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6월 1주
6월 2일에 개봉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유령 작가>는 (귀신이 나오는 공포 영화가 아니라) 작가가 주인공인 영화입니다. '유령 작가'는 '대필 작가'를 말하며 이 영화의 유령작가(이완 맥그리거)는 영국의 전 수상인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작가입니다. 한 달도 안 되는 기간에 이미 초고가 나온 원고를 손만 보는 조건으로 거액의 계약금을 제시한 조건은 그에게도 구미가 당기는 일이었습니다. 단, 전임자가 사고로 죽은 사실과, 계약을 채결한 이후로 그를 따라다니는 이상한 상황들이 좀 꺼림칙했지만 그는 만족합니다. 영국을 떠나 미국령 섬에서 거주하는 전 수상을 인터뷰하고, 전임자의 초고를 검토하면서 그는 조금씩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시작합니다. 수상의 정치 이력은 수상쩍었으며, 이라크 전쟁에서 포로들의 고문을 용인해 죽음에 이르게 한 이유로 국제 전범 재판에 회부된 것과 미국의 비호는 그를 더욱 더 의심스러운 인물이라 생각합니다. 마침내 대필 작가는 자신의 본분을 버리고 저널리스트가 되어 이면에 파헤친 진실을 추적합니다.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숨은 작가에서 그는 세상에 전면으로 뛰쳐나옵니다. 존재하지만 드러나지 않았던 유령이 세상에 나옴으로써 이 세상을 움직이고 있던 유령들은 적잖이 놀라게 됩니다. 요즘 나오는 스릴러와는 달리 고전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유령 작가>는 조금은 허무한 반전을 제외한다면, 서스펜스와 미스터리를 차분히 쌓아가는 영화입니다. 로만 폴란스키는 <유령 작가>에서 진실을 묵인하지 않고 찾아내는 작가를 그렸습니다.
작가를 다룬 영화는 많이 있지만, 한국 영화중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그린 작품은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첩첩산중>이 있습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의 효섭(김의성)은 실력 없는 삼류 소설가에 성격까지 더럽고 자의식은 강한 작가입니다. 게다가 그는 그의 작가적 순수성을 과시하듯 유부녀 보경(이응경)과 불륜에 빠져 있습니다. 반면 그를 따르는 생활력 강한 건강한 여인 민재(조은숙)를 이용하는 치졸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의 삶은 더럽고 비루하고 치사하고 위악적이지만, 그가 쓰는 소설은 민재의 말에 따르면, 아름답습니다. 전혀 교집합이 이루어지지 않는 지점의 효섭의 삶과 소설은 말 그대로 위선을 보여줍니다.
이런 점은 <첩첩산중>에서도 볼 수 있는데,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소설가이거나 소설가 지망생입니다. 등단을 목표로 하는 소설가 지망생 미숙(정유미)은 전주에 내려가 친구 진영(김진경)을 만납니다. 그 김에 미숙은 스승이자 옛 애인인 상옥(문성근)을 만나고, 상옥과 진영이 서로 사귄다는 것을 알고 분개한 미숙은 옛 애인이자 이번에 낸 소설로 상을 받은 명우(이선균)을 전주로 부릅니다. 얽히고설킨 짝짓기는 점점 점입가경이 됩니다. 미숙은 전부터 존경하는, 은희경 작가를 만나지만, 은희경 작가는 미숙이 상옥과 모텔에서 나온 것을 알고 있습니다. 상옥은 명우 이야기를 하면서, "그 자식은 순전히 날 따라 하기만 한 개자식"이라며 욕을 하고, 명우 역시 상옥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은 정말이지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상황입니다. 그 안에서 펼쳐지는 자기 과시는 참으로 민망합니다. 홍상수 감독이 그린 <첩첩산중>의 작가 역시 데뷔작에서 그린 작가들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그는 여전히 직업과 삶의 관계, 창작가와 자연 인간의 관계를 가감 없이 바라봅니다. 냉혹한 시선은 거두었으나, 그의 눈매가 부드러워 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인간들을 차갑게 관찰합니다.
작가를 다룬 영화 중 <화양연화>와 <2046>을 뺄 수는 없습니다. <화양연화>의 차우(양조위)는 아내의 불륜에 충격을 받습니다. 그의 아내는 앞집 남자와 바람이 났고, 앞집 남자의 부인인 수리첸(장만옥)은 초우와 이 사태에 대해 의논합니다. 이들은 복수를 다짐해보기도 하지만, 행동에 나서지 못합니다. 그러던 중, 차우는 호텔에 틀어박혀 예전부터 쓰고 싶었던 무협소설을 쓰기 시작합니다. 수리첸은 가끔 호텔에 들러 차우의 글을 교정을 봐주기도 하고 때로는 대신 쓰기도 합니다. <화양연화>에서 초우가 쓰는 소설은 이 둘의 사랑을 엮어주는 도구입니다. 물론 더 큰 원인은 배우자의 불륜 때문이었지만, 그들은 그것과는 상관없이 서로 가까워집니다. 이별 연습을 하고 나서야, 이들은 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의지해왔는지를 깨닫습니다. 그들이 헤어진 후, 차우는 자신이 겪은 사랑을 글로 쓰지 않습니다. 대신 그는 천년의 기억이 보관되어 있는 앙코르와트의 나무 구멍에 그의 사랑을 봉인합니다. 과시하거나 드러내지 않고 간직하는 것. 차우의 사랑은 그렇게 애틋합니다.
반면 <2046>에서 차우(양조위)는 그의 사랑을 그가 집필하는 SF소설 『2046』에 모두 풀어놓습니다. 차우가 풀어 놓는 이야기는 <아비정전>부터 <화양연화>를 거쳐, <2046>에서 벌어지는 모든 사랑이야기를 아우릅니다. 잃어버린 기억을 찾기 위해 2046으로 향하는 일본인 청년 탁(기무라 타쿠야)의 이야기는 사랑하는 연인들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는 차우의 모습과 대비됩니다. 탁이 새로운 사랑을 찾으면서 잃어버린 기억의 자리에 새로 시작되는 기억을 놓지만, 차우는 그러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사랑의 기억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죠. <2046>에서 차우가 집필하는 소설은 그가 그려내는 애절한 사랑이야기입니다. 그가 살아가는 현실과 그가 그려내는 소설은 멋지고 애절한 신세계를 만들어냅니다.
리처드 커티스 감독의 <러브 액츄얼리>에도 작가(콜린 퍼스)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가 무슨 소설을 쓰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는 포루투칼어로 사랑을 갈구하는 시를 썼을지도 모르겠어요. ^.^;
* 덧붙임:
스티븐 킹 원작의 <미저리>와 <샤이닝>이 빠진 것이 좀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