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쯤에 다니던 학교를 그만두고 지역의 통일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시작할 때는 특별히 통일운동에 대해 거창한 사명의식 같은 건 없었고, 학교를 그만둔다는 정보(?)를 입수한 선배의 집요한 설득에 넘어가 시작한 이른바 첫 직장생활이었다.

학생운동 할 때의 얄팍한 능력을 가지고 뛰어든 운동판이었으니 힘들고 어려웠던 건 사실이었지만, 어린 나이에 사회에 나와 통일운동을 한다는 내 나름대로의 뿌듯함은 있었던 것 같다.

특히 고향출신의 음악가란 사실만 알고 있었던 ‘윤이상’선생님이 현대음악계의 거장으로서 ‘동백림’사건의 아픔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해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나를 흥분시켰다.

비교대상은 될 수 없었지만 같은 고향이란 점과 통일운동의 끈으로 윤이상 선생님과 내가 시간과 공간을 넘어 연결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지역의 보잘 것 없는 활동가였던 나에게는 큰 위안이었고 자랑거리였다.


얼마전 국정원에서는 민청학련, 인혁당사건, 등과 함께 윤이상, 이응노화백 등이 연루된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도 과거 의혹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진실위원회의 우선 조사대상으로 선정되었다고 발표했다.

매년 이맘때 윤이상 선생의 음악세계를 기리는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 선생님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Memory'란 주제를 가지고 3월 17일부터 그의 정신적인 고향 통영에서 열린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정,재계와 학계, 문화계의 유력인사들이 발기한 ‘윤이상 평화재단’도 공식 출범해 그를 기리는 다양한 사업을 벌인다고 하며, 윤이상 선생님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도 곧 만들어진다고 하니 10년이란 세월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행사를 지켜보면서도 왠지 허전한 마음이 가시질 않는 것은 왜일까?


윤이상 선생님은 살아생전 꿈에도 그리던 고향에 올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다. 1994년, 그가 동백림 사건으로 강제추방된지 25년만에 서울, 광주, 부산에서 “윤이상 음악축제”가 열리고 윤이상 선생님도 김영삼 문민정부에 기대를 걸고 입국을 허가해 달라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하지만 김영삼정부는 선생님께 과거에 대한 반성과 정치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요구했고 오히려 명예회복 차원에서 고국입국을 준비했던 윤이상 선생은 당연히 각서를 거부하고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게 된다. 그리고 일년후인 95년 11월 4일 고향 통영의 푸른 바다를 베를린 자택에 걸린 사진으로 밖에 보지 못하고 “내 고향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독일”이란 비통한 말씀을 남기고, 고향 통영에서 가져온 한줌의 흙과 함께 독일 베를린에 영원히 잠들고 만다.


국정원의 과거사 진상규명에서 동백림사건이 우선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늦게나마 잘된 것이지만 40여년이 흐른 세월속에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는 사뭇 걱정이 앞서는 것은 기우일까?

윤이상 평화재단측의 관계자는 언론을 통해, 남한에서 윤이상선생님에 대한 민간차원의 다양한 행사와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윤이상선생님은 거의 명예회복을 이룬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명예회복이었다면 윤이상선생님은 1994년에 이미 남한에 들어왔을 것이다. 윤이상 선생님은 생전 한반도의 휴전선 남쪽을 제외하고는 세계음악계에서 현존하는 6대 현대음악가로 인정받은 위대한 음악가였다.

비록 노무현정부는 동백림 사건에 대해서 책임이 없다 할지 모르지만 1970년 빌리 브란트 독일 총리가 바르샤바의 옛 게토(집단수용지)지역을 찾아 유대인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고 나찌의 유태인 학살을 사죄한 것은 나찌도 독일이었고 빌리 브란트도 독일이라는 상식적인 역사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올해 윤이상선생님 타계 10주기에는 평양의 윤이상관현악단도 초청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기회에 정부의 정중한 초청으로 윤이상 선생님의 미망인이신 이수자여사가 고국땅을 밟게 되길 기대한다.

그리고 윤이상 선생님이 한반도에서 당신의 노력으로 음악을 통한 평화적 남북 교류사업이 이루어진다면 고국의 흙에 입 맞추며 조용히 하고자 한 말씀을 우리는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나의 충정은 변함이 없습니다”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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