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2010년 8월 17일에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 <아내들의 행진>, <길소뜸>, <법창을 울린 옥이> 세 편을 봤습니다. <길소뜸>을 제외하고는 처음 보는 영화고, 세 편 모두 스크린에서 처음 보는 작품들입니다. <아내들의 행진>은 임권택 감독님의 53번째 연출작이고 1974년에 제작된 영화입니다. <길소뜸>은 82번째 작품이고 1985년에 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법창을 울린 옥이>는 15번째 연출작이고 1966년에 제작되었습니다. 저는 운 좋게 임권택 감독님의 60년대, 70년대, 80년대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은 (스스로 자조적으로 표현하길) 영화판에 들어와 영화를 찍은 이유는, 예술가적 자의식의 실현 따위가 아닌, 밥을 벌기 위해서였습니다. 연좌제로 묶인 몸으로 대한민국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 직업을 갖기 쉽지 않기 때문에 ‘이 바닥’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를 어여삐 보던 제작자의 권유로 그는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로 감독으로 데뷔하게 됩니다. 임권택 감독은 자신의 표현을 따르자면, 감독으로 데뷔하기가 죽도록 싫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조감독은 영화가 실패해도 계속 돈을 벌 수 있지만, 감독은 영화가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는 <두만강아 잘 있거라>라는 항일투쟁액션활극(!)을 완성하고, 다행히 그 영화는 흥행에 성공해 직업감독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임권택 감독은 1960년대에는 흥행감독이었습니다. 그 스스로 모든 장르를 실험하고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며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해나간 감독이었습니다. 그러다 1970년대 한국 영화계의 암흑기를 맞이하면서, 반공영화와 새마을 영화라는 국책영화를 찍기 시작합니다. 그는 이 영화들에서 자포자기를 하기 보다는 자신의 영화에 대해 처음으로 자의식을 갖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마도 흥행의 부담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1980년대, 그는 영화의 형식과 영화의 주제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며 새로운 걸작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17일에 본 세 편의 영화는 바로 이 시기를 거쳐 간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영화입니다.   

 

  

이 세편의 영화들은 서로 다르면서도 무언가 공통되는 하나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바로 감상이 배재된 냉정한 시선입니다. 그런 것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아내들의 행진>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내들의 행진>은 새마을 영화로 시작해서 반공영화로 끝나는 기이한 영화입니다. 그 당시 임권택 감독이야 국가에서 시키는 대로 영화를 만들어야 했으니 영화가 이상한 것은 그럴만하지만, 이 영화에서 무언가 불균질하면서도 지금 임권택 감독의 특징을 느낄 수 있는 장면은 여럿 발견할 수 있습니다. 지순(윤미라)과 지순의 오빠(윤양하)가 부모의 죽음을 기억하는 장면에서, 폭력적으로 끼어드는 플래시백, 그리고 아내들이 땅을 개간하는 것을 보기만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남자들을 마을의 김첨지가 "이 돼지만도 못한 놈들!"하며 호령하는 장면에서 바로 진짜 돼지들을 보여주는 몽타주를 보면서, "정말 냉정하게 보여주는구나"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새마을 영화라 보일 수밖에 없는 계몽적인 태도와 화면의 구도는 종종 짜증을 불러일으키지만, 이 시기를 거치면서 어쩌면 임권택 감독은 이런 계몽적인 방식을 자신의 영화에 끌어들이지 않았나 조심스럽게 생각해봅니다. 영화는 놀랍게도 그렇게 노골적이지 않으며, 자포자기의 심정보다는 어떻게든 자신의 영화를 붙들려는 감독의 악전고투가 느껴집니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을 다하는 장인이었습니다.   

