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뜬한 잠 창비시선 274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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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기억하고 싶은 문구가 나타나면 책의 윗쪽을 접고 중간에 책을 읽다 잠깐 놓을 일이 생기면 책의 아랫쪽을 접습니다.

이 시집은 책의 윗쪽을 참 많이 접었습니다.

 

삼학년

미숫가루를 실컷 먹고 싶었다

부억찬장에서 미숫가루통 훔쳐다가

동네우물에 부었다

사카린이랑 슈거도 몽땅 털어넣었다

두레박을 들었다 놓았다 하며 미숫가루 저었다

 

뺨따귀를 첨으로 맞았다

 

 

싸전다리

 쌀 됫박이나 팔러  싸전에 왔다가  쌀은 못 팔고 그냥 저

냥 깨나 팔러 가는 게 한세상 건너는 법이라고 , 오가는

이 없는 싸전다리  아래로 쌀뜨물같이 허연 달빛만 하냥

흐른다

 

야 이놈아,  뭣이 그리 허망터냐? 

 

 

건망증

깜박 나를 잊고 출근버스에 올랐다

어리둥절해진 몸은

차에서 내려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

방문 밀치고 들어가 두리번두리번

챙겨가지 못한 나를 찾아보았다

화장실과 장롱 안까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집안 그 어디에도 나는 없었다

몇 장의 팬티와 옷가지가

가방 가득 들어 있는 걸로 봐서 나는

그새 어디인가로 황급히 도망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쉬고 싶어하던 나에게

잠시 미안한 생각이 앞섰지만

몸은 지각 출근을 서둘러야 했다

점심엔 짜장면을 먹다 남겼고

오후엔 잠이 몰려와 자울자울 졸았다

퇴근할 무렵 비가 내렸다

내가 없는 몸은 우산을 찾지 않았고

순대국밥집에 들러 소주를 들이켰다

서너 잔의 술에도 내가 없는 몸은

너무 가벼워서인지 무거워서인지

자꾸 균형을 잃었다 금연하면

건강해지고 장수할 수 있을 것 같은 몸은

마구 담배를 피워댔다 유리창엔 얼핏

비친 몸이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옆에 앉은 손님이 말을 건네 왔지만

내가 없었으므로 몸은 대꾸하지 않았다

우산 없이 젖은 귀가를 하려 했을 때

어딘가로 뛰쳐나간 내가 막막하게 그리웠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들리다

뒤척이는 밤, 돌아눕다가 우는 소릴 들었다

처음엔 그냥 귓밥 구르는 소리인 줄 알았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소리,


누군가 내 몸 안에서 울고 있었다


부질없는 일이야, 잘래잘래

고개 저을 때마다 고추씨 같은 귀울음 소리,

마르면서 젖어가는 울음소리가 명명하게 들려왔다

고추는 매운 물을 죄 빼내어도 맵듯

마른 눈물로 얼룩진 그녀도 나도 맵게 우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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