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강이 그대로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왜 꼭 필요한지, 작가들의 목소리가 한 데 모아진 뜻깊은 책이다. 고은 시인 등 원로 작가들의 작품을 비롯해 김경주 신용목시인 젊은 작가들이 한뜻으로 전하는 소중한 우리 강에 대한 절규가 느껴진다. 작가들의 마음이 전해져 꼭 강이 제모습을 찾게 되길 간절한 마음으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독창적이고 현대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프란츠 카프카의 단편 모음집이다. 치밀하면서도 인간 본연의 꾸미지 않은 감정들을 그려 넣은 카프카만의 독특한 시선을 기대해 볼 만 하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안개 3부작 중에 작가가 가장 애착을 가진 작품이 바로 이 <한밤의 궁전>이다. 초자연적인 파워가 느껴지는 흐름도 매력있고, 거센 운명과 대항하는 신비로운 의식의 흐름이 기대되는 작품이다.   

 

 

 

 

  

 

반복되는 일상이 가져오는 작은 폭력과, 그것을 견뎌내는 섬세한 감정의 잔가지들이 묘하게 얽히고 설키는 소설이다. 두사람의 하루를 돌아보며 고독한 현대인들의 발자국을 더듬어 보는, 서늘하고도 담백한 시간을 지나가고 싶다.

 

 

 

  

 

영화로 보면서 '정말이지, 이렇게만 살 수만 있다면!'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뭔가를 끊임없이 도전해야 하고 희망을 갖자는 말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일상에서 이 책은 마치 휴가지와도 같은 공기를 선사할 것 같다. 테두리를 벗어나 정말 살고 싶어지는 삶을 꾸려낸 진짜 행복을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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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결탁>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바보들의 결탁 - 퓰리처상 수상작
존 케네디 툴 지음, 김선형 옮김 / 도마뱀출판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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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그네이셔스의 뚱뚱한 풍체만큼이나 크고 웅장한 에드벌룬이 이 책의 시공간에서 시종일관 둥둥 떠다닌다. 그것을 저 하늘 높이 날아 올리는 힘은 그의 터질것 같은 뱃속 가스처럼 내내 가벼운 웃음을 유발하는 기운들, 그리고 도리질을 계속하게 만드는 에너지로 가능해 보인다. 읽는 내내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드는 것은 분명 큰 매력으로 작용하지만 그 못지 않게 조금만 더 가스가 찼다가는 펑하고 터져버리거나 보지 못할 먼 곳으로 날아갈것 같은, 과잉의 감정이 아쉬운 소설이다.
만약 이그네이셔스와 같은 사람을 만난다면 그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익살스러움을 넘어서 말도 안되는 상황을 제 의지와 잣대로 잘도 빠져나가는 밉상,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꾀돌이 캐릭터. 그러나 이 책을 덮었을 때는 분명 여기 나온 바보들의 매력에 흠뻑 빠지고 마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기꺼이 팬클럽 회장이라도 하고 싶은 생활의 활력과 에너지를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다. 어이없을 정도로 무모하고 이해를 구하는 일이 책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만큼 끊임없이 사건을 만드는 나대기 사고뭉치 위인들은 이렇게나 오래 누군가에게 지켜보일 수 있다는 것만해도 소임을 다하는 듯 하다. 어쨌든 이 책의 캐릭터의 힘은 꽤나 크고 중요한 사건과 같다.  
그러나 만약 현실의 이그네이셔스를 상상해 본다면 그다지 호락호락한 삶을 살아내지는 않았을 것같다. 소설에 나오는 일보다 더 황당하고 어려운게 현실이기 때문이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곁에서 그의 개성은 온전히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대못하나쯤 박혀 폐인이 되거나 부적응자로 의기소침해 있을 게 뻔하다. 그런데 다행이게도 이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현실 속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아주 독특한 성정을 지닌 이들이다. 다시 말하면 이그네이셔스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어딘가 모자라지 않으면 과잉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그래서 이들을 보고 평범을 자부하던 우리가 대단한 우월의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나 이를 뒤집어보면 개성없이 점잖만 빼고 살아가는 우리의 가식을 반성(?)하게 만든다. 바보같은 모습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의 풍자인지, 아니면 단순히 한 마을의 독특한 전경을 마음껏 상상하고 싶었는지 작가의 의도를 곰곰히 탐구하게 된다. 어쨌거나 이런 이들과 좌충우돌 이야기를 뚫고 지나가는 여정은, 한 놈만 패는 과격함과 안타까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 편한 여행과 같다. 차라리 모두가 한 대씩 때리고 얻어 맞고 시작하는 모든 경계가 사라진 상태, 망가지고 우스꽝스런 루저들과의 동행길은 참으로 유쾌하다.


