테러'와 '전쟁'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꼼꼼이가 세상에 나왔고, 여름에는 월드컵이 열렸다. 내 인생에서 가장 열광적이었던 여름을 보냈다.

이상, 내 인생 서른다섯해. 뒷이야기들은 앞으로 35년 후에 다시 정리해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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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케 현상 2005-07-06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오 대단도 하셔~

입학식 다음날, 다른 아이들은 엄마와 함께 손잡고 학교에 오는데 나는 혼자서 등교했다. 국민학교 1학년 때의 그 당혹감과 헤매던 기억은 나에겐 일종의 '뇌의 상처'와 같은 것이다.
<---저도 입학식 다음날 혼자 등교한 것 같긴 한데^^ 제 충격은 그날 교과서를 반애들이 줄줄 읽고 있는데 혼자 까막눈이었다는-_- 급기야 그날 선생이 나를 일으켜서 읽기를 시켰는데...이정도는 되야 '뇌의 상처' 아닐까요^^

돌바람 2005-07-06 11: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0년대로 왔다가 다시 올라갈 거여요. 어쩌면 선사시대까지 올라갈지도 모른다구요. 그래도 그때그때 생각난 것들 찍어주세요. 좀 도식적이긴 하지만 거기다 살을 좀 붙여주신다면 저로선 영광이겠사와요.

호암아트홀에서 내게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타임즈>를 보여주었고, 어 여기서 우리 또 스치고 지났겠는데요. 전 중학생이었는데.
"강경대라는 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 그날 건대앞 서점에서 들었구요. 이땐 고등학생이었구요. 담날부터 머리털이 하얗게 탈색될 정도로 차도로 뛰어다니다 성균관대 '김귀정열사'와 같은 대열에서 움직이다 압사 직전에 빠져나왔죠. 몇 시간 뒤 김귀정이 죽었다는 소식 듣고 을지로 지하도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내겐 신발도 없었죠. 맨발로 동대까지 걸어가던 그때를 잊을 수가 없어요. 전경들이 치고 들어온 그곳이 고등학생 대열이 깃발 들고 나간 지점이었거든요. 얼마전 파라다이스 쪽 일을 좀 했었는데 거기 이사가 당시 교육부장관이었던 정원식이란 글자를 보자마자 얼마나 치가 떨리던지요. 휴~~

길어졌네요. 또 아프네요.

로드무비 2005-07-06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이 페이퍼는 주인의 페이퍼도 페이퍼지만 댓글들도 무지 재밌겠습니다.
돌바람님과 산책님 댓글 잘 읽었고요.
돌바람님도 그날 신발을 잃어버리셨군요, 흑.(제 페이퍼 보셨죠?)
딸기님, 35년쯤 더 살아서 님의 뒷얘기도 들어보고 싶네요.^^

로드무비 2005-07-06 1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가 아직도 얼마나 젊고 귀여운데......
그 말에 실컷 웃고 갑니다.^^

엔리꼬 2005-07-06 1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70년 언저리쯤에 베트남전 와중에 입수된 모리나가 분유(drymilk)가 유행이었다. 참전군인이셨던 아버지의 노력으로 나도 모리나가 분유를 먹었던 적이 있었단다. 분유와 함께 들어있던 모리나가 숟가락은 30년이 지난 지금 우리 아들, 딸이 쓴다.
- 연도를 따졌을 때 딸기님은 대학입학 재수를 안했다.
- 92년 당시 딸기님의 남자친구는 '컴맹' 계열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땐 대부분은 다 컴맹이었다. 인터넷이 없었던 시절 컴퓨터로 뭘 했었는지가 궁금하다.

딸기 2005-07-06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들이 정말 재밌군요
돌바람님, 김귀정열사 숨졌을 때 저도 바로 그 근처에 있었답니다. 저는 가방 잃어버린 것은 물론이고, 넘어져서 깔려서 진짜로 죽는 줄 알았답니다.
정원식, 생각만해도 치가 떨리지요. 지금 김지하에 대한 생각은 많이 다르긴 합니다만, 아무튼 당시 김지하라는 이름이 어떻게 들려왔는지를 생각하면. 그리고 박홍 부분에 이르면 도끼로 쳐죽이고 싶다가도 도끼가 아까워지지요.

다 지난 얘기를, 그것도 오래전에 써놓은 글을 올려놓았다가 민망해져서 지우려고 들어왔는데 댓글들이 재미있어서 못 지우겠네요 ^^ 산책님과 로드무비님도 다시 오셔서 에피소드 하나씩 남겨주고 가세요.
서림님, 당시의 제 남자친구는 물론! 컴맹이었습니다 ^^ 저는 뭐였는지 아세요? 전 바이러스;;였답니다. 학생회실 컴퓨터, 몸도 마음도 돈도 넉넉했던 친구가 갖고 있던 컴퓨터, 모두 제가 고장내고 제가 포맷 -_- 해버렸거든요. 컴퓨터가 머라머라 저한테 묻길래 (무조건) 예스,를 눌렀는데, "Are you sure?" 이러는 거예요. 아니 이 건방진 기계를 봤나, 눌렀으면 시킨대로 해야지 어따대고... 이러면서 당근 또 예스를 눌러댔지요. 알고보니 그게 포맷하겠냐는 질문이었대요. 친구들한테 두번 씩이나 맞아죽을 뻔 했답니다.

딸기 2005-07-06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 추천하셔야죠!

숨은아이 2005-07-06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일은 그닥 되돌아보지 않지만... 그랬군요. 그랬어요. 근데 저랑 같은 해에 결혼하셨나 봐요. ^^

2005-07-06 17: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5-07-06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저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어요. 솔직히 여기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 것도 많이 찔려요. 바보같기도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