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책상위에는 책이 쌓여 있고, 나는 요즘 날마다 인터넷 서점을 들락거리고 있고, 비록 최근에는 책을 사지 않았지만 내가 이 서점에 쏟아부은 돈도 상당한 액수에 이르며, 심지어 책에 대한 글을 쓰는 블로그까지 갖고 있다. 그런데 책에 대한 애착은 갈수록 줄어만 간다.

책상 위의 책들을 하나 하나 불러본다. 시인이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추억과, 이국 여자애들 이름까지 다 불러봤던 것을 기리며. 책꽂이에 '신화의 힘', 책꽂이에 '엘러건트 유니버스', 책꽂이에 '신의 전사들', 책꽂이에 '도도의 노래', 파올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와 타셴에서 출간된 영어판 작은 화집들... 허망하다. 저 책들을 씹어넘기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지적 허영심과 후까시를 향한 욕망을 여실히 드러내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책은 내게 '눈으로 읽고 손으로 흘려보내는' 것들이 되었다. 원래부터 애착이 없었나? 그것도 맞다. 책을 읽어제끼고 누구한테 줘버리거나 재활용상자에 내다 버리거나 사무실 귀퉁이에 '주인없는 책'으로 매장시켜 버리는 것이 나의 독서사이클이며, 기어이 그 신세로 전락하는 것이 내 책들의 운명이다.

언젠가 알고 지내는 후배는 "무인도에 갖고 갈 것들"하는 류의 심리테스트성 질문에 당당하게 "책"이라고 답하더라. 또 누구는 스스로 "책탐이 많다"하고, 또 누구는 "죽어도 책은 못 버린다" "책은 아무에게도 안 빌려준다"고 하는데 나는 영 그런 '책과 관련된 룰'이 없다. 굳이 룰을 따진다면, 책이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이니... 마치 돈처럼 돌고 돌되, 안돌아도 그만 돌아도 그만, 이라는 있으나마나한 룰이다. 책이라는 물질은, 그 네모진 덩어리 자체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져버린 것이다.

책방 블로그에서 이 따위 소리를 늘어놓자니 좀 이상한데, 책을 읽는다는 것에 너무나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종종 보았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테레비를 보고 영화를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정보를 습득하기 위한 일련의 행위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책을 읽는 사람들이 그 행위 자체를 높이 숭상하면서 자부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무엇이 스스로를 '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 자부하게 만드는가? 책을 통해 얻은 지식이 많음을 자랑하는 것인지, 책에 퍼부은 돈이 많음을 자랑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시커먼 글자들과 그 사이 희뿌연 여백에서 얻은 상상과 행복과 기쁨을 예찬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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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구두 2004-03-2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게요.
왜 그리 욕심이 없으신지...
책 다 읽은 건 버리지 말고, 꼭꼭 싸매두었다가 절 주시오.

딸기 2004-03-3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두님이야 워낙 다독이시니... 제가 읽은 책들은 이미 진즉에 구두님 손을 거쳐갔던 것들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바람구두 2004-03-31 1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슨 그런 말씀을...
책이란 많고도 많은 것인데...
제가 어찌 다 읽는단 말이오.
그러지 말고, 좀 주시오. 흐흐.

비로그인 2004-10-07 0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수업시간에 집에 불이 나서 단 한가지만 갖고 나와야 한다면 무엇을 갖고 나올 것인가를 놓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거기 모인 학생들의 거의 대다수가 책이라고 대답했었지요. 저도 그 중의 한사람이었습니다. 무엇이 우리 모두를 그렇게 대답하게 했을까?

그때 일을 두고두고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딸기 2004-10-07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끄럽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뭘까... 제가 페이퍼에 쓴 내용과 일맥상통하는 얘기라면 이해가 가기도 하는데요, 어떤 이유이신지 알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