 
이 책이 온마음을 다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는 ‘괴짜’를 인정해 주는 사회가 아닐까로 읽었다. 어느 사회고 괴짜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는 좁은 통로라는 것은 그가 내보이는 독특한 재능과 성격, 이것의 발현이 사회적 업적을 이룰만한 큰 성과를 올렸을 때나 활짝 열리는 법이다. 본능적으로 사람은 안정을 추구한다는데 괴짜들이 사회적 통념을 깨거나 이들의 기준에 어긋나는 비상식적인 언행을 보면 심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게 당연하다. 결국 괴짜가 살아남는 법은 사회적 업적이라는 비례와 상충되어 높은 폭발력을 가졌을 때 긍정의 효과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이렇게 됐을 때의 상황은 그가 평범한 환경에서 자랐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을 때보다 몇 배는 더 극대화된 반응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럴 때 ‘괴짜’를 괴물이 아닌, 매력있는 '비범한 자'로 읽을 수 있게 된다. 잘 알고 있는 미켈란젤로, 모차르트, 아이슈타인이라던가 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는 것도 어쩌면 이들이 괴짜였기 때문은 아닐까.
어쨌거나 성공한 괴짜는 화제를 몰고, 이그네이셔스는 짜증을 몰고온다. 여기 이그네이셔스는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만한 요건이라고는 그가 딴 석사 학위뿐이고, 정작 제대로 된 직업하나 없어 일이나 벌리고 다니는 가여운 청년이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괴짜적 요소들, 즉 사회를 비꼬고 변혁을 꿈꾸는 작은 외침들이 사람들에게 어필되기는 커녕 사고뭉치에 짓궂은 백수로 읽혀 진다는 것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씁쓸하기 그지 없다.  

이그네이셔스가 결국 바람하던 변혁을 크게 일으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사회비판적인 글과 생각들은 적잖이 놀랍다. 그것은 충분히 적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극을 주었음에 틀림없고 작은 불씨가 되었음을 믿게 해준다. 사람들은 그의 비정상적인 외모를 우스꽝스러워 하고, 비상식적인 언행을 깔보지만 사실 이그네이셔스의 생각은 그 나름의 상식적인 선 안에 있다. 말하자면 세상의 고정관념 안에 있기를 거부한 좀 더 확장된 상식 선의 잣대로 바라본 시선이라는 것이다. 부조리를 못견뎌한 것 뿐이며 다만 세상이 좀 더 상식적으로 바뀌었으면 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오랫동안 배워온 지식과 현실과의 괴리감이 아마 그를 더 괴팍하게 내몰고 외롭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를 보면 현대사회가 얼마나 괴짜들에게 살아가기 힘든 곳인가를 체감하게 된다.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야 말로 현대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우리는 바보 이그네이셔스에게 다양성을 존중하는 법을 배운다. 

