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별 레미나 이토 준지 스페셜 호러 5
이토 준지 글.그림 / 시공사(만화)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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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 준지의 작품은 항상 단편에서 빛을 발해왔다. 유교 문화권에서 장남이 갖는 공포와 굴레를 기막히게 형상화한 「조상님」, 소재주의로 끝날 수 있는 꿈의 설정을 극단으로 밀어붙여 철학적 흥취까지 얻은 「기나긴 꿈」 등 그의 단편은 소재와 테마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을 타왔다. 물론 그도 여러 편의 장편을 발표해왔다. 토미에 시리즈와, 소이치 시리즈, 사거리의 미소년 시리즈와 오시키리 시리즈 등이 바로 그러한데, 아쉽게도 이 작품들은 장편이라기보다는 동일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 연작이라 볼 수 있다. 하나의 테마로 이끌어가기 보다는 매 회 다양한 소재로 이야기를 꾸미기 때문에, 장편의 긴 호흡을 느끼기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다. 그나마 가장 장편에 가까운 형식인 『공포의 물고기』조차도 중간에 이야기가 옆으로 새는 것을 보면, 그가 장편에 대한 호흡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번에 출간한 『지옥별 레미나』는 이토 준지 만화 사상 정말 처음으로 느낄 수 있는 장편의 감흥을 느낄 수 있다. 이 작품은 『소용돌이』처럼 인물이 테마가 아닌, 현상(혹은 사건)이 테마인 작품이다. 서기 20XX년의 미래. 오오구로 박사는 30년 전 발견한 웜홀을 통해 다른 우주에서 온 행성을 발견한다. 그는 이 행성을 자신의 딸 이름인 '레미나'라고 명명한다. 새로운 행성의 발견과 그 이름으로 딸 레미나는 스타가 되어 전 국민의 인기를 얻는다. 그런데 레미나를 관측하던 중, 레미나가 지나가는 곳에는 모든 행성이 사라지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바로 그 레미나가 지구를 향해 온다는 것을 깨닫는다. 태양계의 행성들이 하나 둘씩 레미나에게 먹히기(!) 시작하고, 사람들은 행성 레미나가 오는 이유가, 자신의 분신인 스타(!) 레미나를 만나러 오는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를 십자가에 매달아 화형을 시키려한다. 이제부터 레미나와 공포로 정신을 잃은 사람들 간에 쫓고 쫓기는 마녀사냥이 벌어진다.  

전작 『블랙 패러독스』에서도 약간의 SF적인 요소를 넣었던 이토 준지가 『지옥별 레미나』에서는 본격적으로 SF적인 요소를 끌어왔다. 하지만 SF적인 요소는 배경을 드러내는 것일 뿐, 이야기의 진행상 큰 위력을 발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증명을 통해 이룩한 과학 세계에서 비이성적인 일로 인해 사람들의 이성이 사라진 모습을 보여주는 모습은, 그가 그리는 세계가 중세와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아무리 이성주의가 발달한 사회더라도, 결국 인간의 심연 아래에 숨죽여 있는 광기의 본성은 숨길 수 없는 것일까. 이 끔찍한 마녀사냥은 읽는 내내 불편함과 숨 막힘을 불러일으킨다. 끔찍한 형상의 행성 레미나 조차도 미쳐버린 인간들의 공포에 비할 수 없을 만큼 위력적이다. 이 작품에서 이토 준지는 드러난 공포가 아닌, 인간 내부의 공포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울림은 굉장히 크다.  

그렇다면, 『지옥별 레미나』는 그의 걸작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지만, 그러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가 다루려고 하는 주제나 끌어들인 소재는 참신하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은 지금까지 발표한 작품들의 익숙한 차용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으로 이토 준지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이라면 새로움을 느낄 수 있겠지만, 이토 준지의 전작을 섭렵한 사람이라면, 즉각적으로 『소용돌이』, 『공포의 물고기』, 『토미에』, 「낙하」, 「궤담」 등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너무나 익숙한 이토 월드의 결정판.  

어쩌면 이 위대한 작가가 매너리즘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일말의 불안감도 없지 않다. 하지만, 행성 레미나의 부정할 수 없는 매혹과 인류의 멸망을 이토록 끔찍하게 그린 이토 준지의 악취미, 살아남은 자의 기쁨과 가족을 잃은 슬픔이 섞인 멜랑콜리한 결말부를 보면, 그래도 역시 이토 준지라는 기대감을 포기할 수 없게 만든다. 게다가 이 책 마지막에 수록된 「억만톨이」를 보면 더욱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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