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요원전西遊妖猿傳 대당편大唐篇 1 - 서두序頭 화과산花果山의 장章
p.009
“자, 그럼 지금부터 들으실 이야기는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는 ‘대당삼장취경시화大唐三藏取經詩話’ 올시다.”
『대당삼장취경시화』는 남송(南宋) 말엽에 간행된 화본(話本)이다. 화본은 송나라 때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직업적 이야기꾼들이 쓰던 대본이다. (이후 원(元)나라 중엽부터 서유기 관련 희곡 대본과 산문체 소설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꾼이 『서유요원전(이하 요원전)』을 진행하는 시기는 남송말엽에서 원초가 아닐까 하는데 이건 별로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유기(西遊記)』 대신에 그 원형인 『대당삼장취경시화』를 원전으로 선택한 것일까? 그 이유는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는데) 『대당삼장취경시화』는 『서유기』와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대당삼장취경시화』의 주인공은 현장(玄奘) 법사이고, 손오공(孫悟空)은 흰 옷 입은 선비 후행자(候行者)로 나타나며 게다가 조연급이다. 저팔계(豬八戒)는 등장조차 하지 않으며 사오정(沙悟淨)으로 추측되는 심사신(深沙神)이 등장한다. 즉 이 두 판본들과의 공통점은 오직 ‘당나라 스님이 경을 가지러 떠나’던 역사적 사실뿐이다.
즉, 『요원전』이『서유기』 가 아닌 『대당삼장취경시화』를 원본으로 삼는다는 것은 『서유기』라는 원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자신의 이야기를 창작할 수 있기도 하고, 동시에 『요원전』이 『서유기』의 또 다른 판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작가의 야심을 내비치는 것이기도 하다.
p.009
“하루에도 이백만이 넘는 백성들이 동원되어...”
누노메 조후・구리하라 마쓰오 『중국의 역사 [수당오대]』에서 언급한 이 거대공사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이 동경 조영을 위해 동원된 인민은 매월 2백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수였다. 당시, 수(隋)왕조의 지배하에 있던 인구가 4천 6백만이었음을 고려하면, 그것이 얼마나 과중한 것이었는지 한층 더 확실해질 것이다. 이 수도 조영공사는 수양제(隋煬帝) 즉위 직후인 605년(대업 원년) 3월에 시작되어 다음 해 정월에 완성되었으므로 모두 2천만 명 정도가 각각 1개월 동안 동원된 셈이다.”
p.010
양씨가 천기를 어지럽히니
봉화가 변방의 하늘에서 타올랐다네.
왕조가 전란으로 무너지고
도적이 산간에 들끓었다네.
백성이 황야를 방황하고
산귀山鬼가 인심을 미혹했다네.
신괴神怪의 위엄을 알고 싶은 자,
귀를 기울여 보시오.
이 요원전妖猿傳에...!
이 시구는 『서유기』의 1회 맨 앞에 나오는 시구를 변형한 것이다.
混沌未分天地亂,茫茫渺渺無人見。
自從盤古破鴻蒙,開辟從茲清濁辨。
覆載群生仰至仁,發明萬物皆成善。
欲知造化會元功,須看西游釋厄傳。
혼돈이 갈라지지 않아 하늘과 땅은 어지럽고,
아득하기 짝이 없어 인간은 보이지 않네.
태초에 반고씨(盤古氏)가 자연의 원기(元氣)를 깨뜨리고 나서
천지개벽이 이루어지고 청탁(淸濁)이 나뉘었다.
온갖 생물을 덮고 실어주어 어질게 되기를 바랐고,
만물의 이치를 밝혀 모두 착하게 만들었다.
천지 조화를 이룩한 회(會)와 원(元)의 공(功)을 알려거든
모름지기 『서유석액전(西遊釋厄傳)』을 볼지어다.
- 임홍빈 역 『서유기』에서 인용 -
『서유석액전』은 명(明)나라 주정신(朱鼎臣)이 엮은 『정계전상당삼장서유전(鼎鍥全相唐三藏西遊傳)』의 부제로, 주로 이 명칭으로 불린다. 모로호시 다이지로가 『서유요원전』이란 타이틀을 정할 때 이 판본의 제목을 참고해 정했다고 한다. 참고로, 서유석액전(西遊釋厄傳)이란, 서쪽으로 여행 중에(西遊) 재앙(厄)을 풀어내는(釋) 이야기(傳)란 뜻이다.