이 책의 재밌는 점은 시종일관 사람냄새 나는 미국 한 마을의 정겨운 냄새와 수다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특유의 언어가 싸구려 맥주집의 왁자지껄한 소음으로 떠들썩하고 맥주 냄새와 엉켜서 뉴올리언스라는 정겨운 마을의 이미지를 만든다. 주인공 개인이 뿜어 내지 못하는 전체적 인상과 풍광을 이 마을 사람들에게서 느껴진다. 사소하게 비꼬고 웃어 넘겨버릴 작은 이야기에도 이들에게 풍겨나오는 정신, 뿌리를 읽는 것은 어렵지 않다. 뉴올리언스는 재즈의 고장, 카트리나 재앙이 휩쓸고 간 곳으로 우리에게도 익히 알려진 곳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곳의 이미지가 책으로 말미암아 왜 재즈의 고장이라고 하는지는 충분히 느낄 수 있으리라. 티격태격 싸우고 바보들 아닌가 할 정도로 어리석어 보이지만 자신이 처한 삶의 애환을 노래로 치환시킬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소울이 살아있는 마을이다.
끝없이 이어지는 소소한 사건들과 이그네이셔스의 독특한 벨탄샤웅이 충돌하는 싸움은 이 고장이기에 거대하고 멋진 에드벌룬을 띄우는 일로 승화된다. 그것은 작은 바람이라도 일으키고자 한 바보들의 작은 입김들로 모아진 멋진 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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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기의 간주곡>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허기의 간주곡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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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권의 소설은 작가의 '과업'처럼 다가와 꽂힌다. 전쟁을 체험한 작가들에게서 느껴지는 공통적인 것, 말하자면 시대를 이야기할 때 결코 그 때 그 사람들을 잊지 말아달라는 당부는 처절한 고발로 이어진다. 당연하게도 자신이 목도한 사실에 대해 말해야 한다는 어떤 사명감같은 것이 깃들 것이다. 시대를 살아간 자만이 알 수 있는 아우성을 토로하듯이 전쟁을 겪어 낸 소설가의 이야기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역사의 허리를 담담히 관통하며 지나간다. 그래서 이분들의 이야기를 읽어내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감정이 솟는 일이다. 이제 전쟁을 겪은 1세대들이 점점 떠나가고 이런 식으로 기억되는 일조차 귀한 일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르 클레지오 작가의 소설은 언제나 고증 위에 아름다운 상상력이 얹어진 채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허기의 간주곡>이란 제목만 접했을 때도 이 소설이 얼마나 완벽하고 위대한 이야기일지가 먼저 떠올랐다. 겪어보지도 못한 허기의 기운이 거대한 먹구름처럼 몰려와서 가슴을 꽉 메우는 무시무시한 함축의 언어. 이 감정이 불행인지 그저 공허함 뿐인건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할 때 마침내 들려오는 아름다운 선율같은 것은 우리가 가진 근원의 슬픔일까. 설사 이 우연이 아무것도 의미하고 있지 않아도 좋은 완벽한 조화, 그런 삶을 이야기 하고 있다.  

르 클레지오 선생이 우리나라에 머무셨을 때 꽤 많은 강연회나 낭독회에서 만나 뵐 기회가 있었다. 그 때 말씀하신 것들 중 결국 이 분이 소설을 쓰신다는 건 인간의 삶 속 풍경 중에 가장 슬프고 아픈 시간들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신다는 인상을 받았다. 선생에게는 이 시간들이 바로 유년에 머물러있다. 실제로 모리셔스섬에서 자란적이 있으며 프랑스 어느 시골마을에 꼭꼭 숨어 전쟁을 피해 사셨다 들었다. 폐허의 터전, 마음 졸이고 어수선했던 유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견뎌낸 시간들이 그에게 영원히 '말하는 삶'으로 바꿔 놓는다. 전쟁은 끝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지만 이 때를 끊임없이 상기하는 이유를 작가는 너무나도 생생한 풍경과 함께 소상히 전하고 싶어 한다. 여전히 한편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전쟁들이 왜 이 아픈 이야기들을 쉬이 잊어져서는 안되는가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남겨야 할 과업처럼 그렇게 오랜 세월 아픈 역사와 개인에 대한 이야기를 써냈다.


