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몸의 내밀한 곳까지 관찰하고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화가나 사진가에서가 아니라 시인에게서라면? 

우리는 모두 몸을 빌어 살지만, 가끔 거울로 들여다 보는 일이 없다면 결코 몸의 구석구석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김경주가 2년 만에 내놓은 신작 <밀어>는 익숙하고도 낯선 몸에 대한 모든 것일 수 있는 시선이 담겨있다. 시인의 눈에 몸이 무엇을 비밀스럽게 말해주고 있던 건지 몽상에 젖는 촉촉한 마음이 앞선다.

 

 

 

 

 

 

 

 

<나를 부르는 숲>으로 유명한 작가 빌 브라이슨이 이번에는 호주를 여행했다. 그의 여행기를 읽어본 사람이면 방안 모든 사면 위를 배꼽 잡고 굴러다니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위트 넘치는 여행가가 아닌가. 무엇보다 낙천적이고 솔직한 품성이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여행의 흥미와 의미를 줄 것 같이 멋지기만 한 여행서이다. 더불어 그의 글은 생태계의 위험을 일깨우고 자연의 숭고함,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공동체 의식으로 전세계 독자에게 많은 공감을 얻고 있으니 이번 여행기 역시 기대감이 크다. 호주 여행에서는 또 어떤 좌충우돌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질지 입을 한껏 치켜 올리면서 책장을 넘겨봐야 겠다.  

 

 

 

 

 

 

 

<파리는 날마다 축제>는 미국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젊은 한 때 파리에 거주하던 날의 기록이다. 떠남과 낯섬의 인식들이 그의 소소한 일상과 맞물려 날마다 축제일 수 있는 소중한 하루를 돌아보게 해줄 것 같다.

 

 

 

 

 

 

 

 

 

 

 

 

남극이든 북극이든 아마존이든 우리의 소중한 동물들이 사라져 가고 그 안타까움을 여러 매체를 통해서 전해듣고 있다. 이 책은 <시턴 동물기>로 유명한 작가 어니스트 톰슨 시트이 지금으로부터 백여년 전의 북극의 모습을 보여준다. 거대하고 고독한 땅 북극을 시튼은 왜 주목했고 그 안의 동물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 등이 담겨 있다. 점점 사라져 가는 소중한 날들의 기록이 점점 파괴되고 있는 자연의 위기를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 같다.  

 

 

 

 

 

 

 

 

파워 트위터리안 혜민스님의 에세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은 갈피 잡을일 없이 매일을 지친다는 말밖에 도리가 없는 수많은 이들의 멘토가 되는 책이다. 작은 꽃의 향기처럼 지혜의 숲으로 초대되는 책이랄까. 가던 길을 잠시 멈추면, 그제서야 내가 지금 어디를 지나가고 또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게 되리라는 소박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스님, 제가 지금 이 자리에 잠시 쉬어가도 되겠습니까?' 라고 물으면 분명 해맑은 얼굴로 어깨를 토닥여 줄 혜안과 같은 책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진 2012-02-08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유독 혜민 스님의 글이 끌리더군요.
알라딘에서 밑줄긋기로 해놓은 부분을 읽었는데도 느끼는 것이 정말 많은 에세이 어요.
이번에 신간평가도서가 된다면 무지 기쁠 것 같습니다 ㅎㅎ

puriul 2012-02-09 18: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저도 혜민스님 잘 몰랐던 분인데, 글 정말 잘쓰신다고 들었어요. 기대되네요 ^^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비채 무라카미 하루키 작품선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비채 / 201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루를 살아도 하루키처럼 어마어마한 생각을 해내고, 신선한 글을 써내려갈 수 있다면이란 생각을 해본다. 참으로 다양한 영역의 일을 하는 것으로 가짓수는 많지만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키처럼 단 몇가지 일인데 이걸 못하겠어?’ 라는 듯 완벽히 해내는 사람이 있다. 더한 것은 과시욕에서 뿜어진 열정같은 것도 아니고, 그저 이룸의 바탕 위에 글쓰기와 음악이라는 중심축이 바로 서있을 뿐이라니 더 할 말도 없어진다. 이쯤이면 하루키같은 사람이 부럽지 않고 달리 어떤 사람이 부러울까란 말만 무한 복창하게 된다.