(사족을 달자면, 문지사, 솔, 동반인에서 출간한 『서유기』에서 모두 위의 시 중 ‘서유석액전’을 고유명사로 해석했는데, 고유명사 보다는 풀어서 쓰는 게 본문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나 더 덧붙이자면, 현장 스님의 출신 내력이 이 주정신 판본 『서유석액전』에 실려 있고, 후에 금릉 세덕당(金陵世德堂) 본에 8회와 9회 사이에 부록(附錄) 형식으로 삽입되어 있다.)
p.011
제1회 - 군웅(群雄)은 중원(中原)에서 사슴을 쫓고 영아(嬰兒)는 심산(深山)에서 야녀(野女)를 찾아 헤매다
‘중원에서 사슴을 쫓’는다는 표현은 군웅이 천하를 다투는 일을 표현하는 말로, 진(秦)나라 때부터 사슴을 황제에 비유한 것으로 전해진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수나라 말기를 기록한 부분을 보면, 군웅에게 사로잡히거나 혹은 유세를 할 때 “수가 사슴을 잃어서 호걸이 다투어 그것을 쫓고 있으니...” 하는 말들이 자주 나오는 것이 보인다.
숱한 인물들이 사슴 이야기를 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후량(後粱) 황제 소선(蕭銑)이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에게 사로잡힌 후 한 말이다.
“수가 그들의 사슴을 잃으니 천하 사람들이 함께 그것을 쫓았습니다. 저 소선은 천명을 받지 못한 연고로 여기에 이르렀습니다. 만약에 죄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에서 도망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소선은 끝내 큰 저자에서 목이 베어 죽었다.
영아(嬰兒)는 이 목차에서는 당연하게도 ‘어린 아이’를 뜻하지만, 도교(道敎)에서는 연단술(煉丹術)의 비방(秘方)이자 약물의 은어를 가리킨다. 도교에서 영아의 뜻은 ‘외단(外丹)’을 구워 만들 때에 쓰는 납을 가리키며 ‘내단(內丹)’을 수련할 경우에는 인간의 정(情)을 뜻한다. 『서유기』 19회와 22회 참조.
p.012
“이곳은 하남河南 지방의 어느 작은 마을.”
하남(河南)/하북(河北)의 河는 황허(黃河)를 가리킨다. 강을 기준으로 지역을 나눈 것인데, 지도로 보면 다음과 같다.
p.016
“그건 보통 원숭이가 아니로구먼. 필시 주염朱厭이라하는 요물일 게야.”
『산해경(山海經)・서산경(西山經)』에 주염이라는 짐승이 소개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소차산(小次山)이라는 곳에, ...... ) 어떤 짐승이 사는데, 그 생김새는 원숭이와 비슷하지만, 흰 대가리에 붉은 발을 가지고 있다. 이름은 주염이라 하며, 이것이 나타나면 큰 전쟁이 일어난다. 「有獸焉,其壯如猿而白首赤足,名曰朱厭,見則大兵。」”
이 주염이라는 짐승은 p.015에 나온 큰 원숭이를 이야기하는 것 같으며, p.014에서 ‘손 서방네 새댁’을 끌고 간 것은 가국(猳國)이다. (뒤에 확원攫猿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가국이 확실하다. 확원은 가국의 다른 말이다.) 시노다 고이치의 『중국환상세계』에 묘사된 가국은 다음과 같다.
“가국은 후확(猴攫), 마화(馬化) 등의 별명을 갖고 있으며 원숭이를 닮은 짐승이다. 촉(蜀, 사천성)의 서남쪽 고산지대에 살고 있었다. 신장은 7척(168.8센티미터)이고, 사람과 같이 직립 보행하며 달리는 속도는 인간과 비슷하다. 이 동물에 대해서는 장화(張華)의 『박물지(博物志)』, 간보의 『수신기』와 같은 많은 서적에 기록되어 있다.
가국이라는 동물은 아마도 수컷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손을 불리기 위해 인간의 여성을 이용했다. 그들은 자기네 지역을 지나는 여성 중 예쁜 여성을 골라 유괴한다. 일단 목표가 된 사람은 아무리 동행과 끈으로 몸을 묶는다 하더라도 도망칠 수 없다. 가국은 남녀의 냄새를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여성만을 노리며 남성을 유괴하는 일은 없었다. 인간의 여성들이 끌려가는 곳은 가국의 보금자리로, 그곳에서 여자들은 가국의 아내가 된다.