우리나라에 2년여를 머무르시게 된 연유도 본인이 몸소 겪은 역사와 우리네의 역사가 너무 닮았기 때문이라고 말하셨다. 무엇보다 우리나라 어느 지방 시골마을의 풍경이 사시던 고향집과 너무 비슷해서 주말이 되면 그곳을 자주 찾아가 보곤 하셨단다. 어쨌든 소설에서 발현될 정서적 고향을 우리 땅이 북돋아 준다는 우연도 그러고 보면 참 이유있는 일이다. 우리의 언어와 풍경들이 말해주는 느낌이 <허기의 간주곡>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지는 공감대가 있다. 가령
우리말 중에 '情'과 '恨'이라는 말이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정확하게 표현하지 않는 고유한 언어라고 놀라워 하셨다. 우리나라의 정서적인 뿌리에 情이라 불리는 사랑, 슬픔의 감정인 恨이 공존한다는 것이 바로 작가가 공감하는 실체적 단어이다. 실제로 이 소설에서도 情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프랑스어로는 어떤 단어로 쓰셨는지 모르지만 분명히 우리의 '情'이라는 정서적 개념을 상기하셨으리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어쨌든 이 책은 이대 기숙사에 머물면서 붕어빵과 알밥, 삼계탕 같은 소박한 음식을 즐겨하시며 태어난 작품이다. 그래서 선생님의 <허기의 간주곡>이 정말 많이 궁금했고 보고 싶었다. 한국 땅에서 잉태되어 전 세계의 아픈 역사의 땅에 울려 퍼지게 된 아름다운 간주곡을 이제 모두가 함께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유년의 에텔은 감수성이 풍부한 소녀다. 깊은 사랑을 품을 줄 아는 아이, 그만큼 상처를 잘 받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아이, 에텔의 내면은 구덩이가 커서 깊은 만큼의 세상을 볼 줄 아는 아이다. 그것은 그녀의 할아버지 솔리망의 내면과 아주 많이 닮았다.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말수가 적고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보이는 사랑은 세상에서 가장 넓고 위대한 것이어서 에텔을 언제까지나 꿋꿋하게 지켜주는 버팀목이 된다. 역사의 소용돌이가 휩쓸기 전의 땅에서 에텔은 솔리망의 정서적인 자양분을 받았고 진짜 사랑을 배우고 자란다. 그리고 그 정서적 완벽을 상징하는 것은 바로 그 둘만이 공유하던 '연보라색집'이다. 그러나 풍요롭던 시절도 잠시 에텔은 온전히 혼자가 된 세상에서 또다른 사랑과, 시련과, 공허를 배워 나간다.

에텔이 깨닫게 되는 공허의 자락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은 착각의 향기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온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 정도의 아름다움을 가진 친구 제니아와의 사랑 혹은 우정, 이는 소녀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이 책의 가장 돋보이는 정서적 교류다.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채우게 된 첫 번째 세상과의 만남이 바로 제니아와 나눈 교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녀는 처음으로 ‘다름’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 언제나 가난과 처지에 걱정이 많던 친구에게 에텔은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시대의 격차와 부조리를 알게 된다. 그것은 제니아의 유난스러운 성격탓에 에텔로 하여금 자격지심을 품게 할만큼의 상처가 되고 만다. 언제나 그녀의 눈치나 보며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할 걱정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이미 제니아의 존재가 그녀에게 공허를 주리라는 예감을 들게 한다. 소소한 질투나 사랑, 이런 감정들과 맞물려 세상을 좀 더 알게 되고 이해하게 되는 에텔의 성장을 목도하는 일은 싱그럽지만 쌉싸름한 풋과일의 맛처럼 아리고 슬프다.  

