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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단어 인문학 산책 - EBS 이택광의 어휘로 본 영미문화
이택광 지음 / 난장이 / 2010년 6월
평점 :
품절
영어는 이제 언어와 학문의 위치를 넘어서 계급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어 왔다. 명문대의 물리적 압박은 학창 시절에만 괴로울 뿐이지만, 이 영어라는 괴물은 학교를 졸업하고도 따라다닌다. 몇 년 전에 친구 아버지 장례식장에서 고등학교 때 친구를 우연히 만났다. 그 친구는 그 당시에 조숙하게도 술과 여자를 일용할 양식으로 여기고, 등교는 무슨 건수가 있을 때만 했으며, (동기와 선배와의) 싸움과 (선생님들에게) 개갬을 구분 못하는 소위 '개고기' 같은 평판을 얻었었는데, 소주 한 잔을 털어 넣으며 했던 말은 그때 나를 충격에 빠지게 했었다. "내가 다시 고등학교로 돌아가면, 다른 것 안하고 영어만 하겠어." 그랬다. 영어는 공부와 인륜에 별 상관이 없어 보였던 그 친구조차도 무릎을 꿇게 한 위력적인 존재였다. 하물며 다른 사람은 말해 뭣하랴.
영어는 어학(語學)이다. 말에 관한 학문. 여기 방점은 학문(學)이 아니라 말(語)에 있다. 말은 문화다. 그러니 영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문화를 배운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학교 고등학교 영어 교과서 머리말에 다 언급되어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어를 문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험과 점수로 받아들인다. 중고등학교 때에 시험의 홍수에 빠져 지내고 졸업하면 토익과 토플이라는 괴물과 맞서야 한다. 여기서 안타까운 것은 점수의 줄서기이다. 토익을 예로 든다면, 솔직히 700점대와 900점대의 큰 실력 차이는 별로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회는 895점과 905점의 차이를 분명히 둔다(실제로 나 자신이 받아본 점수다. 웃긴 일인데, 정말 차이가 존재한다).900점이 넘으면 930점대, 950점대, 970점대의 차이를 스스로 파악하고 '알아서 행동한다.' 이쯤 되면 시험 중독에 가까워지는데, 만점을 받기 전까지 시험을 끊기는 쉽지 않다. 이러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문화를 점수로 매기고 그 결과로 계급을 나누니, 무슨 어학에 낭만이 있겠는가. (북한의 영어가 민족해방을 위한 도구라 한다면) 남한의 영어는 잣대다. 자신의 몸값과 계급을 구분해주는 잔인한 잣대.
내가 대학 시절 철학대신 영문학을 택한 이유는, (6년간 중고등학교에서 영어를 배운 게 아깝기도 해서였지만) 영화 때문이었다. 당시 난 영화에 거의 빠져 지내다 싶어 했는데, 내게 관심이 있는 영화들이 대개가 영어권 영화들이었기 때문이었다. 태국이나 베트남 혹은 이란이나 아이슬란드 영화에 빠졌었더라면, 내 전공은 바뀌었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하여간 그랬다. LA와 뉴욕에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할리우드 영화에 빠져 있다가, 남부 지방(대개가 텍사스)을 다룬 영화를 보고 그 독특한 억양에 놀랐었고, 흑인들의 음악 같은 말투에 경악을 했고, 후에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아일랜드의 지방색이 뚜렷한 영화들을 만나고 그 자잘한 문화와 역사에 대해 놀랐었다. 그러니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더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었다. 시험이 아닌 관심과 놀이, 더 나아가 문화로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이런 낭만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힘든 상황이 되어있지만.
이택광 교수의 『영단어 인문학 산책』은 (수험자의 입장에서는 아쉽겠지만,) 수능이나 토익에는 나오지 않는 단어로 채워있다. 간혹 어근 풀이나 어원에 대한 탐구도 있지만, 영단어를 외우는 비법은 아니다. 제목에 ‘인문학’이라고 쓰여 있듯이, 이 책은 하나의 영단어를 들여다보며 그 단어가 만들어지고 쓰이기까지의 과정을 탐구하는 책이다. 경어 체를 사용하고, 분량도 6페이지를 넘지 않게 짧은 호흡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게 썼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고대와 중세를 넘어 근대와 현대를 아우르고,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등의 어원을 다룬다. 그러니까 우리가 평소에 쉽게 접하는 단어들을 이야기하면서 그 단어를 둘러싼 문화 전반을 (가볍게) 아우르는 셈이다.
이택광 교수는 이 책과 거의 동시에 출간한 『인문좌파를 위한 이론 가이드』에서 인문좌파란 "학문을 입신양명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거리를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자들"이라고 규정했다. 그 관점에서 본다면, 『영단어 인문학 산책』은 어학좌파를 위한 실전 가이드라고 감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시험과 취업의 도구가 아닌 문화로써 만나는 영어! 이 당연한 사실이 이렇게 특별하게 외쳐진다는 사실이 서글프지만,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세상에 맞서 살아간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기쁘기도 하다.
언어가 더 이상 시험과 취업이 아닌, 문화로 당당히 받아들여지기를 꿈꾸며, 한국의 빌 브라이슨을 꿈꾸는 이택광 교수의 다음 행보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