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미국 영화배우 로버트 드니로의 생일이라고 하는 구만...

드니로가 메신저라도 하고 있으면 직접 축하해 줄텐데...쩝

축하해요...근데 요즘 너무 작업 안하시는 거 아닌감..쩝

http://blog.ohmynews.com/booking/189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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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는 왜 촛불을 키셨나요 ♬




촛불의 온기가 고마웠던 때에 촛불을 처음 들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촛불의 열기가 부담스러운 열대야의 계절이 왔는데도 ‘촛불’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정부는 촛불의 자제 호소를 넘어 폭력적인 진압정국으로 국면을 바꾸었으나 일본의 독도 교과서 명기, YTN사장의 주주총회 날치기 통과 등과 같이 오히려 촛불에 기름을 붓는 사건들만 연이어 나오고 있어 여전히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을 것 같다.

87년 6월 항쟁 기념일인 6월 10일과 종교계가 대거 합세한 7월5일에는 전국 100만 인파를 헤아리는 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드는 ‘민중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정작 2MB정권은 왜 했는지 모를 사과 한번 이후에는 요지부동으로 촛불들의 요구에 ‘쇠귀에 경 읽기(이 말도 미국소라 못 알아듣나?)’로 화답하고 있는 형편이다.

‘촛불’이 길어지면서 촛불의 진로에 대해, 그리고 그간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프라인과 온라인에 걸쳐 진행되고 있는 것 같은데 성과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결국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며 요구한 사항들이 이뤄진 것이 없기 때문에 촛불의 미래에 대해 비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현상적으로 촛불이 아직까지는 정부에 대해 얻어 낸 것이 없다 할지라도 이번 촛불은 여러 가지 면에서 시민사회를 비롯한 각 부문과 계층에 많은 성과와 교훈을 남겨줬고 또 그렇게 진행 중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집회의 형식에서 통행금지가 있던 박정희 정권 때를 연상시키는 일몰 후 집회금지라는 뚱딴지같은 집시법 때문에 생긴 ‘촛불문화제’는 그야말로 문화제의 성격을 가미하면서 매일매일 작은 축제의 모습을 연출해 오고 있다.

그동안 이른바 ‘권’들의 집회에서 보여주었던 줄 맞춰 앉아, 같은 색의 조끼를 맞춰 입고, 일사분란하게 외치던 구호에서 탈피해 다양한 구호형식은 물론이고 참가하는 사람들도 유치원 아이들, 초, 중, 고등학생, 대학생,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주머니, 노인 분들에게 이르기까지 어느 한 계층과 부문을 탈피한 평화롭고 다양성이 존중되는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집회, 시위 형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집회 참가자들이 자기생각을 마이크로 옮기는 ‘자유발언’ 시간에, 줄을 잇는 참가자들의 신청과 그들의 입을 통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다양한 ‘반정부’ 적인 내용들 역시 예전, 그 어느 집회에서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선함이다.

이러한 다양한 내용과 자유스러움으로 무장한 시민들의 다수가 이른바 ‘깃발’아래 조직적으로 참가한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의 자발적 의사와 문제의식 아래 참가한 ‘시민’이란 점도 무척이나 놀라운 장면이다. 오히려 몇 안 되는 사람들이 모여 외로이 깃발만 들고 있는 몇몇 단체나 정당의 모습은 오히려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어려운 정치구호만이 가로지르던, 그래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은행문턱 만큼이나 높아 보였던 광장의 문턱이 대폭 낮아진 것이다.