에텔은 어려서부터 가정불화가 끊이지 않던 부모의 슬하에서 외톨이로 성장했다. 그녀가 바람하던 연보라색집의 실현이란 것도 결국 이런 부모라서 실현되지 못했다. 에텔에게 연보라색집이 있었다면 평생 그녀의 공허와 방황도 조금은 낫지 않았을까. 그녀에게 집은 내면의 큰 구멍을 메워줄 실현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 자신도 고백하듯 애초에 그런 것이 지어지지 않을 거라고 예감했던 것 같다. 에텔이 바람하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것은 사실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솔리망의 부재, 허세욕만이 가득한 딱한 부모, 차갑고 냉소적인 제니아의 배신, 그리고 진짜 사랑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로랑을 향한 마음, 모든 관계라는 것이 공허를 메우는 일이었다기 보단 더 큰 구덩이를 파는 일이었다. 그녀 곁의 그 누구에게서도 채울 수 없는 허기였기에 연보라색집의 존재는 내면에서 점점 커지는 노릇이다. 언제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삐걱거릴 때마다 그만큼씩의 구멍이 더 생기고 그녀가 균형을 잃고 헤맬때는 자신의 정신적 뿌리인 솔리망을 상기한다. 이렇게 겪어내는 고통을 감내하는 것이 단순히 성장이라 이름 한다면 얼마나 잔인하고 허망한 일인가. 어른이 된다는 건 아픔을 감내하는 일, 텅 빈 공허의 구덩이를 점점 커지게 방관하는 과정일까. 에텔의 연보라색의 집은 세상 사람들이 사는 대지 위가 아닌 에텔의 내면 구덩이에서 터를 잡고 증축된다. 
 

새삼 작가의 시선이 얼마나 차분하고 담담한 고백인지가 인상깊게 느껴진다. 전쟁의 피폐함과 고통의 아우성을 이 책에서는 거의 찾아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것들은 연보라색집이 가져다주는 이미지처럼 뿌연 안개 속, 허상의 집에서나 흘러 나올법한 아름다운 소녀의 노래처럼 들린다. 에텔 개인의 아픈 성장은 시대의 아픔과 맞물려 아름다운 허기의 멜로디로 대치된다. 역사가 한 개인의 삶에 얼마만큼 큰 소용돌이를 몰고 오는지 그 안타까운 과정을 말해준다. 작가는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허기로운 역사를 한 편의 악보로 남기고 싶었던건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여기 이렇게 연보라색 집에서 풍겨 나오는 허기의 소리를 듣고, 상상하며 기억해내는 일을 꼭 해야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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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아내를 기다리는 주인공이 딸에게 즉흥으로 만들어 들려주는 '나무들의 은밀한 생활' 이란 제목의 이야기이다. 나무들에 얽힌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아이가 잠이 들고 난 이후 펼쳐내는 아내와의 사랑, 추억담은 애잔한 기운이 느껴지는, 마치 안개같은 소설일 것 같아 기대된다. 

 

  

 

 

'가장 웃긴 책'의 반열에 오른데다, 주인공의 자포자기 고군분투를 통한 해학이라니 아이러니한 매력이 돋보이는 소설이다. 세계 경제와 사회, 문화 여러 삶의 테두리 안에서 열심히 부딪히며 살아가는 우리 청춘들의 이야기를 들여다 보고 싶어진다.  

 

 

 

 

 

사랑하는 사람을 뒤쫓아 가는 여정을 그려낸 소설이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 안에서 벌어지는 추적이란 점에서 흥미롭다. 연애담이 기묘한 정신의 거미줄 위에 통통 튀어 옮겨다닐 젊은 작가의 독특한 시선이 궁금해진다.  

 

 

 

 

  

성북지대에서 펼쳐보이는 가난한 청춘들의 이야기는 그곳이 중국이기 때문에 더 돋보일 것이다. 보편적인 구성이라 우리네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고 결국 우리의 문제이며, 같은 희망을 꿈꾸게 될 것이므로 기대된다.   