 

 

<길소뜸>은 중학교 때 비디오로 처음 빌려보고 거의 20여년(?)만에 다시 본 작품입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놀랐던 점은, 참으로 고리타분할 것이란 생각과는 달리 영화가 굉장히 모던하게 다가왔던 것이었습니다. 당시 제가 봤던 한국 영화들은 MBC에서 방영한 <테마게임>보다도 못한 수준의 것들이었습니다. 한국 영화는 꼭 '한국'이란 수식어가 앞에 붙고 또는 방화(邦畵)라는 자조적인 표현으로 불렀었죠. 그 때 이런 세련된 영화(만들어진지 10여년이 지난 영화인데도!)를 만난 것은 정말 기적이었습니다. 이후 <장군의 아들>시리즈와 <개벽>, <서편제>, <태백산맥>을 (몰래) 보아가며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냈습니다.  

<길소뜸>에서 임권택 감독은 여전히 차갑고 끔찍한 상황을 다루었습니다. 이산가족이라는 가슴 뜨거운 소재를 이토록 차갑고 냉정하게 그릴 수 있었는지 정말 놀랍습니다. 김지미, 신성일, 한지일 씨 등 위대한 배우들의 열연 또한 놀랍지만, 이번에 봤을 때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자료화면으로 뜬 실제 이산가족들의 만남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에 보이는 화면은 분노와 반가움이 뒤섞인 장면들이었지만, 화영(김지미)이 진짜 아들을 만나고 나서 호텔방에 흘러나오는 자료 화면은 끊임없이 자기 자식임을 물어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이었습니다. 자기 자식이 맞다고 하면서, "하나만 더 물어보자"고 하면서 계속 회의하는 장면.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가족 혹은 연인이지만, 만나고 나서 그 후는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피하고 싶지만, 기어이 마주칠 수밖에 없는 끔찍한 질문. 임권택 감독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는 다른 방법으로 인간에 대해 질문합니다. 구로사와 감독은 인간 자체에 대해 의문을 갖고 질문을 했다면, 임권택 감독은 인간을 둘러싼 상황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결국 그럴 수밖에 없었던가?"   

이 영화에는 정말 인상적인 장면이 있습니다. 화영과 동진이 석철(한지일)이 자기 자식임을 확인하러 돌아다니는 도중에 실수로 개를 칩니다. 개는 피를 흘리고 있지만, 숨이 조금 붙어있습니다. 석철이 차에서 뛰어나가 피 흘리는 개를 들고 옵니다. 화영은 소리를 지르며 "그 더러운 것을 내 차에 들이지 말"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옆에 앉은 동진은 "그래도 살아있는데 빨리 병원에 데리고 가"자는 말을 합니다. 그러자 석철이 말합니다. "이게 얼마나 귀한 고기인데요!" 이들은 가족이 되기에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왔습니다. 아마 석철이 번듯한 사람이었더라도 영화는 결국 그렇게 끝났을 것입니다. 임권택 감독은 감상을 두지 않습니다.  

 

<법창을 울린 옥이>는 신파입니다. 옥이(문희)의 가족은 부유하게 살았으나 주식 폭락으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집은 빚더미에 쌓이고 맙니다. 옥이와 엄마(주증녀)는 열심히 돈을 벌지만, 빚은 쉽게 갚아지지 않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자 옥이는 자살을 하려 수면제를 복용하는데, 배를 곯은 어린 동생들이 먹을 것인 줄 알고 먹어버립니다. 안타깝게도 스무 알을 먹은 옥이는 살았는데 다섯 알을 먹은 동생들은 죽었습니다. 옥이는 친족살인 혐의로 법정에 섭니다. 영화는 법정에 선 옥이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신파의 조건을 가진 작품입니다. 그리고 전 "이래도 안 울 테냐!"하면서 눈물을 강요하는 신파를 정말 싫어합니다. 그런데 <법창을 울린 옥이>에는 그런 구질구질한 정서가 없습니다. 너무나 담백하게, 너무나 차갑게 임권택 감독은 옥이와 옥이를 둘러싼 사회를 바라봅니다. 제가 가장 놀랐던 장면. 영화에는 옥이를 끔찍하게 괴롭히는 세 명의 빚쟁이 아줌마들이 나옵니다(김홍준 감독 말에 따르면 "마치 『맥베스』의 세 마녀 같은!"). 이들이 몰아붙여 결국 두 동생이 죽고 옥이는 법정에 섭니다. 그런데 옥이 뒤에 이 세 여인들이 앉아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전 그 장면을 보면서, "아, 여기까지 돈을 받으러 왔구나!"하는 끔찍함을 느꼈습니다. 옥이의 두 동생이 죽었어도 빚은 해결되지 않았고, 옥이가 살인죄가 아니라 감형을 받는다 하더라도, 결국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이, 옥이는 동생들의 죽음을 가슴에 묻고 그 돈을 갚을 것입니다. 영화의 마지막, 감옥에서 출소한 옥이를 맞이한 이들 가족은 결코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는 이 장면에 대해 GV시간에 김홍준 감독님께 여쭈어 봤었는데, 감독님 말씀으로는 아마 그 장면은 60년대의 감수성에서 용인될 화해의 제스처였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자신들이 너무 몰아붙였고, 아마 빚은 탕감해주지 않을까하는 (아직 개발이 시작되지 않은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회적 용인 혹은 바람.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옥이는 두 동생들의 죽음을 마음속에 묻고 살아가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임권택 감독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작품임에 틀림없습니다.  