아이를 낳지 못한 여성은 인간 세계로 평생 돌아가지 못한 채 10년이 지나면 그 모습이 가국과 같아지며, 인간으로서의 의식이 희박해져 다시 인간 세계로 돌아가려 하지 않게 된다. 반면에 아이를 낳은 여성은 아이와 함께 집으로 돌려보내진다. 아이를 인간의 집에서 키우는 편이 유리하기 때문이다. 만일 아이를 키우지 않으면 그 벌로 아이의 어머니를 즉시 죽여 버린다. 그러므로 죽는 것이 두려워서라도 아이를 키우지 않는 집은 없다.
이렇게 태어난 아이라고 해서 성장 후 반드시 가국의 모습으로 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들 대부분은 인간과 다를 게 없다. 그러나 개중에는 가국의 모습으로 성장하는 경우도 있다. 촉 지방에는 양(楊)씨 성을 쓰는 사람들이 많은데, 전승에 따르면 이 성을 가진 사람들은 바로 가국의 자손이라고 한다.”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후에 『제괴지이』「산도(山都)」편에서 가국의 이야기를 비틀어 기이한 이야기를 만들었다.
p. 017
“한편 고구려를 침공했던 수의 대군은 참패를 당하고 말머리를 돌렸으니... 원숭이에게 끌려간 남편 손해孫該 역시 이때 전사하고 말았답니다.”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은 1차 612년, 2차 613년, 3차 614년에 이루어졌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 중 직접적인 대패를 당한 것은 1차 원정으로, 113만의 대군(실제 300만 이상의 인민이 직접・간접으로 종군한 것으로 추정)이 출정했으나, 요하와 살수에서 대패하고 회군했다. 이것으로 보아 손해는 611년에 징집되어 612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p.017
“하북河北에서 두건덕竇建德이 궐기했다. 우리도 전진하자!”
두건덕이 도적의 무리에 들어간 것은 611년이지만, 스스로 장낙왕(長樂王)이라 칭하고 하(夏)나라를 세운 것은 617년의 일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보자면 이 시기는 617년이 되어야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으로 보아 612년으로 추정된다.
p.018
“이런 세상에! 손 서방네 새댁 아닌가?!”
이런 흐름으로 보아 손오공은 612~617년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보이는데, 뒤에 신양선申陽仙과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할 때 612년에 태어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p.019
“천하에 열 명도 넘는 황제들이 난립하였으니 대체 이 무슨 꼴인지. 이것이 이른바 수말당초의 대란이었소이다.”
수양제의 고구려 원정이 모두 실패로 끝남과 동시에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민란의 분기점은 제 2차 고구려 원정 중에 벌어진 예부상서(장관)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으로 볼 수 있는데, 당시 납언(納言) 소위(蘇威)가 수양제에게 한 말은 의미심장하다.
“양현감은 조잡하고 소략하니 염려할 필요가 없으나, 이로 인해 점차 혼란이 이루어지는 단계가 될까 두렵습니다.” 결국 소위의 말대로 된 셈이다.
수양제가 죽기 전(617년) 왕이나 황제를 칭한 군웅들은, 수양제와 당고조 이연이 세운 꼭두각시 황제 공황제를 제외하고도 14명이나 된다.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태상황 양제 대업 13년
・공황제 의녕 원년 (당공 이연이 세운 수의 황제)
・황제 이홍지 4년
・황제 유묘왕 4년
・연국 만천왕 왕수발 3년
・가루라왕 주찬 3년
・초제 임사홍 태평 2년
・장락왕 두건덕 정축 원년
・무상왕 노명월 원년
・위공작 이밀 원년
・정양천자 유무주 천흥 원년
・양제 양사도 수륭 원년
・영락왕 곽지화 축평 원년
・서진 패왕 설거 진흥 원년
・양왕 이궤 원년
・양왕 소선 명봉 원년
p.022
“국원攫猨이구먼...”
국원攫猨이구먼... → 확원攫猨이구먼...