그는 워낙 사생활 노출을 꺼려하는데다 작가라면 부푼 마음을 안고 참여할 것 같은 낭독회나 사인회 마저도 마다한다니 인간 하루키를 상상하기는 참으로 어려운 노릇이다. 그럼에도 그가 전 세계 많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노벨상에 여러 번 언급될 만큼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상기하면 단언컨대 사람들이 한 작가의 사적인 면모를 전혀 모르거나 다소 아는 정도라 할지라도 별로 상관 없어한다는 것을 반갑게 인지할 수 있다. 작가의 사생활을 조금 더 안다고 해서 작품을 더 많이 알게 되는 것도 아리송한 일이고, 또한 생각해보면 전혀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다. 몇몇 산문이나 에세이, 소개글, 또는 신문기사를 통해서 알게 된 정보일 뿐이지만 이 정도라도 하루키를 좋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아주 가까운 사람처럼 인식한다. 그리고 이 착각의 기쁨을 매우 즐겁게 누린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하루키의 글은 언제나 그렇다.  

 

 

이번 <잡문집>이 하루키의 사적인 면모와 생각들을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아주 반갑고 소소한 재미를 줄 수 있는 책이 될 것 같아 반갑다. 하루키는 소설가이기 때문에 허구의 인물을 통해 그의 생각이나 삶을 조금이나마 반추해보던 독자들에게 이번 책은 온갖 잡설의 형태로 다양한 하루키의 생각을 엿볼 수 있게 된 점이 흥미롭다. 물론 메모지에 적혔을만한 지극히 사적인 발현 정도라기에는 모자람이 있겠지만 나름대로 형식과 격식을 내려놓은 평범한 글로의 선보임이 하루키를 좀 더 가까운 사람이게 해줌에 부족함이 없다.

친구를 대하는 태도라던가, 평소 어떤 일상을 즐기며 하루를 보내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마치 사생활을 카메라로 찍어 방영해주는 듯이 자세하다. 소설 이외의 산문이나 에세이 형식의 글을 간간이 읽어보기는 했지만 소개되지 않은 짧은 글들은 읽을 기회가 좀처럼 없어서인지 잡문들이 하루키의 일상을 쫓아 다니는 것처럼 소소하다. 그는 여전히 늙지 않은 채로 40년 전의 그와 지금의 그를 데칼코마니처럼 그려내고 있다. 청춘의 아름다움을 여전히 간직한 화석같은 사람, 왜 고유명사 하루키일 수 있는지 처연하게 말한다.

 

 

 

<잡문집>에서 하루키는 논리에 근거하지 않은 자신만의 호불호가 분명한 인간이기를 선언한다. 이 호불호란 것도 주도면밀하게 축조되어 온 바탕위에 지어진 것이니 조금은 엄격해 보이는 면까지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장인의 고집처럼 느껴진다. 그의 고독과, 이상하리만치 청춘의 봄날처럼 느껴지는 문장들을 읽으면서 아무런 짐도 꾸리지 않은 채 떠나온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여기고 싶어지는 기분이 든다.

