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그러니까 모든 것은 다 모로호시 다이지로(諸星大二郎) 선생 때문이다.



1. 모로호시 다이지로를 알게 된 것은 (아마도 한국의 평범한 독자들이라면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시오리와 시미코(栞と紙魚子)』시리즈 덕분이었다. 당시의 트렌드에서 많이 벗어나는, 성의 없다시피 보이는 선 굵은 그림체와 휑한 배경 때문에 처음에는 멀리 했었지만, 매 에피소드마다 언급되는 다양한 인문학적 지식(문학, 역사, 신화, 괴담, 그리고 작가 자신의 엄청난 상상력) 때문에 매 시리즈를 읽게 되었다. (물론 소재주의에 빠지지 않고, 자신이 언급한 것들을 한데 버무려 ‘재미있는’ 만화를 만든 작가의 위대한 작가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2. 그 이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다양한 작품들이 참으로 다양한 출판사에서 출간되기 시작했다. 『제괴지이(諸怪志異)』,『요괴헌터(妖怪ハンター)』시리즈와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진귀한 이야기(諸星大二郎 ナンセンスギャグ漫画集・珍の巻)』,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기묘한 이야기(諸星大二郎 ナンセンスギャグ漫画集・妙の巻)』는 시공사에서, 『사가판 조류도감(私家版鳥類図譜)』, 『사가판 어류도감(私家版漁類図譜)』은 세미콜론에서, 『무면목・태공망전(無面目・太公望伝)』은 AK 코믹스에서, 『암흑신화(暗黒神話)』, 『공자암흑전(孔子暗黒伝)』, 『나랑 후리오랑 교정에서(ぼくとフリオと校庭で)』, 『기묘한 그림동화 스노우화이트(スノウホワイト グリムのような物語)』, 『머드멘1 - 옹고로의 가면(マッドメン - オンゴロの仮面)』, 『머드멘2 - 위대한 부활(マッドメン - 大いなる復活)』이 미우에서 출간되었다. 위 작품들은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말 그대로 대표작들이다.


         

      

   

   



     



3. 하지만 가장 큰 사건이라면, 『서유요원전(西遊妖猿伝)』이 출간된 일일 것이다.


               

            



4. (『서유요원전』에 대해 이야기하기 앞서)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작을 꼽으라면 어떤 것을 택해야 할 지 난감하다. 물론 그가 1970년대에 완성한 세 편의 작품『암흑신화』, 『공자암흑전』, 『머드멘』시리즈가 당연히 목록에 올라야 하겠지만, 그 선택을 주춤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 작품들에 인문학적 정보량(다시 말해 독자들의 교양과 소양이 필요한)이 너무 많이 들어 있어서 한 번에 접근하기에는 힘든 작품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공자암흑전』의 경우에는, 유교(儒敎)의 공자(孔子)와 불교(佛敎)의 고타마 싯다르타(Gotama Siddhārtha)를 도교(道敎)의 노자(老子)와 중국・인도의 신화(마하칼리, 하리하라, 시육, 개명수 등)로 연결한 후, 동남아시아의 전설과 일본의 죠몬(繩紋)시대를 말 그대로 ‘가로지르는’ 전무후무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놀라운 점은, 이런 엄청난 이야기가 저자의 꼼꼼한 인문학적 자료에 기반을 두어 촘촘히 연결되어 있어, ‘허풍’이 아닌 ‘그럴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게끔 만드는 것이다. (워낙에 많은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번역가들에게는 기피 대상이 될 수도 있는 작가일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언급한 내용들 - 주로 문학과 역사에 관련된 - 을 알고 있지 않으면, 일본어/한자를 그대로 음차한 번역으로 인해 그 번역가의 인문학적 소양이 너무나 여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동욱, 서연하님의 성의 있는 번역과 필요 적절한 주석은 정말이지 감사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작품에 빠지기 시작하면, 무저갱(無底坑)에 빠진 것처럼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다독(多讀)보다는 숙독(熟讀)을 하게 된다. 그가 인용한 내용들을 이해하지 않아도/못해도 그의 작품을 읽는데 큰 무리는 없지만, 그 내용을 알게 되어 그가 행간에 숨겨놓은 비밀(혹은 암시)들을 발견하는 기쁨은 정말 다른 것에 비견할 수 없을 만큼 벅찬 순간이기도 하다.