확원(攫猨)이라 읽어야 한다. 확원이란 앞서 이야기한 가국을 나타내는 다른 말이다. 『포박자(抱朴子)・대속편(對俗篇)』에, “후(猴: 원숭이)는 나이가 팔백 살이 되면 원(猿: 원숭이)으로 변하고, 나이가 오백 살이 되면 확(攫: 큰 원숭이)으로 변한다”고 했다.
p.024
“야녀는 야파野婆라고도 불리는데, 산발을 하고 무리를 지어 산야를 떠돌아다니는 짐승이라고 하지요.”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야파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장군 풍승액(豐昇額)을 따라서 옥문관(玉門關)을 나서서 돈황(燉煌)으로부터 4천 리를 떨어진 골짜기에 가서 자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장막 속에 두었던 목갑(木匣)과 가죽 상자가 없어졌습니다. 당시 같이 간 막려(幕侶)들이 차차 알아보니 잃은 것이 분명했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것은 야파(野婆)가 절도해 간 것이다’ 하므로 군사를 내어 야파를 포위했더니 모두 나무를 타는데, 나는 원숭이처럼 빨랐다고 합니다. 야파는 형세가 궁하매 슬피 울면서 즐겨 붙들리지 않고 모두 나무 가지에 목을 매어 죽으니 이래서 잃었던 물건을 모두 찾았는데, 상자나 목갑은 잠가 놓은 그대로 있었고 잠근 것을 열고 보니 속에 기물들도 역시 버리고 다친 것이 없었답니다. 상자 속에는 붉은 분과 목걸이와 머리꽂이 패물들을 많이 넣어 두었고, 아름다운 거울도 있었으며 또 침선(針線)과 가위와 자까지 있었는데, 야파는 대개 짐승으로서 여자를 본떠 치장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은 것이라 합니다.”
p.028
“이빙李冰 어른!”
이빙에 대한 이야기는 뒤에 현성이랑진군(顯聖二郞眞君)이 나온 후에 이야기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p.029
“화과산이라...”
『서유기』에서 화과산(花果山)은 동승신주(東勝神州) 오래국(傲來國)에 있으며 손오공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손오공은 폭포수 밑에서 복지동천(福地洞天) 화과산 수렴동(花果山水簾)을 발견하는데, 묘사한 것을 보면 거의 무릉도원에 진배없다.
바람이 몰아쳐도 피할 곳이 있고, 비가 쏟아져 내려도 몸둘 데가 있다네.
눈서리도 두려워할 턱이 없고, 천둥 벼락을 때려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네.
안개 노을이 항상 빛나게 감돌고, 상서로운 기운이 훈훈하게 피어나,
소나무 대나무는 해마다 푸르며, 기화요초는 나날이 새롭다네.
실제의 화궈산(花果山)은 장쑤성(江苏省, 강소성) 롄윈강시(连云港市, 연운항시) 경내에서 7㎞ 거리에 위치해 있는데, 허난성(河南省)과 장쑤성 사이에는 안후이성(安徽省, 안휘성)이 있기 때문에 『요원전』에서처럼 눈에 보이거나 직접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물론 작가는 실제의 화궈산이 아니라 신비한 화과산을 이야기하는 것이라 불필요한 설명이기도 하지만...
p.033
“관구신灌口神 이랑진군二郞眞君이시여. 십년에 걸친 전란으로도 모자라 해마다 계속되는 기근과 홍수가 백성들을 괴롭히니, 이들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끝내 산으로 들어가 두 번 다시 살아 돌아오지 못하는 불행한 일이 끊이지 않나이다. 이 이빙李冰은 백성들의 백 가지 고통 가운데 하나라도 덜어줄 수 있다면 미력이나마 온 힘을 다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부디 힘을 빌려주소서...”
『태평어람(太平御覽)』권882에 인용된 『풍속통의(風俗通儀)』에 이빙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진 소왕(秦昭王) 때 이빙이 촉(蜀)에 막 군수로 왔는데, 해마다 동녀(童女) 둘을 바치는 강신(江神)을 물리쳐 백성의 근심거리를 해소시켰다고 전한다. 이 때 이빙과 강신은 청회색 소로 변하여 싸웠다고 한다.
조금 더 후대의 이야기인 『태평광기(太平廣記)』 권291에 인용된 『성도기(成都記)』에서는 이빙은 소로 변하고 강신은 교룡으로 변해 싸웠다고 한다.