이번 사태의 발단이 ‘광우병위험 미국쇠고기 반대’라는 온 국민이 이해할 수 있는 주제였다는 것과 남다른 활동력과 감수성을 지닌 누리꾼들의 나라이기에 가능했다는, 남들 다하는 수준의 이해 정도 외에는 이번 ‘촛불’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다만 서구의 68혁명이 피상적으로는 프랑스의 대학 평준화외에는 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요구를 획득하는데 실패했지만, 68혁명이 혁명 이전과 이후의 서구 젊은이들이 기존의 권위를 대하는 태도, 인생관, 연애관 등에 있어 그야말로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던 것처럼, 미완의 혁명이라는 우리나라의 87년 항쟁도 그 이후 사회 각 분야의 전반적인 민주화 수위는 이전과 비교도 되지 않게 진전했던 것처럼, 이번 ‘촛불의 바다’를 경험한 시민들의 민주주의와 소비자권리, 시민권리 의식은 이전과는 확연하게 다를 것이며 더구나 촛불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계속 자가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용량이 2MB밖에 되지 않은 정부가 이를 눈치체기는 커녕 5공, 6공식의 대응만을 일삼고 있기에 이 촛불의 유효시한이 길어질 것 같은 것이 못내 안타까울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그간 촛불집회에 참가할 때 마다 딱히 아이를 맡길 곳도 마땅치 않아서 대부분 7살 난 딸아이와 함께 참가했었는데 점점 아이의 입에서 나오는 구호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친 소 너나먹어’ ‘이명박 물러가라’...

君師父一體라는 정체성 속에 ‘대통령’이란 직위를 가두고 대학 입학 때까지 깨지 못했던 내 경험에 비해서, 딸아이에게 자연스럽게 대통령을 비판하고, 야유하게 해준 촛불집회가 고마울 지경이다.

이전까지는 대통령이라는 공무원도 단지 우리가 낸 세금으로 월급 받고,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비판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민주시민의 기본 임무와 권한이라는 것을 딸아이에게 설명할 계기도 없었거니와, 이렇게 어이없는 짓거리를 연속적으로 쏟아내는 대통령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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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08-09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3주전에 원고청탁으로 쓴 글이라 정세가 또 많이 바뀐 것 같다...
 

 

 

 

 

 

성인영화와 함께한 ‘불량’의 기억들에 대하여...