5. 애니북스에서 출간하고 있는 『서유요원전』은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최고 걸작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세계를 집대성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70년대에 완성한 일련의 의심할 바 없는 저 걸작들에 비하면, 조금 기대에 못 미치는 것은 분명하지만, 확실한 것은 『서유요원전』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70년대의 걸작들이 그 압도적인 인문학적 상상력에 경도되게 만들기는 하지만, 만화로 읽기에는 조금 지루한 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나, 저 세 작품들이 소년(!)만화이면서 활극임에도 불구하고 일반 독자들이 느끼고 싶은 활극의 쾌감은 적은 편이다. 하지만 『서유요원전』은 활극의 쾌감을 저릿하게 전달하면서, 예의 그 모로호시 다이지로식의 인문학적 상상력을 놓치지 않고 있다. 아마도 『서유요원전』이 『서유기(西遊記)』라는 원작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까.



6. 나는 『서유요원전』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그 활극의 쾌감 속에서 모로호시 선생이 퍼즐처럼 늘어놓은 『서유기』의 캐릭터들과 수당(隋唐) 교체기의 역사와 인물들을 찾아 조각을 맞추는 재미 또한 쏠쏠했었다. 그러다보니 점점 욕심이 생겨 이런저런 책들을 찾아서 읽어보기 시작했다.

   먼저 (임홍빈 선생이 번역한) 문지사의 『서유기』를 다시 읽어보았고, 후에 다른 출판사에서 나온 『서유기』들을 비교해 읽어보았다.

   역사서로는 사마광(司馬光)의『자치통감(資治通鑑)』 19권(수隋시대), 20권(당唐시대Ⅰ)을 중심으로 『진순신 이야기 중국사(中国の歴史)』 4권(수 당 오대십국 북송, 중원의 황금시대), 누노메 조후(布目潮渢)・구리하라 마쓰오(栗原益男)의 『중국의 역사 [수당오대](中国の歴史 4 隋唐帝国)』, 동북아역사재단의 『신당서 외국전 역주』시리즈를 읽었다.

   『서유요원전』에 언급된 신(혹은 요물)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위앤커(袁珂)의 『중국고대신화(中國古代神話)』, 『중국신화전설(中國神話傳說)Ⅰ』과 마창의(馬昌儀)의 『고본 산해경 도설(古本山海經圖說)』, 아노 츠토무(安能務)가 평역한 『봉신연의(封神演義)』, R. K. 나라얀(Rasipuram Krishnaswami Iyer Narayanaswami)이 축약한 대서사시 『라마야나(Rāmāyaṇam)』를 읽었다.

   『서유요원전』의 진짜 주인공인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스님에 대해 더 알기 위해 첸원중(錢文忠)의 『현장 서유기(玄奘西游记)』, 현장 스님이 구술하고 그의 제자들이 기록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와 『대당대자은사삼장법사전(大唐大慈恩寺三藏法師傳)』을 읽었다.

   그러다보니 현장 스님이 인도로 가려했던 혹은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접근하고자 앙리 마스페로(Henri Maspero)의 『도교(Le Taoïsme et les Religions Chinoises)』를 읽을 수밖에 없었으며, 종교와 시대를 통해 발현되는 모습을 알고 싶어서 리저허우(李澤厚)의 『미의 역정(美的歷程)』을 읽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지난 작품들을 다시 읽었다.



      


            


         


   



7. 누가 시키지 않는데도 이토록 자발적인 독서에 빠지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힘이다. 나는 『서유요원전』을 읽고 나서 이 작품을 사랑하는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한 번 더 이렇게 글을 끼적이기로 했다.



8. 전에 끼적였던 ‘트윈 픽스’ 글들을 보니, 하나의 포스트 당 글이 너무 길었던 것 같아, 이번에는 짧게 쓰려고 한다. 형식은 필요한 내용에 주석을 다는 것으로 할 것이며, 아는 한도 내에서 오류 또한 정정할 예정이다. 매일 조금씩 쓰려고 노력하겠으나, 어찌될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것 같다.



9. 그저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모로호시 다이지로 선생의 만화를 읽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그리고 이런 굉장한 만화를 경험하게 해준 작가님과, 애니북스 출판사, 멋지게 번역해 주신 김동욱님, 모두에게 드리는 일종의 감사 편지라 생각하며...



10. 그럼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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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20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료를 찾다가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모로호시 작품에 빠져 번역된 출판 다 모으고 있는 독자랍니다..ㅠㅠ
이렇게까지 리뷰하시는 분을 한글로 접하게 되서 너무 기쁩니다! :) 너무 재밌게 보고갑니다

Tomek 2014-01-29 13:2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극님. 반갑습니다.
모로호시 선생 작품에 빠지면 정말 헤어나오기 힘들죠. 그냥 흐름에 맡길 뿐입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