생각해보면 그가 소설 속에서 창조해낸 세계는 어딘가 있을 법한 세계지만 한 번도 그곳으로 가고 싶다고 생각 드는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세상에 존재하는 본질에 대한 통찰을 담고, 불온한 풍자와 부조리함이 버무려진 현재의 모습은 아프고, 끔찍하고, 쓸쓸하기만 해서일까. 그래서 하루키의 글을 읽는 것은 대게 밀어내는 세월처럼 느껴졌다. 이쯤이면 여느 소설과도 구별되는 힘을 가지기 어렵다고도 할 수 있지만 하루키는 여기에 관습적인 내러티브 형식을 살짝 비켜나간, 그러니까 좀 더 내밀하고 치밀한 인간의 본성과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 사람들을 당황시킨다. 그는 소설에서나 여기 실린 잡문에서 조차 전능적이고도 현학적인 자세를 한번도 취하지 않을 만큼 권위적인 글쓰기를 거부한다. 그의 어체가 남성적이고 호불호가 분명하다는 느낌같은 것을 고려할 때 이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닐텐데 어느 글에서나 섬세함을 놓치지 않는걸 보면, 참으로 고집스러운 규칙이 작동하는 모양이다언제나 자유롭고 관습적 태도를 따르지 않는 그만의 세계를 유연하게 그려나갈 줄 안다. 그 어떤 통제의 관장 없이 자연스럽게 세계관을 만들어나가는 태도가 많은 사람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그의 이야기는 굴곡 없이 매끈한 흐름을 보여주지 않고 좀 더 고약해지기를 궁리하고 변형되기를 꿈꾸는 글쓰기다. 금기라던가, 억압된 욕구 같은 것을 두 볼이 빨개지도록 과감히 그려내기도 하고 어떤 경계조차 애초에 없었다는 듯이 일탈을 부추기는 당돌함이 있기도 하다. 그의 글이 언제나 청춘이란 단어를 머금게 하는 생기와 신선함이 있는 이유와도 상통할 것이다. 하루키를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노르웨이의 숲'을 읽었을 때의 충격과 감흥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정확한 때와 뭘 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시시콜콜함을 읊는 것은 마치 어느 대통령이 죽었을 때라던가 큰 재난이 왔을 때 무얼 했고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에 대한 말을 줄줄이 내뱉는 일처럼 큰 충격인 모양이다. 이 책에서는 하루키가 왜 그토록 평범한 글쓰기를 거부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순응하듯 살아가는 것 같아도 어딘가 자유분방해 보이고 그 느낌이 영롱하게 발산되어 보이는 이유는 이런 남다른 생각때문이었다.

그의 글을 보며 전 세대가 공감하거나 한편 크고 작은 파문을 일으킬 때마다 누구나가 그 젊은 시기를 지나왔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 생각의 끝에는 항상 이러한 흥미로운 호기심이 미치곤 했다. 그가 언제 태어났고 어떤 환경 속에서 자란 세대인지를 돌아보게 된다는 점이 그것이다. 나이로 따지면 환갑이 넘은, 아무리 요즘 세상에 노인 축에도 못끼는 나이라지만 노인이라면 노인인 나이. 하루키는 일본이 한창 부흥하던 시기에 청년기를 보냈는데 이를 감안해보면 그의 젊은 글쓰기가 왜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았는가를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어려움 없이 살만한 가정에서 태어나 팝송과 재즈를 들으며 자랐고, 결혼을 해서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하는 요즘 세대에서나 봄 직한 두 사람만의 생활을 영위해 나간 삶. 살만 해진 1세대의 사람들이 이제 노인이 되어 어떻게 늙어가는 지를 하루키를 보며 가늠해 본다. 그와 우리네 환갑 넘은 노인을 나란히 놓고 상상하기에는 아무래도 괴리가 크겠지만 우리의 60-70년 세대들이 40-50대가 된 지금 앞으로 십년 후에 하루키처럼 젊은 생각으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꼰대스럽지않은 세대의 출현이 더없이 반갑게 기다려 진다. 하루키는 도무지 늙는 법을 모르는 사람처럼 언제나 변함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내는 신작들만 보아도 '언제까지나 파릇파릇한 감성으로 젊음을 이어갈 수도 있구나' 하는 믿음 같은 것을 더욱 견고하게 심어주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글장이로 살아가는 삶,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날선 눈으로 보고 예민한 태도를 가져야 하는 숙명이 버거웠을 법도 한데 철두철미한 마음가짐으로 상처받지 않는 사람처럼 매우 단단한 심지로 버티며 작가의 삶을 살아왔다. 세계인이 주목하는 작가지만 하루키는 분명 우리 안에 있는 사람이고 지극히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사는 작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작가라는 삶과 지극히 개인적인 또 다른 삶을 잘 분리하며 살아간 것이 이 <잡문집>을 통해 엿볼 수 있었다. 겸손하고도 고집스러운 비법, 이것이 어쩌면 엄숙하거나 거장의 반열에서 느껴질 아우라를 벗어나는 그만의 젊은피였는지도 모르겠다. 매일 글을 쓰지만 적당량을 쓸 것, 언제나 일어나면 운동을 하고, 맥주를 마시며 야구를 관람하는 평범한 일상들이 젊음을 언제까지라도 유지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처럼 다음 작품에도 미칠 것이다.