 

 

 

  

33년만에 귀향한 어느 소설가의 자취를 따라 그야말로 슬픔의 춤을 추는 아름다운 소설이다. 망명자로서의 애환이 시와 산문을 오가며 승화된 언어의 유희를 따라다니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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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책 사냥꾼을 위한 안내서 - 제2회 중앙 장편문학상 수상작
오수완 지음 / 뿔(웅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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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결국 ‘그런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는지도 몰라’일 거라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도 그 안의 의미가 더 별것 아니었다는 걸 감당해내지 못하는 것보다는 낫다. 어쨌든 책으로 하여금 그것이 존재하든 안하든의 문제는 일단 젖혀 두자. 그리고 그 자체로서 내뿜는 것, 이것의 정말 실재할 수도 있는 사건을 눈여겨보는 것이다. 읽는 내내 책이 하나의 유물이 되고 없던 감정에 가열이 생겨 에너지로 환원되고 정말 큰 아우라를 느끼해주는 과정은 분명 독창적이라 할만 했다. 그러니 기꺼이 사냥꾼이 되어서라도 찾고 말겠다는 동기를 주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책은 어떤 특정 개인에 의한 생성이 아니라 온 생애가 발생시킨 작은 역사 그리고 인류의 거대한 역사가 만나 이루는 큰 폭발의 산물이다. 그것을 본 사람에게 어느 정도의 영적 파장을 안겼을지 상상만 해도 군침이 도는 것, 이쯤은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여기에는 책을 진짜 본 자, 눈으로 얼마간 읽어낸 선택된 자만이 그 크기를 가늠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책으로 가지게 된 열망이란 본디 보편적인 감정으로 생각해낼 도리가 없는 것이다. 특별하고 선택된 자에게서 생겨날 수 있는 성질이다. 적어도 책의 장을 열고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을 기대하는 자, 또는 열망 없이 시작했어도 한순간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황홀을 사랑하는 자 그런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책은 내적 열망의 상징이자 위대함의 상징이고 한편으로 욕망의 덩어리인 셈이다. 이런 전제로 보면 <책사냥꾼을 위한 안내서>는 보편적인 사람들에게 큰 유대를 형성할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이 책은 책을 탐닉하는 자, 거대한 도서관의 수많은 책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열망을 느껴본 자들에게 선보일만한, 말하자면 소수를 위한 책이다.

보는 내내 작가가 얼마만큼의 장서가일지, 독서광일지 가늠해보는 것도 사냥꾼의 뒤를 쫓는 일처럼 흥미롭다. 자료의 수집, 그리고 그 자료들이 이 소설과 연관고리를 찾는 일만으로도 머리가 뻐근해질 정도로 방대한 수준이다. 실재 존재하는 책인지 아닌지는 후반으로 갈수록 궁금하지 않아진다. 위대한 탐서가의 서재를 구경하는 일처럼 존경심이 이는 시간임을 즐기면 되고, 정말 그 책을 찾아보게도 만드는 설득에 종용당하면 되고, 때로 작가가 이룬 거대한 지적인 성에 갇힌 노예처럼 답답함이 들기도 하는 시간이었다. 수많은 책이 있는 곳에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에 선 미지의 공포랄까, 그것은 저 멀리 존재하는 섬에 점점 도달해가는 마음과도 같았다. 독자가 느낄 괴리감들을 작가가 몰랐을 것 같지는 않고, 어쩌면 이 수많은 책들이 마침내 책이게 된 각각의 배경 그 음험한 세계를 독자가 마음껏 상상하다가 길을 잃게 되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찾을 수도 없게 숨겨진 혹은 소멸돼 버린 이름 없는 섬 같은 소설을 쓰고 싶었던 걸까. 어쩌다가 가끔 옹색한 내 서재의 책들을 기웃거리게 된 것도 바로 이 책이 준 이상한 기운의 파장이다. 한권 한권 만약 헌책이기라도 하면 그것이 내 손으로 오게 된 경위와, 누구누구에게 라고 쓰여 있거나 한 사연들에 미소가 지어지고, 누가 쳐놓은 밑줄 부분을 다시 읽어보게 되는 것들 말이다. 책의 과거를 생각하는 것은 아주 이상한 소유욕을 안긴다.