 

12일 개막식에 이어 두 번째로 갔지만, 여전히 새롭고 재미있는 작품입니다. 임권택 감독님은 "확 다 불 싸질러 버리고 싶은 작품들을 자꾸 틀어주니 민망"하다고 하시지만,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고, 현대사의 모든 사건을 겪은 한 사람의 작품을 통해 우리는 어쩌면 '한국영화'에 대해 생각할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덧붙임: 

1. 2010년 8월 12일부터 10월 3일까지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임권택 감독 전작展을 하고 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KOFA 홈페이지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 아래는 개막식에서 공개된 "임권택 감독 전작展" 개막식에서 공개된 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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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08-18 13: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작품이 좋으냐 아니냐를 떠나서 명감독의 조건은
그 사람의 작품의 양과도 관련있다고 봐요.
원래 자기가 만든 작품은 다시볼 때 다 불싸지르고 싶어지죠.
하지만 남이 볼 땐 아무리 졸작이어도 좋은 장면은 있게 마련이거든요.

근데 토멕님 저리 쓰시니 대충 나이가 짐작이 되옵니다.ㅎㅎ
저는 영화 보는 건 좋아하는데 찾아다닐만큼은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예전에 안 본 영화들 밤에 불꺼놓고 보는 낙으로만 삽니다.ㅋ

Tomek 2010-08-18 14:54   좋아요 0 | URL
영화를 찾아다니는 이유는, 비디오가 개발되기 전의 영화는 스크린에서 보는 것을 원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하면 꼭 스크린에서 보고 싶은 욕망때문입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무료이기 때문입니다.
ㅠㅠ

제 나이는 <리미츠 오브 컨트롤>에서 이미 밝혔... :D

stella.K 2010-08-18 15:50   좋아요 0 | URL
앗, 정말요. 왜 그걸 잊고 있었는지...ㅠ
그러면 현재 25..?ㅋㅋ

Tomek 2010-08-18 23:56   좋아요 0 | URL
크아~ 그럼 정말 좋을 것 같아요. ㅠㅠ

stella.K 2010-08-19 1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정신적 나이는 그 정도가 딱이어요.
근데 육체적 나이가 그걸 못 받혀줘서 그렇지.
그래서 옛날보다 늙었구나 하는 거라구요. 말 되죠?ㅋㅋ

Tomek 2010-08-20 01:51   좋아요 0 | URL
현답이십니다. :D

노이에자이트 2010-08-21 15: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치산 활동하다 수감되어 전향한 남자를 다룬 '짝코'를 재밌게 보고 임권택이 전쟁 후유증에 대해서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길소뜸은 EBS에서 가끔 해주던데 Tomek님 평을 들으니 정신집중해서 감상하고 싶군요.저기 한지일 씨는 나중에 '젖소부인' 시리즈 등 에로물에 나오더라구요.

Tomek 2010-08-22 00:28   좋아요 0 | URL
이달 아니면 다음달에 <짝코>를 볼 예정입니다. 정말 보고 싶었던 작품이었거든요.

고맙습니다. :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