글 속에 이웃해 있는 모든 존재들의 입에서 그가 보는 세상과 우리가 봐야 할 세상에 대한 미지의 그림자가 건강히 드리워 질 것 같은 기운으로, 오늘따라 雜스러움이 참으로 따뜻하게 느껴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을 보내주세요
미셸 투르니에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간 -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간절히 필요한 순간, 두뇌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지적 유희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정란 옮김 / 예담 / 2011년 11월
평점 :
절판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제 삶을 둘러 싼 모든 기호들이나 이미지, 소리와 사상과 말과 온갖 오브제들이 떠도는 세상을 보고 배운다. 그리고 그 나름의 인식체계 속에 평생을 끊임없이 입력해가며 살아간다. 그런 수순이라지만 그렇다고 모두 같은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는다. 물론 온갖 것들의 개념을 배워나가는 상황이 같을 수가 없기 때문일 것이고 각자의 뇌역할이 다르기 때문에라도 그럴 것이다. 그것은 모두 제각각의 시점에서 정확하거나 불명한 이유를 달고 어떠한 기호나 이미지로서 기억될 일이다. 그런데 모든 의미들의 어원이나 기원을 파악해내는 일은 살면서 아주 드문 일이어서 가령 아프다의 개념을 생각해볼 때, 이 상태를 '몸의 고통'쯤이란 단어로 이리저리 설명해내다가 종국에는 이마저도 더 깊은 어원이지는 않지 않냐는 황망한 심산만이 들 가능성이 크다. 즉 의미의 진실보다 짧고 지극히 개인적인 이미지만이 개념의 온상인냥 말할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좋거나 나쁨, 애매하거나, 어렵거나, 가볍거나, 진중한 인상들처럼 가장 기본적인 감각적 능력을 빌어 또 개인에게 익숙한 에피소드와 일상의 코드만이 맞물리는 지점에 따라서 그런 식으로만 명확해질 도리가 있을 것이다. 뇌리에는 무의미의 유혹에서 용케 탈출한, 고작 광범위한 범주의 본질의 도식만을 그려낼 가능성만이 희미하게 '안다'의 경계를 오갈 것이다.

 

 

프랑스 문단의 거장 미셸 투르니에가 제기하는 본질에 대한 다름의 인식은 바로 우리의 감각적 능력과 개인의 경험 밖의 이야기를 던져 놓는 개념의 진짜 이야기를 말하려는 시도이다. 그동안 철학서나 개념서 같은 논리의 인식체계를 다루는 책에서나 봤음직한 개념들을 진짜 기원적인 뿌리를 알려줌은 물론이요, 그만의 상상력이 보태지고 새롭게 발굴해낸 의미가 덧대어 전복적이고도 새로운 인식체계의 전환을 돕는다. 단순하지만 우리의 삶과 아주 밀접한 개념들을 전면에 드러내 놓음으로써 오히려 왜 이런 쉬운 단어를 새삼 탐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호기심이 불러 일으켜진다. 가령 남자와 여자, 목욕과 샤워, 아름다움과 숭고함 등 서로 상반되거나 이웃해 보이는 단어들을 뚫어지게 들여다보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 새롭다. 어느새 그곳의 틈과 균열이 만들어져서는 기어이 조각내지고 제 철학과 상상력이 보태진 지혜가 새로운 퍼즐로 보이게 되는 또다른 탄생을 낳게 한다. 이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한 반기라기보다는 좀 더 깊은 의미로의 확장을 건축하는 일이다. 이 심리적인 차별화의 출발로 계열화된 구조가 무시되고 상상력이 증폭되는 일이 아닌가 싶어진다.

 

 

미셸 투르니에는 본질적으로 깊이에의 개념인식이 그 표면을 벗겨내고 될 수 있는 한 가장 깊은 곳까지 침투하는 탐험으로의 고찰이라 말한다. 할 수 있는 한 가장 먼 곳으로 가서 그곳의 다른 면을 보고 오게 되기를 꿈꾸는 여행의 산파와도 같다. 이 책이 돋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을 가장 철학적이고 근원적인 맛을 체험하게 해준다는 점에 있다. 각 개념들의 신화적이고 역사적인 연원의 뿌리를 소개하거나 어원의 연쇄고리를 타고 도착하는 텅 빈 부재의 공간에 데려다 준다는 점도 놀랍다. 이러한 투르니에의 낯설고도 익숙한 개념 설명은 이 자체로서의 과정이 상상력을 풍부하게 해주지만 그 보다 개념의 진원지이면서 본질일 수 있는 공간에 대한 부재를 어떻게 채워나갈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해준다는 점이 좋은 것이다. 결국 내가 한번 채워보지 않은 앎의 진지한 자세를 되잡아 주는 셈이다.