그때가 아마 80년대 중반의 중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하고 있다.
고교입시를 우수운(?) 성적으로 힘겹게 합격하고, 겨울방학을 맞은 4명의 죽마고우 청춘들에게 남해안의 작은 항구 도시는 너무나 한가롭고 심심했다.
그때 불쌍한 청춘들에게 무리 중 한 녀석이 호기 있게 외친 구원의 메시아는 “우리 영화 보러 가자!” 라는 외마디 외침이었다.
물론 그냥 단순한 영화는 아니고 ‘성숙한’ 우리들의 수준에 맞는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를 보자는 얘기였다. 선생님들의 단속이 두렵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졸업만 남겨둔 상태에서 설마 걸려도 무슨 일이 생기겠냐는 나름대로의 배짱으로 서로를 위로, 격려하며 두 달 남짓 되는 겨울방학동안 우리는 참 열심히 영화관을 들락거리며 불량청소년들이 되어갔다.
물론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엄격했다. 영화 출연자들의 의상비가 적게 들어갔을 것 같은 영화, 실외보다는 침대가 있는 방 등의 실내촬영에 집중한 영화, 과일제목의 영화(산딸기, 앵두, 사과 등)와, 우리 전통 사극도 빠지지 않고 봤었던 것 같다.
시내에 3개밖에 없는 극장이었지만 그때는 정말 우리들을 위해서 극장주들이 프로그램편성을 협의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에로 영화는 한 주도 빠짐없이 시내 선전벽보판을 채우고 있었다. 나중에 대학에 입학해서야 우리가 그 유명한 전두환 정권의 3S정책(Sex, Screen, Sport)의 시혜(?) 당사자였다는 것을 알고 기분이 씁쓸해 지긴 했지만...
나중에는 너무 자주 가니까 극장 앞에 앉아서 관리하던 기도 아저씨가 연소자 관람불가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할인까지 해 주는 친절을 베풀어 주시기도 했다.
동네 영화관은 거의 다 두 편 동시상영이었는데 한번은 심형래씨 주연의 아동영화 ‘우뢰매’와 당대의 톱스타 ‘이보희’씨가 출연하는 성인영화 ‘어우동’을 동시 상영하는, 그야말로 우리 동네니까 가능한 경악스러운 일이 생기기도 했는데 어쨌든 우리는 간만에 어깨를 펴고 당당히 극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이것도 상영시간을 잘 못 알고 들어가 ‘우뢰매’ 를 먼저 관람하는 불상사가 생겼는데 다시 나갈 수도 없어서 꼼짝없이 초딩 녀석들과 만화영화를 관람하고는, 연달아서 기어이 ‘어우동’ 을 보고 나오는 대한민국 청소년들의 끈기를 과시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는 생각만큼 극장 입장이 쉬운 건 아니었다.
영화관 앞에서 서성거리며 혹시나 모를 선생님들의 단속을 대비하는 놈과 입장하는 어른이 없는 때를 주시하며 기다리는 놈, 자주 봐서 안면을 튼 기도 아저씨가 언제쯤 오는지를 살피는 놈으로 역할분담을 하고 이 세 조건이 일치하는 때를 기다려 순식간에 서너 명의 ‘불량스런 놈’들이 입장하는 순발력을 발휘해야만 비로소 어두컴컴한 우리만의 낙원으로 입성이 가능했다.
영화 상영을 기다리는 동안 익숙한 목소리의 성우 목소리와 함께 ‘행복의 전당’ ‘미의 향연'등의 ‘세련된’ 카피와 함께 예식장, 미용실 등의 지루한 지역 광고가 지나가면 드디어 장엄한 ‘애국가’가 흘러 나왔는데 여기서 작은 문제가 시작된다.
그 당시 내 고향 어른들은 어찌나 애국심이 투철하셨던지 영화내용에 상관없이 애국가 전주 시작과 함께 거의 자동으로 일어나 엄숙한 표정으로 애국가가 끝날 때 까지 서 계셨던 것이다. 물론 우리들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혹시라도 아는 어른들을 만날까봐 고개를 푹 숙이고 엉거주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때의 민망함이란...
도대체 ‘뽕’ ‘변강쇠’ ‘애마부인’등의 영화가 애국가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애국가가 나올 때 마다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충성을 다할 것”을 이미 세뇌수준으로 다짐한 나로서도 애국가와 성애영화의 양립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찌됐건 영사기 필름이 돌아가면서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들은 그 이전까지의 불안과 초조, 걱정을 모두 잊고 그야말로 느긋이 허리를 길게 빼고 앉아 영화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영화 중간 중간 격정적인 정사 장면이 나오면 극장 안은 배우들의 신음소리 외에는 그야말로 쥐죽은 듯 조용해 졌고 정사장면이 끝나고 나면 우리들 중 한 두 명은 으레 화장실을 갔다 오곤 했는데 그 친구들에게서 야릇한 밤꽃 냄새가 났었던 것 까지는 기억이 잘 나지 않으나, 우리들 모두는 그 친구가 화장실에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는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친구에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가슴 미어지는 배려와 연대에서 우러나오는 진한 우정이었을까? 아님 어차피 우리는 공범이라는 동류의식이었을까?
어쨌든 매번 영화를 다 보고 극장 문을 나설 때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햇볕으로 인한 ‘밝음의 부끄러움’은 아마 성인이 되어서는 두 번 다시 겪어보지 못한 낯 설은 경험이었던 것 같다.

 

