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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합본판
이토 준지 지음 / 시공사(만화)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지옥별 레미나』 리뷰에서도 언급했지만, 이토 준지는 장편이라는 호흡에 익숙하지 않다. 그것은 그가 사건 중심이 아닌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기 때문이다. 토미에 시리즈와 소이치 시리즈, 사거리의 미소년 시리즈와 오시키리 시리즈 등이 바로 전형적인 이토 준지의 연작 장편들이다(『프랑켄슈타인』이라는 긴 호흡의 장편이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의 창작이 아닌, 메리 셜리에 대한 오마주임으로 제외하기로 한다). 물론 작가 자신이 단편이나 연작으로 만족할 수 있지만, 거대한 프레스코를 그리고 싶은 욕망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토 준지에게 장편이란 프레스코에 합당한 작품이 있을까? 있다. 『소용돌이』가 그렇다.
『소용돌이』는 이토 준지의 다른 장편 연작들과 마찬가지의 형식이다. 동일한 등장인물이 매 에피소드별로 이상한 일을 겪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소용돌이』는 다른 연작들과는 차별점이 있다. 다른 연작들이 같은 인물을 중심으로 매 회 다른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면, 『소용돌이』는 매 회 같은 인물들이 소용돌이라는 같은 사건을 겪는다. 이야기의 중심인물은 키리에와 (작가 자신을 이상적으로 표현한) 슈이치지만, 주인공은 이들이 아니라 '소용돌이'라는 현상과 그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마을 '쿠로우즈'다. 소용돌이가 중심을 향해 돌 듯, 이들을 비롯한 쿠로우즈 마을 사람들은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고 소용돌이의 저주에 속수무책 당하고 만다.
이토 준지는 『소용돌이』에서 소용돌이라는 소재를 거의 끝까지 활용하는 동시에, 장편으로서의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한 편, 한 편, 개별적인 에피소드로 흘러가는 듯한 이야기는 마치 소용돌이처럼 각기 하나로 모이고 결국 모든 마을 사람들이 소용돌이가 되고 나서야 쿠로우즈 마을의 저주는 끝난다. 게다가 이토 준지가 『소용돌이』에서 그리는 인물들은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아름다운 선으로 연결된 인물임인 동시에 끔찍한 형상들로 탈바꿈한다. 미(美)와 추(醜)를 하나의 흐름으로 잡아내는 이 지독한 악취미! 각 마을 사람들의 절절한 사연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끔찍한 비극은 이 긴 장편을 한달음에 읽게 하는 힘이 있다.
이번에 시공사에서 합본판으로 다시 출간한 『소용돌이』는 지난 판본에서 (별것 아닌데) 삭제했던 장면이 다시 복원되어 있고, 출간되지 못했던 특별편 「은하」가 수록되어 있다. 이번 합본판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은 종이다. 지난 판본과는 다른 종이를 사용해서 그런지, 눈의 피로도는 많이 떨어졌지만, 책의 무게가 상당해져서, 보통 누워서 책을 읽는 내게는 굉장히 힘든 독서를 요했다. 물론 이런 면이 내 나쁜 독서 태도를 고치는데 일조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별 상관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번에 시공사에서 출간한 세 편의 이토 준지 작품에는 어떤 하나의 흐름으로 읽을 수 있는 부분이 있다. 「은하」→『블랙 패러독스』→『지옥별 레미나』 혹은 『블랙 패러독스』→「은하」→『지옥별 레미나』의 순으로 읽는다면, 이토 준지의 어떤 흐름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토 준지의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를 다루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