 

 

대게 우리가 알던 코드를 새삼 들여다보는 것은 대중이 갖는 넓은 의미로의 본질일 수는 있지만 생각해보면 넓을수록 그 의미가 단층적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표피는 두터워질 대로 겹겹이 싸여 견고해지고 결국 남의 생각으로 하여금 그 개념이 정의되는 착각을 하게 한다. 그러나 거의 모든 당연시되는 넓은 체계를 과감히 무너뜨리고 모호함이나 엉성한 질문을 던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는 화두를 던진다. 분명 작은 파문이긴 하지만 확장을 포기하는 대신 깊이로의 펌프질을 돕는 편이 진짜 개념의 본질을 알게 되는 시작점이며, 결국 알게 되는 것이 아주 단순한 진리였다 해도 그것은 내가 생각한 진리이며, 내 삶의 막강한 주체적 개념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철학을 고리타분하고 실용적이지 못한 사유 뿐이라고 터부시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투르니에가 전하는 철학은 우리의 삶과 아주 가깝고 풍요롭게 해주리란 기대를 품게 만드는 철학이다. 무엇보다 뜨겁고 진지하게 살아간 지성들의 아포리즘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오랜 시간 돌아보게 하는 기쁨이었고, 내 삶을 아우르는 거의 모든 생각들의 뿌리를 다시금 점검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좋은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세이>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이 시대, 가장 후미진 변두리에서 가장 낮은자들의 이야기를 하는 송경동시인. 두려워서 아무도 하지 않을 일을 기획하고, 손을 잡아주고 함께 아파하며 기꺼히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어 주는 진정한 지식인, 바로 울보 송경동이다. 이번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에서는 시인이 어떻게 현장가이자 투쟁가로 살아가게 되었는지 독백의 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시대의 아픔을 알게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작은 동요로 부터 시작된 걸음이 희망이란 단어로 다가서는 일임을 꿈꾸게 해줄 것이다. 서늘함이 느껴지지만 늘 가장 가까운 심장 소리를 들려주는 따뜻함을 놓지 않아 늘 그가 고맙다. 차가운 감옥에서 움트는 아주 먼 불씨지만, 2012년 조금은 부푼 기대를 안고 살아갈 우리에게 그 어떤 빛보다 강한 따스함이 전해지는 것 같다. 기꺼이 그를 따라 꿈꿀 것이고, 그를 힘차게 응원한다!  

 

 

 

 

 

 

마르케스, 권터그라스, 오에겐자부로 등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16인의 인터뷰를 담은 <16인의 반란자들>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의 사사로운 이야기와 작품에 담긴 원칙, 철학 등을 두루 담아 낸 책이다. 반란자들이라 명명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같이 세상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세계인의 정신에서 각성시켜 주는 듯 메시지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저마다 생각하는 삶의 태도, 문학, 역사, 철학 등을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깊이 있는 성찰의 시간을 갖게 되는 기대를 가져볼만하다.   

 

 

 

 

 

 

 

 

 

작가가 좋아하는 무진기행이나, 이승우, 타르코프스키, 원더풀라이프를 한데 놓고 생각해보면 어딘지 모르게 비슷한 정서가 흐르는 듯 하다. 마치 밤을 닮은 정서랄까. 그가 진행하는 심야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처럼 조용히 언급될 조근조근한 서정이 흐른다. 이 책은 방송에서 소개된 책들과 새로 덧붙인 몇편의 기록을 담아 77편의 책 탐험기를 엮어낸 소개서다. 그의 전작들이 모두 영화와 관련된 책이었다면 이번 <밤은 책이다>에서는 그동안 보여주지 않은 책에 대한 작가의 특별한 애정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직접 말하는 듯한 문체로 문장을 읽는 내내 이동진기자 특유의 부드러운 음성을 상상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김현진의 글을 보고 있으면 이제 갓 서른이 되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숙함이 기특해진다. 세상을 보는 날카로운 면면이 '여자'여서 돋보이다가 이내 그것마저도 어리석은 일이 되어버리는 짙은 카리스마가 느껴진달까. 정말 곧은 성인이 되었구나라는 인상을 받는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이렇게 보이던 이유도 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안온한 20대를 보내지 않아서인 모양이다. 홀로 투쟁하듯 살아내고 버텨낸 서울살이의 기록이 그녀를 당차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다져낸 것이다. 가난하지만 꿋꿋히 살아가는 이 시대 청춘들에게, 과감히 자신의 목소리를 내라고 용기를 주려는걸까? 그 청춘의 기록을 '뜨겁게 안녕!'하듯 읽어보면 좋겠다.     

