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1주
2010년 7월 29일 새로 개봉한 두 편의 영화에서 우리는 누군지는 확실히 모르겠지만, 왠지 익숙한 인물이 출연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영화를 책임지는 주연은 아니었지만, 안젤리나 졸리 주연의 <솔트>에서, 이안 감독의 <테이킹 우드스탁>에서, 주인공을 (어떤 방식으로든) 받쳐주는 든든한 인물을 맡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리에브 슈라이버(Liev Schreiber)입니다.
그는 잘 생긴 얼굴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몸매가 잘 빠진 것도 아닙니다. 명연을 펼친 적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거의 20여 년간 할리우드에서 배우로 살아남았습니다. 가히 할리우드의 미스터리라 할 만합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보면 그가 얼마나 끊임없이 작품에 출연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영화를 어느 정도 책임을 질 수 있는 배우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주연도 몇 편 맡았지만, 오히려 조연을 맡은 작품들에서 더 많은 빛을 발하는 배우입니다. 이것은 연기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배우의 성향인 것 같아 보입니다. 그는 영화 전체를 통제하기 보다는 영화를 조율하는 인물에 더 적합해 보입니다.
그를 처음 본 것은 웨스 크레이븐 감독의 <스크림>시리즈에서였습니다. 시드니 어머니의 애인인 코튼 위어리 역은 1편에서는 그저 소비되는 단역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2편에서 그의 존재감은 갑작스레 커집니다. 그의 첫 등장은 공포를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연민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치 가해자와 피해자의 모습을 동시에 담고 있는 듯한 모습. 그렇기 때문에 그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서스펜스의 열쇠를 지닌 인물로 남아 영화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배우로 인식한 영화는 <RKO 281>이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무려 오손 웰즈의 역을 맡습니다. 24살의 오손 웰즈가 스튜디오의 전권으로 그의 데뷔작이자 주연작인 영화 <시민 케인>은 미디어 제왕 윌리엄 허스트의 일생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영화의 주인공 케인은 윌리엄 허스트의 모습뿐 아니라 오손 웰즈 자신의 모습 또한 담겨 있습니다. 한 편의 영화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예술가의 탐욕스러움과, 온 세상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싶은 미디어 재벌의 탐욕스러움은 케인이라는 인물에 정확히 겹칩니다. 리에브 슈라이버는 이 탐욕스러우면서 동시에 열정적이고 때로는 무모하며, 언뜻 광기까지 비추는 오손 웰즈를 훌륭히 표현했습니다. 물론 존 말코비치와 제임스 크롬웰이라는 명배우들이 그를 받쳐준 것도 큰 위안이 되었겠지만요. 이 영화에서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복잡한 이름을 대중에게 각인시키게 합니다.
리에브 슈라이버의 모습은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를테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라던가...)을 떠올리게 할 만큼 야성적이지만, 그의 음성은 매력적인 중저음입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모습 때문에 그는 항상 이중적인 역할을 맡아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햄릿2000>에서 그는 레어티스 역을 맡아 셰익스피어 인물에 도전합니다. 레어티스는 극의 초반과 후반에만 나오는 조역이지만, 그가 등장할 때마다 영화는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레어티스가 떠나기 전, 오필리아와 대화하는 장면은 음란함을 느낍니다. 그가 햄릿과 결투를 하는 장면은 죽은 누이와 아버지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모습입니다. 리에브가 연기하는 레어티스의 연기 때문에 <햄릿 2000>은 근친상간으로 얼룩진 비극으로 그려집니다. 마이클 알메레이다 감독이 어떤 의도로 『햄릿』의 인물들을 21세기의 뉴욕으로 불러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 음란한 기운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은 레어티스와 오필리아 그리고 클라디우스와 거트루드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리에브 슈라이더의 주연 작품은 2006년에 리메이크된 <오멘>입니다. 그는 (감히!) 원작에서 그레고리 펙이 맡았던 로버트 쏜역을 맡습니다. 이 영화는 원작의 관점에서 보면 정말이지 지루한 영화입니다. 고전적 의미의 리메이크를 그대로 수행해 영화는 원작을 거의 답습하기 때문이지요. 이 영화는 조금 삐뚤게 보면 꽤 흥미롭습니다. 이 영화의 젊은 부부 로버트 쏜과 캐서린 쏜을 맡은 배우는 리에브 슈라이버와 줄리아 스타일스입니다. 줄리아 스타일스는 <햄릿 2000>에서 오필리아 역을 맡았습니다. 그러니까, <햄릿 2000>에서 레어티스와 오필리아가 결혼을 해 <오멘>에서 자식을 낳았더니, 그게 악마의 자식이더라는 식의 경망스러운 상상. 이런 상상에 기대서야 영화를 견딜 수 있을 만큼, <오멘>은 리에브 슈라이버가 원톱으로 극을 이끌기에는 너무 힘에 부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테이킹 우드스탁>에서는 여장남자인 빌마역을 맡았습니다. 그의 역할은 주인공 엘리엇 부모의 보디가드입니다. 그는 이 영화에서 억눌려있는 엘리엇의 자아를 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엘리엇은 게이이지만, 그의 부모 때문에 드는 성정체성을 숨기며 살아왔습니다. 부모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사회 분위기가 게이를 탄압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했지요. 엘리엇은 너무도 스스럼없이 다니는 빌마의 모습을 때론 신기하게, 때론 부러움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어느 날 엘리엇이 빌마에게 묻습니다. "이렇게 (게이임을 밝히고) 살아도 괜찮아요?" 빌마가 대답합니다. "언제까지나 숨기고 살 순 없잖아? 자신에게 솔직해져." 이 영화에서 리에브의 출연분량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의 말로 인해, 그리고 우드스탁이라는 대축제의 분위기로, 그는 자신에게, 가족에게 솔직해질 용기를 얻습니다.
<솔트>에 대해선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이 영화는 안젤리나 졸리의 원톱 주연 영화니까요. 졸리를 제외한 그 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받쳐주는 역할입니다. 그녀를 지원하거나 배신하거나 하는 역할들. 리에브 슈라이버가 맡은 테드 윈터 역 역시 그렇습니다. 딱 기대할 만큼의 이야기 전개와 딱 예상만큼의 반전. 좀 더 양념을 쳤으면 더 흥미로운 영화가 될 수 있었지만, 영화는 레서피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할리우드의 대형 배우들을 제외하고 20여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꾸준히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리에브가 거의 유일합니다. 어느 정도는 소비되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는 자신의 연기를 펼치는 이 할리우드의 곡예사의 앞길이 어떨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