『요원전』에서 이빙이 찾아간 사당이 바로 숭덕묘(崇德廟)인데, 이 사당은 이빙 사후에 이빙을 주존(主尊)으로 모셨으나 자주 이상한 일이 발생해서 주존을 이랑으로 바꾸었다 한다. 이로 인해 이 사당의 이름을 이랑묘(二郞廟)라 했으며, 후에 숭덕묘로 개칭되었다고 한다.
관구신 이랑진군은 이랑신(二郞神) 또는 관구이랑(灌口二郞)으로 불리는데,『도강언공소전(都江堰功小傳)』에서 말하길 “이랑은 이빙의 둘째아들이라고도 하며 사냥을 좋아하였고 무척 용감했다고 한다. 이빙이 자기의 두 딸에게 화장을 시켜 강신에게 바치려 했었는데, 그 두 딸 중의 하나가 바로 딸로 변장한 이랑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그의 일곱 친구들과 함께 강물 속으로 들어가 교룡을 베어 죽였다.” 이랑신의 일곱 친구는 “매산칠성(梅山七星)”이라고 불렸다.
『서유기』에서 이랑장군은 두 번 등장하는데, 6회에서는 손오공을 사로잡는 장수로 나오며, (싸움 실력은 막상막하였고, 태상노군의 도움으로 가능한 일이었으나 어쨌든 손오공을 사로잡았다.) 63화에서는 구두부마(九頭駙馬)와의 싸움에서 도움을 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그 외 이빙의 치수와 거의 흡사한 내용으로 『사기열전(史記列傳)』「골계열전(滑稽列傳)」에 수록된 서문표(西門豹)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내용이 길어 옮기지는 않지만 매우 재미있으므로 읽어보시길... 이 이야기는 『동주 열국지(東周列國志)』 85회에도 있다.)
p.034
“평소라면 도저히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음식이겠으나... 권세를 등지고 산야에서 풀을 뜯어 연명한 옛 성인 백이와 숙제의 덕을 기리기에는 좋은 기회일 게야.”
목으로 넘어가지 않은 → 목으로 넘어가지 않는
백이와 숙제는 고대 중국 은나라 말, 주나라 초에 살았던 고죽군의 두 제후들이다. 『사기열전(史記列傳)』에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其傳曰 : 「伯夷·叔齊, 孤竹君之二子也. 父欲立叔齊, 及父卒, 叔齊讓伯夷. 伯夷曰 : “父命也.” 遂逃去. 叔齊亦不肯立而逃之. 國人立其中子. 於是伯夷·叔齊聞西伯昌善養老, 盍往歸焉. 及至, 西伯卒, 武王載木主, 號爲文王, 東伐紂. 伯夷·叔齊叩馬而諫曰 : “父死不葬, 爰及干戈, 可謂孝乎? 以臣弑君, 可謂仁乎?” 左右欲兵之. 太公曰 : “此義人也.”扶而去之. 武王已平殷亂, 天下宗周, 而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 及餓且死, 作歌. 其辭曰 : “登彼西山兮, 采其薇矣. 以暴易暴兮, 不知其非矣. 神農·虞·夏忽焉沒兮, 我安適歸矣? 于嗟徂兮, 命之衰矣!” 遂餓死於首陽山.」 由此觀之, 怨邪非邪?
(백이, 숙제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백이, 숙제는 고죽군의 두 아들이다. 아버지가 숙제를 세우려 했는데, 아버지가 돌아가게 되니, 숙제가 백이에게 양보를 했다. 백이는 “아버지 명령이다.”라고 말하며 달아나 떠났다. 숙제 또한 기꺼이 서려 하지 않고 달아나 버렸다. 나라 사람이 그 가운데 아들을 추대했다. 이에 백이, 숙제는 (주周나라의) 서백 창(문왕)이 노인을 잘 봉양한다는 말을 듣고 “어찌 그에게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했다. 주나라에 이르자 서백이 죽고, (아들) 무왕이 목주를 싣고 문왕이라 이름하고, 동으로 (은殷나라의) 주왕을 치려고 했다. 백이, 숙제가 (왕의) 말을 잡아당기면서 간하기를 “아버지가 죽었는데 장사를 지내지도 않고 창과 방패를 잡으니 효성스럽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하로서 임금을 시해하니 어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좌우에서 그들을 무기로 해치려고 했다. (이때) 태공이 “이들은 의로운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제지하며 그들을 가게 했다. 무왕이 이미 은나라 혼란을 평정하고, 천하가 주를 떠받드니, 백이, 숙제가 그것을 부끄러워하여, 의리로 주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서 숨어 지내며, 고사리를 캐어 먹었다. 급기야 곧 굶어서 죽을 지경에 이르자 노래를 지었는데, 그 노래는 이러하다. “저 서쪽 산(수양산)에 올라, 고사리를 캐 먹고 살세. 난폭함으로 난폭함을 교체하고, 그 그릇됨을 모르는구나. 신농씨, 우, 하의 선양의 도는 형체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으니, 나는 어디로 가 의지할까. 아아! 이제 죽으니, 명이 쇠약해서구나.” 마침내 수양산에서 굶어 죽었다.」 이 글로 그것을 생각해 보니, 원망함인가, 아닌가?