 

 

 

 

 

 

 

누구나 타샤튜더처럼의 삶을 꿈꿔 본다. 볕이 좋은 창에 앉아서 한 나무의 사계를 지켜볼 수 있는 일은 생각만으로도 뭔가 인생의 완성을 돕는 근사한 일일 테니까. <즐거운 나의 집>은 타샤튜더가 버몬트에 손수 지은 집에 정착하며 방을 꾸미고, 옷을 지어 입으며, 예쁜 식기들이 가득한 부엌에서 맛있는 요리를 하고, 애견 코기가 뛰어노는 예쁜 식물들이 가득한 정원의 아름다움을 일구며 살아간 일기장 같은 책이다. 그녀의 집에 놀러가는 일이 벌써부터 두근두근 설레이는 것 같다. 타샤튜더 할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할머니! 나도 이렇게 늙어봐야지, 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울푸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울푸드 - 삶의 허기를 채우는 영혼의 레시피 소울 시리즈 Soul Series 1
성석제 외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1년 10월
평점 :
품절


어딘지 모를 우울의 기운들이 모르핀을 맞은 듯 정지된 고통의 무아로 내몰거나, 모든 감각들이 오래 날뛰고 비틀어지다 못해 더 이상 통증이 아닌 듯 침잠의 시간으로 천천히 물들일 때, 그럴 때에 우리는 생의 이면을 맛보는 뜻밖의 풍경과 맞닥뜨린다벗어나려 할수록 몸부림은 우스꽝스러워지고 남들에게 동정이나 살 수 있으면 그나마도 다행인 일일우울은 그냥 그 무엇도 아닐 비루한 일들을 하게 하는시간을 버리는 듯 그저 버텨낼 뿐인 고됨만을 겪게 해주지 않는가. 단언컨대 이런 무참한 때의 위로란 건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차라리 없다라고 믿는편이 다른 면에서의 가능한 위로가 아닐까? 
만약 누군가로 부터 건네 받은 한 잔의 커피가 마음을 치유해준 약이 됐다면 그것은 그나마도 위로가 가능한 층위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의 층위 중 비교적 높은 층위에 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만약 가장 낮은 층에서였다면, 치유란 겨우 시간이 약이 될 수 있다말 뿐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고통을 더는 일인지 뚜렷한 근거가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무뎌지게 하는 각성제 역할쯤은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사람이 살면서 이런 최악의 시간을 맞이하고 조금씩 무뎌져갈 때 이럴 때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여러 위로의 길들을 모색해보는 것이 좋다. 보통 이런 때의 위로라면 향이 좋은 한 잔의 커피이거나, 누군가의 작은 어깨를 의지하는 일일 수 있고, 눈물을 쏟게 해준 감동의 영화 한 편이 될 수 있다. 겨우 이 정도의 일로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는 것이 의외이긴 하다. 어딘가 좀 싱겁고 낭만적인 데가 있으며, 들인 일보다 훨씬 더 큰 힘이 되주는 이 작은 공력이란 것. 위로가 되는 순간 만큼은 인간이 조금 더 성장해 가는 지점이 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커피 한잔 따위의 위로를 처방전으로 알고 의지를 다지는 일도 살아가는 데 깊이를 더하는 소소함일 것이다.


