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깨너머의 연인
유이카와 게이 지음, 김난주 옮김 / 신영미디어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출판시장이 꽁꽁 얼어붙었는데 일본 소설만 잘 팔린다는 통계조사가 나온 모양이다. 하긴, 한국 소설 읽은지 오래된 나도 최근 몇년간 일본 소설은 읽었으니까. 무라카미 류, 무라카미 하루키, 마루야마 겐지, 요시모토 바나나, 아사다 지로 같은 소설가의 책들. 
다만 국적이 일본이라는 이유로 저 소설가들을 줄줄이 묶었지만, 실상 저들의 소설은 스타일이 제각각이다. 소설들이 주는 재미도 작가에 따라 다르고, 주제나 분위기도 모두 다르다. 나름의 재미가 있고 나름의 장점이 있다. 그러니 일본 소설이 이러저러해서 재미있다고 딱 잘라 말하긴 힘들다.

소설보다 내가 더 좋아하는 것은 드라마인데, 책방에서 드라마 얘길 하려니 좀 우습지만-- '맘에 드는 드라마'를 꼽으라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MBC에서 방영했던 '아줌마'와 SBS에서 몇년전 내보냈던 '퀸'이다. 여성성이라는 것, 혹은 젠더라는 문제를 경쾌하면서도 새롭게 다룬 드라마들이었다. '아줌마'의 원미경이 못나 터진 남편과 헤어져서 장사를 시작하고, 곁에 있어줄만한 남자를 만났는데도 결혼보다 장사에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더불어 남편을 빼앗아가려했던 연적 심혜진과도 묘한 우정을 나눈다는 결말. 
'퀸'도 마찬가지였다. 노처녀 이미숙이 결혼이 아닌 사업을 선택하고, 당차고 자의식 강한 김원희는 항공기 조종사가 되고, 애교 만땅이던 윤해영이 봉사활동 나서고, 지금은 한국의 대표적인 여배우로 자라난 이나영(그땐 연기 진짜 못했는데) 또한 자기의 길을 찾는다는 내용. 연애 이야기로 시작해 연애 이야기로 끝나되, 그 끝은 연애/결혼이 아닌 새로운 인생. 사랑은 인생의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인 동시에, 사람을 성장하게 해주는 학교이기도 하다. 사랑을 차버리지 않으면서 쿨하고 경쾌하게 성장과 꿈, 새로운 모색까지 이야기하는 드라마들. 영화 '싱글즈'도 비슷했던 것 같다.  
'아줌마'보다 두어해 먼저 방영됐던 '퀸'을 보면서 무릎을 쳤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드라마가 있다니! 나중에 보니 일본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것이라고 했다. 원작 소설인 '여자들의 지하드'는 못 읽어봤다. '싱글즈'도 일본 소설을 리메이크한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어깨 너머의 연인'은 쉽게 책장을 넘길 수 있는 책이다. 가볍다면 가벼운 연애소설. 두 여자, 그리고 몇명의 남자들, 그들이 엮어가는 사랑 이야기. 
사랑은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인생이다. 사랑은 인생의 빼놓을 수 없는 일부분이지만 인생 그 자체는 아니다. 소설의 결말 부분은 '싱글즈'하고 거의 똑같다. 사랑의 결말에는 단 한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사랑의 형태 또한 제각각이라는 것-- 이를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가 사회의 자유도/성숙도를 판가름케 해주는 지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성애를 인정하느냐, 동거 커플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느냐, 결국 '사랑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것이 문제다. 우리 사회는 이런 면에서 아직은 자유도가 굉장히 낮은 사회다. 
  
그래서 일본 소설을 읽는다. 가볍다고? 흔히들 일본 소설이 가볍다고 말한다. 아마도 일본 소설 전체를 평가하는 말은 아닐 것이고, 맨 위에서 언급했던 최근 국내 유행중인 '인기 작가들'(마루야마 겐지는 좀 다르지만)에 대한 평가 쯤 될 것이다. 
저들의 소설이 '가볍다'는 평가에는 쉽게 동의해줄 수 없지만 쿨하고 경쾌한 측면은 분명히 있다. 자유도가 낮은 사회에서, 사랑마저 제도적 억압의 대상이 되는 사회에서, 그 억압을 조금이라도 없애주는 것 같은 소설을 읽으면서 해방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어느 광고의 카피였던 것 같은데.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고. 정말 맞는 말이다. 아주 작은 차이, 예를 들면 연애소설의 주인공이 사랑하는 남자와 역경을 헤치고 '결혼한다/안 한다' 같은 차이가 그저 평범한 연애소설과, 명품 소설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 아닐까. 질척질척한 대한민국 사회에서 남의 나라(그 나라도 그닥 경쾌하진 않지만) 소설가들의 쿨한 소설을 읽으며 잠시 대리만족을 맛보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죄 없는 자, 나를 돌로 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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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05-01-15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싱글즈 원작소설' 29세의 크리스마스' 먼저 봤었는데, 제가 비슷한 나이여서, 막 공감하면서 봤던 기억이 나네요. 근데, 요즘은 (가벼운?)일본소설들( 내용은 없고, 감정만 있는;;) 이 유난히 안 읽혀요. 읽다가 접어둔 책들이 한두권이 아니네요. (미루야마 겐지와 아사다 지로는 빼고요)

딸기 2005-01-15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루야마 겐지는 너무 무거워서 잘 안 읽히죠 ^^

딸기 2005-01-16 1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마루야마 겐지 작품 별로 안 읽었어요. '언젠가 바다 깊은 곳으로'였나, 제목만큼 멋진 소설이었죠. 그 다음에 단편집 하나 읽고, '천년동안에'로 넘어갔어요. '천년동안에' 읽고 나니까 저 아저씨가 멋져 보이더군요. 그 책은 참 좋았어요.
그래도 아무튼 쉽게 손에 잡히는 작가는 아니죠.

nemuko 2005-01-17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동안 저도 일본작가들인 쓴 소설은 거의 무조건적인 애정을 갖고 읽었습니다. 딸기님 표현대로 질척하지 않은 그들의 표현방법이 맘에 들어서였던 것 같기도 하고, 대체로 나의 예상대로 굴러가지 않는 내용이 좋기도 했구요. 지금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굳이 찾아 읽게 되지는 않지만, 여전히 우리나라 소설보다는 좀더 관심이 가긴해요.

nemuko 2005-01-17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구 '여자들의 지하드' 읽어봤는데, 드라마보단 그래도 훨씬 설득력이 있던데요. 전 그 소설을 먼저 읽어선지 '퀸' 짜증내면서 봤어요^^

딸기 2005-01-17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요? 전 퀸 보면서 환장했었는데... (원래 환장이 취미인 인간이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