p.035
“오공입니다. 손오공... 산기슭 복지촌福地村 사람입니다.”
『요원전』에서 손오공이 사는 복지촌은 『서유기』의 ‘복지동천 화과산 수렴동’에서 가져왔음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힘든 곳으로 묘사된다. 그렇다면 ‘복지동천’이 빠진 화과산 수렴동은 어떤 곳일까?
p.037
“어디서 거짓을 고하는 게야! 고아현高雅賢이라는 역적이 이 근처에서 패거리를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내 모를줄 알았더냐!”
『자치통감(資治通鑑)』권189의 기록을 보면, 고아현은 두건덕 휘하의 제장들 중 한 명이다. 두건덕이 진왕(秦王) 이세민(李世民)에게 사로잡혀 죽은 후 “그의 휘하의 제장들은 모두가 놀라고 두려워하며 불안해하였다. 고아현은 망명하여 패주(貝州)에 도착”했고, 그 후 남은 장수들이 난을 일으키기로 모의, 유(劉)씨를 주군으로 삼는 게 길(吉)하다는 점괴로 유흑달(劉黑闥)을 주군으로 삼았다. 그 후 유흑달이 유현을 함락시키니 숨어있던 두건덕의 옛날 무리들이 점차 규합해서 반년 만에 두건덕의 옛날 영역을 회복하고 돌궐과 연합해 당을 압박했다. 낙양과 하북을 평정해 거의 천하 통일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당에게, 하북을 다시 빼앗은 유흑달이란 존재는 눈엣가시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돌궐은 지속적으로 당을 침략하기 시작, 결국 고제 무덕 4년(621년) 12월 정묘일(15일)에 (이연은) 진왕 이세민과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에게 명령을 내려서 유흑달을 토벌하게 했다.
『자치통감(資治通鑑)』권190의 기록을 보면 “유흑달은 (3월) 임진일(11일)에 고아현을 좌복야로 삼아서 군중(軍中)에서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는 것으로 보아 지금 『요원전』에서 다루고 있는 시기는 622년으로 보인다. p.023에서 “십 년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말로 미루어 볼 때 오공은 612년에 태어난 것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p.039
“우리 제왕 이원길 전하께서는 전공을 올리고 싶어 안달이 나셨군. 저런 풋내기가 대장군이라니, 부하 짓도 도무지 못 해먹을 노릇이라니까.”
『자치통감(資治通鑑)』권183의 기록을 보면, “애초에, 당공(唐功) 이연은 신무숙공(神武肅公) 두의(竇毅)의 집으로 장가를 들어서 네 아들을 낳았는데, 이건성(李健成)・이세민・이현패(李玄覇)・이원길이었고, 딸 하나는 태자의 천우비신(天牛備身, 태자궁을 경비하는 경호장교)인 임분(臨汾, 산서성 임분시) 사람 시소(柴紹)에게 시집갔었다.” 이원길은 넷째이지만 셋째인 이현패가 일찍 죽어 통칭 셋째로 칭한다.
이원길은 삼형제 중 전공이 가장 뒤떨어졌는데, 아마도 당 왕조의 창건과 그 안정에 막대한 공적을 올린 둘째 이세민에 대한 엄청난 열등감이 원인인 것 같기도 하다. 이원길은 무예가 남보다 뛰어난 청년이었으나 젊음을 믿고 난폭한 행동을 서슴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내용은 뒤에서 다루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