볕이 적당하게 내리 쬐는 창이 넓은 방에 앉아서 평소 읽고 싶던 책을 읽게 되는 날에도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날이 있다. 이럴 때 우리는 제 나름의 처방을 내리는 것이다. 내가 하는 처방전이라면 주로 음악을 듣거나, 산책을 하는 것으로 기분을 어르는 편이기는 한데 잠을 자는 것도 도움이 많이 됐다. 초콜릿처럼 달콤한 것을 먹으면 기분이 나아진다는 연구결과를 우습게 여긴 적은 없지만, 한 번도 먹는 행위로 하여금 극복해보려 한 일은 없었다. 예전의 나를 돌아보면 적당의 음식을 먹어서 생활하는데 지장이 없으면 그만이었고, 특히 먹는데 돈 쓰는 것을 지독히 아까워하는 쪽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이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라던가 먹는 게 남는 것따위의 말을 듣는 것을 질색했고, 비웃을만큼 조롱해대는 무식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사회 생활을 하면서 편식을 하는 습관이 크게 지적 받을 만한 일이라는 걸 깨닫고, 뭐든지 같이 먹거나 같이 소비하고, 같이 노는 문화에 적응 하면서부터는 급속도로 내 방식들의 여러 단점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나 역시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맛집을 쫓아다니거나 양송이와 치즈가 듬뿍 들은 한 접시의 스프에 열광 할 줄 알게 되었다. 물론 영혼의 맛같은 깊은 경험을 하지 못한 것이 애석한 일이지만, 매일 먹어야 하는 섭생의 주제를 인지했다는 일로도 다행인 일이다. 먹는 행위를 우습게 아는 인간처럼 우스운 인간도 없다는 것을 겨우 알게 된 셈이다.

신세계를 알게 된 내 값싼 입이, 헛된 앎이 아닌 걸 보상해주듯 이 책은 정말 좋은 사람들이 전하는 그들만의 소울푸드가 가득하다. 각각의 방에 초대되는 근사한 기분은 내내 설레이게 한다. 은은한 불빛이 새어나오는 만큼의 좋은 음식 냄새가 군침을 돌게 하고 원기를 북돋아 주는 용기를 조금씩 얹어 준다. 저마다의 삶의 허기를 채우는 맛이 내가 먹어 본 그 평범한 밥상과 다르지 않음에 위로가 되는 것도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호젓하게 단절된 나만의 요리보다는 모두가 어울어져서 같은 음식을 먹는 유대의 식탁이 훨씬 맛있어 보이는 것도 근사한 일이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익은 직접 담근 엄마표 된장국, 정직한 맛이 일품인 친구의 콘과자, 청춘의 모든 것이었을 빨계떡, 달콤쌉싸름한 와인 한모금, 저마다의 특별한 사연이 보태져 그 맛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그윽한 향과 훌륭한 맛의 기대를 한껏 북돋는다. 음식이 왜 철학이 되고 신비스러운 '존재'가 되어 버리는지 숭고한 순간들을 맛보는 것이 참 특별하다.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 안에는 천재가 살고 있다. 그는 내게 먹는 즐거움을 소중히 여기라고 한다.’ 달리가 자신의 천재적 감각이 음식으로부터 나온다고 믿었다니 조금은 의외이지 않는가. 미감각을 자극 당하는 일이 중요한 이유는 모든 감각이 입에서 시작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맛의 신경을 거쳐 예술 세계에 영향을 끼칠거라는 믿음은 그의 음식에 대한 사랑이 왜 신성시되고 집착의 대상이 되었는지를 말해준다. 그에게 요리는 감각을 일깨우는 영감의 원천이었고 예술로 향하는 통로이자 도구였던 것이다
<소울 푸드>에서
모든 작가들의 영혼을 울린 그 지점에 어김없이 음식이 등장한 이유도 어쩌면 우리가 필연적으로 만나는 관문 마다 허기를 채우는일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런거라는 생각이 든다. 헛헛한 공허의 기분을 미감에 퍼지는 기운으로 감각을 되찾는 일인 것이다. 울거나, 화를 내거나, 자학하거나, 운동 하거나, 잠을 자거나 하는 일은 모두 채우려는 노력이다. 그 중 가장 따뜻한 위로를 건네는 일은 역시 먹는 것일 것이다. 무언가를 버리는 행위 보다는 역시 물리적인 것으로 채우는 일이 확실한 채움의 방점을 세우는 일이기는 하다. 이 책은 각자의 특별한 맛만을 전해주는 것 뿐인데도 어딘가 있을 내 영혼의 허기를 채우는 일을 근사한 호기심으로 채근하게 한다. 

머지않아 나만의 맛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대감으로 입안에 군침이 가득 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