반디는 책에 운명적인 동경을 느꼈고, 그것은 몸의 반응으로도 사소하게 일어난다. 또한 그의 의식을 지배하는 관념들은 제단 위에 오른 책처럼 신성시되고 자체로서의 책으로 맹목성을 띤다. 이것은 애초에 위험한 사냥이었다.
우리가 책을 생각하는 관점은 저마다 다르다. 대상을 보는 관점이 제각각이듯이 그 책에 빠지거나 아니게 되거나하는 것은 제 각자 도달하게 되는 생각의 뿌리에서 시작되어 미친다. 그런데 읽다보면 애초 인물들이 매혹되었던 책의 존재와 의미 이런 것들이 사실상 큰 의미를 갖지 않게 되는 사냥을 위한 사냥으로 비춰진다. 책이 별을 세는 일만큼이나 부질없고 끝없이 쏟아져 나올 대상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는 작가가 일면 구현한 허무의 증명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나만 느끼는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책의 헌터가 되어 찾아 헤매고 헌터를 쫓는 또다른 헌터가 현실 속에서 뒤죽박죽으로 일을 망치는 걸 바라보는 일이란 참 지루한 책을 읽는 눈처럼 피곤하다. 게다가 현실인지 가상인지 환상인지 점점 모호의 세계로 빠져드는 여러 부분은 책의 종말을 좀 더 극명하게 사멸시키는 행위처럼 보인다. 발사된 적 없지만 사냥꾼 총에 의해 장렬히 전사한 책의 최후처럼 그 존재란 것은 뻔한 것이다.

<레드 바이올린>이란 영화를 보면, 완벽한 소리를 내는 바이올린의 역사를 추적해봤더니 몇 백년에 걸친 엄청난 사연들이 있었더라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어쩌다가 지금의 아름다운 소리까지 갖추게 되었나라는 의문은 역설적으로 추하고, 음탕하고, 가난하고, 아픔과 슬픔의 손길로부터 잉태된 소리라는 것이 밝혀진다. 위대한 책이란 어쩌면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무시무시한 어둠의 태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윤선생의 제안은 마치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처럼 위험하다. 반디는 오래 전부터 제가 가져온 열망의 책이 이 상자를 열어야만 나타나리라는 숙명적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니 상자 안에서 펼쳐진 온갖 세상을 감내해야 하는 비운의 사냥꾼이다. 이 책에서 맞서야 한 세상이란 건 생각보다 그리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단지 더 이상 책이 존립하기에 어려운 현실 체계라는 것, 책 사냥에 열중한 나머지 곁을 지키던 사람과 재물은 다 사라져 버리고, 맹목적이고 시시한 인간종에게 배신당하는 어이없는 현실이라는 것 이정도 밖에는. 사실 반디가 모든 것을 잃고 도달하게 된 정점은 어이없게도 열망이 과하게 스파크 된 찰나이다. 전소되고 모든 열망과 기대는 한순간에 재가 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 지경이다. 한권의 책으로 바꾸는 거대한 불꽃놀이를 그렇게 지켜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름다움은 금방 소멸되고 이제 다시 애초에 그랬던 것처럼 각자의 마음속으로 사라지는 차례다. 그러므로 문학이 사람을 구원하는 일 따위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반디가 앞으로 펼쳐낼 운명의 한 권을 같이 기대해보는 일만은 지켜보고 싶어진다. 멈출 수 없으리란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러니 여전히 많은 수많은 별 가운데에 시위를 당기는 용기를, 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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