어른들의 잣대로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어가면 ‘불량’이 되어버리는 시대의 ‘기준 긋기’는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유효한 것 같다.
다만 내 ‘불량시절’의 곁에는 언제나 친구들이 있었고 그 친구들이 있어 소심한 ‘불량’ 행동이나마 과감히 저지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교과서에서 가르쳐 준대로 착하고 바른 행동을 같이 하는 것 보다는 왠지 삐딱한  나쁜 짓을 같이 한 친구들과의 ‘동지의식’이 더 깊어졌었고, 그러한 일종의 연대의식이 나의 청소년기를 키워온 하나의 자양분이기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성(性)’을 예로 든다면 나의 세대와는 달리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어른들도 보기 민망한 ‘하드코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세대가 지금 청소년들이기 때문에 굳이 친구가 없어도 컴퓨터 모니터만으로도 ‘불량’을 접할 수 있는 요즘 세대가 왠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한다.
‘불량’도 친구가 있고, 에너지가 있고 시간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유희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삶에서 가장 에너지가 왕성하게 분출하고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았던 청소년기에 ‘불량’이란 녀석이 붙어서 ‘불량청소년’이란 조어가 완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한 황금 같은 시기의 모든 에너지와 시간을 ‘공부’에만 쏟아 붓고 있는 2008년의 청소년들에게도 우리세대식의 ‘불량’을 허락하면 어떨까 하고 상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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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광우병위험 쇠고기 수입반대를 시작으로 켜지기 시작한 ‘촛불’들이 그동안 새 정부의 시장만능주의 정책에 의해 억눌려 왔던 교육체제, 의료와 공기업의 민영화, 왜곡된 언론, 최근에는 일본정부의 독도 교과서 명기 등의 많은 사회 문제들과 만나면서 두 달여를 줄기차게 타오르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촛불시민’이 대단하다는 것은 그것이 어느 한 계층, 계급만의 촛불이 아니라 초등학생부터 노인을 아우르는 세대의 넘어섬과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와 노동자, 학생, 실업자, 자영업자 등 각자가 처한 현실 경계의 넘어섬이 ‘미 쇠고기 수입반대’ 라는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자유롭게 만나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일 것이다.

이러한 ‘촛불’의 시작이 국민의 건강, 특히 자라나는 자녀들의 건강을 우려한 ‘광우병 위험 미국 쇠고기 수입’이 이슈였기 때문에 계층과 부문을 뛰어넘는 참여가 가능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명박 정권이 추진하고 있는 여러 정책들이 시민들의 공분을 사면서 촛불 광장이 민주주의의 산 교육장이 된 것 또한, 우리 민주주의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김상봉, 서경식 선생의 대담을 엮은 책 ‘만남’의 내용 중에 서경식 선생이 몇 해 전부터 팔레스타인의 얼굴도 모르는 한 어린 아이를 위해 매월 얼마씩 후원하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요즘은 국제적인 개발NGO들에 의한 후원 시스템이 쉽고 다양해 졌기 때문에 서경식 선생의 후원이 특별한 내용은 아니었지만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후원에 대한 서경식 선생의 이유였다. 팔레스타인은 알다시피 이스라엘과 하루가 멀다 하고 크고 작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곳인데 팔레스타인의 얼굴도 모르는 한 아이를 후원하고부터는 신문 국제면의 이스라엘에 의한 팔레스타인 폭격 소식이 그냥 넘어가 지지 않더라는 내용이었다. 굳이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서경식 선생의 창(窓)이 팔레스타인을 향해서도 열려 있다는 것이어서 새삼 가슴 뭉클하게 읽었다.

언제부턴가 우리사회의 21세기적 가치는 공동체의 가치나 사회적 연대의 틀 보다는 ‘부자 되세요’ 로 대표되는 나만 잘살면 된다는 ‘나’의 틀로 가두어 버림에 있었다는 가설이 일정정도 맞는다면, 2008년에 켜진 ‘촛불’의 의미와 가능성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광장에서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서 열린 생각으로 마음의 창을 조심스럽게 열기 시작했다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언론개혁의 창, 의료보험 민영화의 창, 교육문제의 창 등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창들을 열어젖히기 시작했음에도 여전히 우리사회는 각자 개인들에게 좀 더 많은 창을 열기 원하고 있다.

당장 KTX , 새마을호 여승무원노조가 7월 1일부터 900여일에 이르는 긴 투쟁 끝에 다시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고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는 1000일이 넘는 피눈물 나는 투쟁을 펼쳐오고 있다.

조금 멀리는 북녘의 동포들이 여전히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각박한 세상살이에 남의 문제에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창을 열고 좀 더 넓게 좀 더 멀리 창밖의 사회를 바라본다면 KTX , 새마을호 여승무원노조가, 기륭전자 노조원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들 자신의 모습일 수도, 머지않은 미래의 모습일 수도 있음을 금방 알게 될 것이다.

 

2008년 여름, 우리의 창은 어디를 향해 열려 있는 것일까?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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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kr.youtube.com/watch?v=Ic9AIzrmn5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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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08-07-2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멋지네요. 피아노 연주하는 모습 자체가 또 하나의 작품이군요.
잘 보고 듣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